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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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보고 있던 김성균 사장은 측근인 고동욱의 안내를 받으며 박상빈 실장이 안으로 들어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고동욱과 함께 사장실 한쪽에 놓여 있는 가죽 소파로 가서 마주 보며 앉았다.
몸을 비스듬하게 뒤로 기대고는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김성균 사장을 보며 박상빈 실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명 주식 정리가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만 작업이 끝나는 대로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서 반대편 임원들을 모두 해임시키고 계열 분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도록 할 계획이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저쪽에서 순순히 당하고 있겠습니까?”
앞서 힘 대결에서 밀려 한번 당했기 때문인지 조심스러운 태도에 박상빈 실장은 자신 있는 얼굴을 했다.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크게 반발하겠지만 기존에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주식에 차명 지분과 사모님이 가지고 계신 것까지 다 합친다면, 표 대결로 간다고 해도 충분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도 우리 손을 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깜짝 놀란 얼굴로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김성균 사장이 되물었다.
그러자 박상빈 실장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옥정구 복지부 장관하고 이야기가 다 끝났습니다.”
근심에 차 있던 김성균 사장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증권 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은 핵심 계열사인 건설과 정유는 물론이고 그룹을 지배하는 지주사인 태일산업 지분 12%를 소유한 2대 주주였기 때문이었다.
국민연금의 지지를 받을 수만 있다면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주주총회에서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옥정구 장관 집안에서 운영하는 의료법인에 100억 원을 후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적지 않은 액수였으나 김성균 사장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
“그룹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차명 계좌에 있는 비자금 일부를 기부 형식으로 의료법인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이렇게 기부된 돈은 의료법인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탁한 다음 옥정구 장관 개인 주머니로 흘러들어 갈 것이 분명했다.
들리는 소문에 내각에서 경력을 쌓은 뒤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어 한다고 하니까 지금부터 미리 기반을 닦아 놓으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할 터였다.
어찌 됐건 어머니에 이어서 또 하나의 든든한 우군을 확보했다는 생각에 김성균 사장의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그런 김성균 사장을 보면서 박상빈 실장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용산드림타워 공사가 예정보다 많이 지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그룹 경영권 문제 다음으로 가장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용산드림타워였기에 김성균 사장은 대번에 굵은 주름살을 이마에 만들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없던 편두통까지 생길 지경입니다.”
박상빈 실장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많이 안 좋은 겁니까?”
길게 한숨을 내쉰 김성균 사장이 몸을 뒤로 기대면서 대답했다.
“지반을 팔 때 조사에선 발견 못 한 지하수가 터지질 않나, 며칠 전에는 외벽에 설치해 둔 비계가 강풍에 무너지는 바람에 부상자가 나와 사고 뒷정리를 하고 안전 조사를 받느라, 공사가 일주일가량 중단됐습니다. 무슨 마魔가 끼었는지 돌아가면서 사고가 터지는데,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입니다. 공사를 하루 못 하면 손해가 얼마나 큰지 실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제 겨우 빌딩 하층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동안 안전사고가 난 것이 무려 서른 건이었다.
그나마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 해당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넘어간 경미한 사고들을 뺀 숫자가 그 정도였다.
그중에는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망 사고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김성균 사장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안전보다 공사 기간 지연과 비용 증가에 더욱 신경을 썼다.
“더 골치가 아픈 건 건설 경기 악화와 최근 있었던 주가 폭락 때문에 회사 신용 등급이 떨어져 금융 조달 비용이 높아졌다는 겁니다. 가뜩이나 아버지께서 쓰러지고 난 뒤부터 다른 계열사들의 자금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어려운데, 이자 부담까지 커지는 바람에 압박이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예상을 초과하는 공사비 폭등으로 인해 용산 드림 타원 프로젝트에 돈이 하염없이 들어가면서 태일건설이 보유한 여유 자금은 거의 씨가 말라 버렸다.
“거기다가 김포와 경기도 지역의 아파트 단지 사업장 세 곳에서 미분양이 절반 이상 나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 자금 사정이 더욱 안 좋아질 것 같아 걱정이에요.”
“수도권은 아파트를 가지고 싶어 하는 수요가 많아서 미분양이 나기 어려운 지역인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겁니까?”
박상빈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한쪽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고동욱이 김성균 사장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결과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변수라니?”
“우선 정부에서 강력하게 실행하고 있는 대출 규제입니다. 은행 문턱이 높아진 데다 금리까지 오르는 바람에 아파트를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숫자가 확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이것과 맞물려서 미분양을 우려한 건설사들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수도권에서만 수만 채가 한꺼번에 분양에 들어갔고 새 아파트 입주 폭탄까지 터지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꼬여 버렸습니다.”
