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0
70
향과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것이 와인이란 술인데, 어째 맹물처럼 벌컥벌컥 마셔 대는 꼴이 여간 초조하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힐끔 본 방갑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와인에 약을 탔으니, 억지로라도 마시게 해야 할 판인데 이렇게 되면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 아닌가.
그렇게 김인철이 세 잔째 와인을 마셔 대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황광모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이거, 미안하오.”
힐끔 시선만 줬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김인철이 고개를 돌리자 황광모는 머쓱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갔다.
이어서 조현태까지 내려와 멤버가 만들어지자 딜러를 보고 있던 배진환이 세 사람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시작해도 되겠습니다.”
“빨리 카드나 돌려.”
거칠게 와인 잔을 내려놓으면서 김인철이 짜증을 내자 오른편에 앉아 있던 황광모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미스터 이, 그렇게 흥분해서 좋은 패가 들어오겠소.”
“뭐요!”
눈썹을 꿈틀거리며 김인철이 노려보자 황광모는 한쪽 손을 들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워워,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 진정하시오.”
“흥.”
성질 같아서는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포커로 그동안 잃은 걸 다 찾아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딜러인 배진환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속임수가 없다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 양팔을 내밀어 앞뒤를 보여 준 배진환은 종이 케이스에 든 카드를 꺼내 능숙한 동작으로 섞었다.
보기에 그냥 단순히 카드를 섞는 것 같았지만 한편인 황광모한테 좋은 패가 가도록 교묘하게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속임수를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배진환은 손놀림은 무척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카드가 주르륵 놓이자 세 사람은 각자 신중한 얼굴로 패를 집어 들었다.
“A투페어.”
“스트레이트.”
김인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6부터 10까지 이어진 카드를 내보였다.
시작과 동시에 내리 열 판을 넘게 지다가 오랜만에 승리를 거뒀지만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이번 판으로 적지 않은 액수를 땄지만 지금까지 잃은 것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으니 당연했다.
천소희가 방금 딴 칩을 정리해서 가져다주자 김인철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해서 결판이 안 날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는 하프로 베팅을 합시다.”
그러자 왼편에 있던 조현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봤다.
“이봐, 그러면 판이 너무 커지잖아.”
테이블에 쌓인 판돈의 절반을 베팅하는 하프로 가면 조현태의 이야기처럼 판이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이 돌아가면서 하프 레이스를 한다면 순식간에 베팅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어 있었다.
히든카드를 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밀어 넣어야 될지 아찔해졌다.
조현태가 만류를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김인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 없으면 빠지든가.”
자존심이 상한 조현태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끄덕였다.
“씨팔. 좋아.”
김인철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황광모도 순순히 동의를 했다.
“그렇게 합시다.”
곧바로 게임이 재개됐고 판이 커진 만큼 카드를 확인하는 손길이 더욱 신중해졌다.
네 번째 카드를 받자 액면이 제일 높은 황광모가 먼저 베팅을 했다.
“그럼 가볍게 3천 달러부터 시작합시다.”
그렇게 말을 하며 1천 달러짜리 칩 3개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콜.”
콜을 외친 조현태와 달리 김인철은 바로 레이스를 쳤다.
“6천으로.”
“콜.”
“끄으응.”
아니나 다를까 채 한 바퀴가 돌기도 전에 베팅액이 6천 달러로 뛰어 버리는 걸 보고 조현태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딸랑 카드 한 장만 받고 죽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에 조현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다.
“콜.”
잠시 뒤 판돈은 10만 달러로 불어나 있었고 조현태가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두 사람만 히든카드를 받았다.
“10만.”
황광모가 칩을 한 무더기 밀어 넣었다.
마지막 히든카드를 확인한 김인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인상을 쓰며 카드를 엎었다.
“제길.”
한 장만 더 들어오면 풀하우스였는데 마지막에서 말라 버렸다.
그냥 뻥카를 칠 수도 있었지만 바닥에 깔린 황광모의 패가 자신보다 훨씬 좋았기에 그냥 포기했다.
테이블 한가운데 쌓여 있던 칩들이 거둬지고 딜러가 다시 카드를 나눠 주며 게임이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인철의 칩이 빠르게 줄어드는 반면에 황광모는 더 놔둘 곳이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황광모는 꾸준히 승리를 거뒀는데 마지막 히든카드까지 보면 거의 9할 이상 이겼다.
그렇다고 김인철한테 패가 안 좋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매번 꼭 원페어 이상은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게임이 말렸다.
특히 가뭄에 콩 나듯이 높은 패가 들어오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황광모는 중간에 미련 없이 죽었다.
