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57
657
방 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한참 동안 석상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김종원 회장이 고개를 들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겠지?”
“······예.”
“막내가 둘째를 죽이라고 뒤에서 사주를 했다는 거야!”
“······.”
김종원 회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팔걸이를 으스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마른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을 보면서 박상빈 비서실장은 그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자네, 방금 한 말 책임질 수 있나?”
김종원 회장이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아무리 자네라지만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면 내 아들을 모함한 죄는 쉽게 용서하지 못해.”
“회장님.”
“어서 말을 해 봐!”
애써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한 김종원 회장의 모습에 박상빈 비서실장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 이러는 것이 이해가 됐다.
세상에 그 어느 부모도 자식이 친형제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걸 믿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허리를 바로 세운 박상빈 비서실장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털어 놨다.
“노형석이라고 막내 도련님이 태일물산 시절부터 밑에 두고 부리는 용역 업체 사장이 하나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드러내 놓고 처리하기 힘든 일들이 있었고 이런 걸 도맡아서 해결해 주는 이들을 한두 명 알고 지내는 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구치소에서 사망한 임동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노형석과 관련해서 수상한 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뭔가?”
“임동원이 교통사고를 내기 전에 1억이 넘는 사채 빚을 지고 있다가 한꺼번에 다 상환했는데, 대부업체 소유주가 바로 노형석이었습니다.”
아는 후배를 바지 사장으로 세워 놓고 나름 조심한다고 했지만 박상빈 비서실장의 정보력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자도 제대로 못 내고 허덕이다가 갑자기 원금까지 다 갚아 버리고 얼마 뒤에 사고를 낸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사고가 난 다음 날 노형석이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는데, 알고 보니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 가족들까지 미리 외국에 보내 놓았더군요.”
누가 들어도 수상한 행적이 아닐 수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김종원 회장이었기에 일련의 사태 뒤에 제3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당연히 눈치채고도 남았다.
“노형석 그자는 지금 어디 있나?”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에 박상빈 비서실장은 김종원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숨어 있던 필리핀에서 무장 강도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죽었다고?”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묻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임동원이 죽은 것과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마치 꼬리 자르기를 하듯 말입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김종원 회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얼마나 충격이 클지 알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기에 박상빈 비서실장은 윗도리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이건 또 뭐야?”
“그동안 모은 증거 자료들입니다. 안에는 죽은 임동원이 둘째 도련님이 찬 승용차를 들이박기 직전에 찍힌 CCTV 영상도 들어 있습니다.”
“······.”
“경찰 조사에서는 음주 운전을 하다가 벌어진 사고라고 진술했지만, CCTV 영상을 보면 현장 근처에 미리 트럭을 세워 놓고 있다가 둘째 도련님이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움직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김종원 회장은 한쪽 팔을 뻗어 USB를 손에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는 듯 격한 감정의 물결이 그를 마구 휘저어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내 이 자식을······!”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사나운 목소리로 김종원 회장이 겨우 단 몇 마디를 내뱉었을 때, 갑자기 그가 크윽 신음을 흘리며 뒤로 푹 넘어갔다.
“회,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악한 박상빈 비서실장이 황급히 김종원 회장을 부축했으나 전기 충격이라도 맞은 듯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면서 혀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봐, 밖에 누구 없나!”
박상빈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외치자 바깥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부속실에 있던 비서실 직원 몇몇이 뛰어들어 오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곤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실장님, 이게 어떻게······.”
“회장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빨리 구급차를 불러!”
“예, 예!”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박상빈 비서실장은 김종원 회장의 넥타이를 푸르고 조금이라도 숨이 편해지도록 연신 팔다리를 주물러 대었다.
“회장님, 회장님, 정신을 차려 보십시오!”
뺨을 때리고 어깨를 흔들어 봤지만 정신이 들기는커녕 김종원 회장은 물 먹은 솜처럼 소파에 축 늘어졌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구급대원들에 의해 환자 이송용 시트에 눕혀진 김종원 회장은 그대로 구급차에 태워져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띵동.
벨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황급히 내린 김인철은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복도 왼편에 위치한 수술실로 달려갔다.
그러자 무거운 분위기 속에 수술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사 비서실 직원과 임원들이 그를 발견하고 머리를 숙였다.