이건 어떻게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악재가 아니었기에 운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가뜩이나 용산드림타워 문제로 자금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대규모 미분양은 큰 타격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노련한 박상빈 실장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김성균 사장의 기운을 북돋아 줬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이번에 임시 주총을 소집해서 그룹 내부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배은망덕한 자들을 더는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하는 김성균 사장의 눈에 분노가 가득 어려 있었다.
다음 날 정오, 혁권은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특급 호텔 스위트룸 가죽 소파에 앉아 홍콩에서 날아온 스텐저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유 선물 숏포지션에 베팅해 뒀던 걸 모두 청산했습니다. 막판에 국제 원유 가격이 바닥을 치고 급등하는 바람에 수익이 절반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거래로 4천만 달러 정도를 벌어들였습니다.”
이미 메일로 수익 보고서를 받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살짝 아쉬움을 드러냈다.
“미국이 이란 핵 협정을 파기하지만 않았어도 더 큰돈을 벌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군.”
“설마하니 미국 정부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존슨 씨께서 빨리 결단을 내린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수익을 낼 수 있었지, 까딱 잘못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겁니다.”
실제로 혁권이 스텐저 변호사를 통해 숏 포지션을 청산한 바로 다음 날 이란 핵 협정이 파기됐고, 이어서 이스라엘이 기다렸다는 듯 F-15 전폭기 편대를 동원해 시리아에 위치한 이란 군사기지를 맹폭하는 악재가 연달아 터졌다.
중동 정세가 급격하게 불안해지자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국제 원유 가격이 배럴당 69달러까지 폭등해 버렸다.
만약 이때까지 원유 선물을 쥐고 있었다면 수익은 고사하고 수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을 테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긴 항상 투자를 성공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 이번에는 손해를 보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겠군.”
“한 번에 이만한 수익을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선물거래로 발생한 수익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기대 가득한 시선에 그는 내심 피식 웃으며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원금하고 함께 스텐저 씨가 관리를 해 주시오.”
“하하하. 감사합니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고마움을 표시한 스텐저 변호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최근 미국 달러 수익률이 좋으니 당분간 그쪽에 묻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렇게 하시오.”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태일그룹 주식을 매입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 둔 페이터 컴퍼니로 박상빈 실장이라는 인물이 은밀하게 접촉을 해 왔습니다.”
눈을 치켜뜨며 혁권이 관심을 보였다.
“용건이 뭐였소?”
“주가가 폭락하고 난 뒤에 저희가 지주사인 태일산업을 비롯한 중요 계열사 두 곳의 대주주가 되자, 지분을 매입한 목적이 뭔지 살펴본 것 같았습니다.”
“내부적으로 경영권 다툼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주주가 나타난 거니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동안 꾸준하게 태일그룹 주식을 매입해 오기도 했지만, 얼마 전 벌인 공매도를 통해서 지분을 대거 취득한 혁권은 스텐저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조세 휴양지(Tax Resort)인 네덜란드에 두 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새로 만들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지분을 모았다.
공매도에 사용됐던 페이퍼 컴퍼니를 없애 버려 지분을 세탁하려는 목적과 함께 태일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주식을 합치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페이퍼 컴퍼니 설립을 끝내자마자 곧장 태일그룹에서 반응을 보인 것만 봐도 의도한 대로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 줬소?”
“말씀하셨던 대로 투자 목적으로 저평가된 태일그룹 주식을 매입한 것이라고 답변해 줬습니다.”
“잘했소.”
여차하면 태일그룹을 뒤집어 버릴 생각이었지만 먼저 칼을 드러내서 상대를 긴장시킬 필요는 없었다.
“대답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괜히 우리를 자극해서 불편한 관계가 될 생각은 없는지 일단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해 왔습니다.”
“······?”
“곧 임시주총을 개최해서 백화점과 유통, 가스를 계열 분리 시킬 예정인데 그때 지지를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계열 분리라고 했소?”
뜻밖의 이야기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그룹 후계 구도를 확립하며 자식들한테 재산 상속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런 것이 아니라면 굳이 꾸준히 이익을 내고 있는 계열사를 그룹에서 떼어 낼 이유가 없겠지.”
“구체적으로 어떤 계열사를 분리시킬 건지 거론하는 걸로 봤을 때 이미 작업이 상당수 진척된 걸로 짐작됩니다.”
“그럴 거요.”
능구렁이 같은 박상빈 비서실장이 준비가 안 끝났는데 함부로 소문을 내고 다닐 리가 없었다.
“죽은 둘째 아들의 유가족들은 그렇다고 쳐도 어떤 회사를 받게 될지 모르지만, 야심이 큰 김인철이 고작 계열사 하나에 만족하고 물러설지 모르겠군.”
그러자 스텐저 변호사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 보여 준 태도로 가늠해 볼 때 절대 그냥 있지는 않을 겁니다.”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매섭게 눈을 번득이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일이 또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