기껏 상대가 끝까지 따라왔을 때에는 황광모가 마지막에 더 높은 패를 띄워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김인철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약에 취해 판단이 흐려졌다고 해도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카드를 계속 교체했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도 속임수를 쓰는 낌새가 없었기에 그런 마음만 들 뿐 딱히 뭐라고 하지를 못했다.
그런 가운데 밑천이 달리던 조현태가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난 여기까지야.”
조현태가 카드를 엎으며 말하자 김인철이 미간을 좁혔다.
“그만두려고?”
“보다시피 밑천이 다 털렸어.”
“카지노에서 빌리면 되잖아.”
신분이 확실하고 상환 능력이 있는 VIP 고객한테는 카지노에서 따로 상당액의 대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현태는 머리를 내저었다.
“벌써 250만 달러나 잃었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돈을 딸 운이 아닌가 봐.”
“…….”
치기 싫다는 데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을 수는 없었기에 김인철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자 앞에 칩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는 황광모가 여유롭게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보아하니 친구는 그만두겠다는 것 같은데, 미스터 이는 어쩔 거요?”
그냥 의사를 묻는 말이었지만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김인철은 마치 돈을 따고 빈정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김인철은 황광모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칩시다.”
“우리 둘만 말이오?”
“그렇소.”
확인하듯 상대가 되묻자 김인철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허어. 이것 참.”
황광모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1대1 포커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다 털릴 때까지 끝장을 보자는 이야기였다.
단둘이 승부를 보는 만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별로 없고 다이를 해 버리면 그대로 판이 끝나 버리는 거였다.
그리고 제대로 불이 붙으면 어느 한쪽을 완전히 태워 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방에서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혁권은 김인철의 제안에 눈을 번득였다.
“최악의 선택을 했군.”
모니터에 비치는 김인철의 얼굴을 보며 비웃음을 지은 그는 한쪽에 서 있는 하킴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려낼 만큼 다 우려냈으니까 이제 끝장 내 버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하킴은 지시받은 내용을 휴대폰 메시지를 보냈다.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고심하는 척하던 황광모는 방갑수의 신호에 머리를 끄덕였다.
“돈을 따 놓고 이대로 일어서는 것도 매너가 아닌 거 같으니 그렇게 합시다. 대신 무제한으로 계속 게임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시간제한을 둡시다.”
상대가 조건을 걸자 김인철은 미간을 좁혔다.
“딱 1시간 안에 결판을 내는 거요. 어떻소?”
황광모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자 김인철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여기서 황광모가 그냥 일어서 버려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기에 게임을 계속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소. 대신 나도 조건이 있소.”
“말해 보시오.”
“딜러를 바꿉시다.”
“……?”
순간 사기도박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닌지 심장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황광모는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무슨 뜻이오?”
말을 던져 놓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던 김인철은 딱히 부자연스러운 점이 보이자 않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너무 운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소.”
“마음대로 하시오.”
김인철이 의심한다는 걸 눈치챈 황광모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한쪽 팔을 내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다른 딜러로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방갑수의 이야기에 김인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저 여자한테 딜러를 하라고 합시다.”
“예?”
한손에 쟁반을 들고 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새 걸로 바꾸던 천소희는 김인철이 그녀를 지목하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카드만 돌리면 되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소?”
“아무리 그래도 생 초짜한테 맡기는 건 좀…….”
하지만 김인철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이유가 너무 빈약했다.
“그 쟁반 내려놓고 이쪽으로 오지. 1시간만 딜러를 맡아 준다면 수고비로 500달러를 주겠어.”
그러면서 김인철은 100달러짜리 칩 5개를 천소희 앞으로 던졌다.
쫘르륵.
제 앞에 나뒹구는 칩들을 보면서 방갑수에게 난처한 눈빛을 보내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배진환이 비켜 준 자리에 천소희가 들어가서 서자 김인철은 턱으로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왕이면 카드도 새로 바꾸지.”
“네.”
원하는 대로 천소희가 원래 있던 걸 치우고 케이스에 든 새 카드를 꺼내자 김인철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속임수를 방지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 행동이었지만 천소희 역시 한 패였기에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게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인철을 보며 모니터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혁권은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
“그래도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하킴과 달리 혁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돈을 잃었는데 의심을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럼 이쯤에서 그만둬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 다 끝나가니까 상관없어.”
혁권의 입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길게 내뿜어 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번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는 목소리가 오히려 기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렇게 발악이라도 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듯이.
* 욕망의 땅(2)
1대1 맞대결이 시작되고 첫판은 운인지 아니면 딜러가 바뀌어 황광모가 속임수를 못 썼는지 김인철이 이겼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판에서 아쉽게 패가 말라 버리는 바람에 졌고 그렇게 이기고 지기를 서로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