김인철의 시선이 복도 한쪽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박상빈 비서실장에게 닿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니 그게 정말이에요!”
“오셨습니까?”
몸을 일으킨 박상빈 비서실장이 그새 핼쑥해진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회사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으셔서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머리에 있는 혈관이 터졌다고 합니다.”
“이런······.”
뇌출혈이라는 말에 김인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얼마 전까지 멀쩡하셨는데 뇌출혈이라니요! 아버지께서 충격을 받으실 만한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다그치듯 묻자 박상빈 비서실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본인을 앞에 두고 그가 김문관 사장을 죽인 배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사이, 때맞춰 장남인 김성균 사장이 큰 발소리를 내면서 뛰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버지는 괜찮으신 건가?”
“큰도련님 오셨습니까?”
박상빈 비서실장이 막 도착한 김성균 사장을 붙잡고 일단 의료진이 수술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뒤에서 김인철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듯한 행동에 어딘지 모를 수상쩍음을 느꼈다.
그 뒤로도 소식을 들은 다른 가족과 그룹 주요 임원들이 속속 도착해 수술실 앞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수술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근심과 우려가 가득 깃들었다.
손에 목주를 쥔 어머니와 함께 의자에 앉아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을 때, 차민성 대리가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히면서 귓속말을 했다.
“이사님, 잠시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개를 든 김인철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한 층을 통째로 비웠기 때문에 수술실 주변은 의료진과 그룹 관계자들뿐이었다.
복도 코너를 돌아 후미진 곳으로 이동하자 음료수 자판기 앞에 모여 있던 직원 몇몇이 김인철의 얼굴을 보고는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벽에 금연 표시가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인철은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차민성 대리가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자 그는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말했다.
“알아봤나?”
“네.”
혹시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 차민성 대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두현 과장의 말에 의하면 박상빈 비서실장님과 독대를 하던 중에 회장님께서 뇌출혈을 일으키셨다고 합니다.”
“독대를 했다고?”
“그렇습니다.”
어쩐지 찝찝한 느낌에 김인철이 눈살을 좁혔다.
“뭣 때문에 독대를 한 거야?”
“그것까지는 이두현 과장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민성 대리가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리자 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답을 다그쳤다.
“답답하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다 말해.”
“박상빈 비서실장님이 회장님과 독대를 하기 전에 이두현 과장한테 필리핀에서 죽은 노 사장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생각에 김인철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노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젠장!”
와락 인상을 구기면서 김인철은 욕설을 내뱉었다.
바늘로 찔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김종원 회장이 충격을 받아 쓰러질 정도라면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컸다.
모든 걸 알게 된 김종원 회장이 자신을 어떻게 할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보나 마나 그를 그냥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골육상쟁의 비극을 벌였으니 지난번처럼 외국으로 쫓겨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가문에 먹칠을 하는 거였기에 외부로 사실을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모든 상속권을 박탈당한 채 강제로 남은 평생을 야인野人으로 살아가야 될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김인철은 치를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작은형을 밟고 일어나 이제 다시 큰형과 후계자 경쟁을 본격적으로 벌이려고 하는데, 또다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악에 받힌 눈으로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을 때 정적을 깨트리듯 비서실 직원 한 명이 발소리를 내면서 황급히 달려왔다.
“이사님, 수술이 다 끝났습니다.”
“······!”
정신이 번쩍 든 김인철은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구둣발로 비벼서 끄고는 얼른 수술실 앞으로 갔다.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지친 모습의 의료진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담당 의사한테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김성균 사장이 다급히 묻자 담당 의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뇌 손상이 심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되겠지만 어쩌면 의식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아······.”
충격을 받은 김종원 회장의 부인이 정신을 잃고 비틀거리자 장남인 김성균 사장이 옆에 있다가 얼른 부축했다.
“어머니!”
“이런, 뭣들 하고 있어. 어서 사모님을 병실로 모셔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
박상빈 비서실장의 호통에 비서실 직원들이 한데 달려들어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부인을 서둘러 조용한 곳으로 옮기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김성균 사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담당 의사를 향해 심각한 투로 물었다.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의학적인 처치는 다 한 상태라······ 현재로써는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일그룹 회장에 관한 일이었기에 수술을 집도한 담당 의사 역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다들 충격과 당혹감에 술렁이는 가운데 한쪽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인철은 남몰래 눈을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