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07
707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이란이 아랍의 대단결을 외치면서 성전聖戰을 선언한다면 다른 중동 국가들도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종파나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도 아랍 세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UAE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미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은 데다 세속적인 색체가 강하다고 해도 중동 지역의 패권을 노리는 이상 성전 대열에서 빠져 한발 뒤로 물러나 구경만 하기는 어려웠다.
“중동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미국이 이스라엘을 제지하면서 물밑에서 이란과 협상을 시도하고 있으니, 실제로 충돌까지 가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보를 참고하시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만 해 두십시오.”
노련한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만수르 회장은 말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러고는 아주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존슨 씨가 아니었다면 갑자기 일을 당해 큰 낭패를 볼 뻔했소이다. 호의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정보를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가볍게 팔을 내저으면서 괜찮다고 하자 만수르 회장은 더욱 호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도움을 받았는데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을 순 없지.”
아무리 사양해도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데다 굳이 주겠다는 걸 억지로 싫다고 할 이유도 없어 혁권은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어쩔 수 없군요. 회장님의 호의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과연 뭘 해 주겠다는 걸까 궁금증을 애써 참으면서 대답하자 만수르 회장이 만족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존슨 씨, 당신은 진정한 내 친구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애초 목적한 대로 UAE의 실력자이자 큰손인 만수르 회장과 보다 돈독한 관계를 만든 것에 그는 내심 크게 기뻐했다.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혁권은 얼마 있지 않아 만수르 회장의 최측근인 자드란의 전화를 받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 연락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소.”
자드란은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회장님께서 아부다비 왕실에서 시리아와 예멘 난민들한테 지원할 구호물자 구매를 존슨 씨께 맡기기로 하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식사 때 만수르 회장이 말한 보답이 이거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대략 구매 액수가 6천만 달러 정도 될 겁니다.
“물량이 꽤 되는군요.”
혁권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정확한 건 물품 내역을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원가와 이런저런 비용을 빼더라도 최소한 600만 달러 이상은 남길 수 있었다.
한화로 68억이 조금 안 됐는데 우연히 귀에 들어온 정보를 슬쩍 알려 주고 받는 것치고는 아주 괜찮은 거래였다.
돈도 좋았지만 이번 만남으로 혁권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만수르 회장과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됐다는 거였다.
아부다비 왕실의 일원이자 스스로도 어마어마한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인 만수르 회장하고 친분을 맺는 건 대단한 인맥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중동 지역에서도 인맥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하기가 어려웠기에,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한 달 안에 화물을 가져와야 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물품 목록은 메일로 보내 놨으니 확인을 해 보십시오.
“그러지요.”
-대금은 내일 정부 관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으면 즉시 전액이 다 지불될 겁니다.
이것 역시 만수르 회장이 그를 배려한 것이 분명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손짓으로 태블릿을 가져오게 한 뒤 메일에 첨부되어 있는 파일을 확인했다.
의약품과 식량, 모포, 천막등 난민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열약한 의료 상황을 보여 주듯 의약품의 비중이 컸는데, 최근 예멘 일대에서 창궐하고 있는 전염병인 디프테리아Diphtheria 백신과 치료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을 쭉 훑어본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킴을 다시 불렀다.
“하킴.”
“예, 보스.”
대답을 하며 하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손에 든 태블릿을 건네주면서 지시를 내렸다.
“아테네에 있는 성석호한테 물품 목록 파일을 보내 주고 보름 안에 화물을 전부 준비해 놓으라고 해. 참, 그리고 의약품은 삼영제약에다가 주문을 넣으라고 말해 둬.”
“알겠습니다.”
이런 일을 수도 없이 해 본 성석호라면 물품 수배는 물론이고 운송편까지 문제없이 다 깔끔하게 준비해 놓을 터였다.
이렇게 믿을 수 있고 알아서 수족手足처럼 움직여 줄 부하들이 있으니까 예전처럼 하나하나 직접 처리하지 않고 지시만 내리면 되니, 일이 참 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항상 그가 내렸고 수시로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해서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는 문제에 대비했다.
보석으로 풀려난 김성균 사장은 하루 동안 외출을 자제하며 몸을 추스르고는 제일 먼저 이근홍 변호사를 자택으로 불러들였다.
“작업을 끝내려면 아직 멀었나?”
시선을 받은 이근홍 변호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차분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최대한 서두르고 있습니다만 감독 기관의 감시가 워낙 심해서 세탁을 해서 자금과 지분을 외국으로 빼내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성균 사장이 인상을 쓰고는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일을 맡긴 것이 언젠데 아직 그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근홍 변호사는 김성균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호출을 받고 올 때부터 준비해 둔 변명을 얼른 늘어놨다.
“워낙 큰 액수인 데다 지분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나중에 뒤탈이 없도록 세탁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거기다가 최근 그룹이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 상황이라 더욱 움직이는 것이 조심스럽고 말입니다.”
“끄으응.”
딱 짚어서 그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이 태일그룹을 주시하며 수사를 벌이고 있는 건 자신 때문이었기에, 김성균 사장은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비자금과 차명 계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박 비서실장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작업이 더욱 늦어지고 있습니다.”
“쯧.”
짧게 혀를 찬 김성균 사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핑계들이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았기에 일단 참고 넘어갔다.
“그래서 작업이 언제쯤 끝날 것 같나?”
“아무리 빨라도 다음 달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정을 앞당길 수는 없겠나.”
이근홍 변호사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난색을 표시했다.
“지금도 서둘러서 일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여기서 시간을 더 단축한다면 자칫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김성균 사장이 눈썹을 찌푸리자 옆에 앉아 있던 구민재 태일건설 재무이사가 이근홍 변호사를 두둔하며 말했다.
“자금 사정이 나빠 아쉽기는 하지만 이 변호사의 이야기대로 급하게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을 겁니다. 일이 잘못돼서 비자금과 차명 지분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지금보다 더 큰 곤욕을 치러야 될 테니, 조금 늦어지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어차피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하기 어려워졌으니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고동욱 실장까지 서두르지 말자고 하자 김성균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다들 의견이 그렇다니 할 수 없지. 대신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뒤처리를 확실히 해야 될 거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하자 이근홍 변호사는 상체를 세우며 얼른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비자금과 차명 지분을 김인철 쪽으로 빼돌리고 있는 것이 발각될까 봐 가슴을 졸이던 이근홍 변호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손바닥의 끈적한 땀을 바지에 몰래 닦았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김성균 사장은 고개를 돌려 고동욱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어?”
“주요 언론사 데스크와 이야기를 해서 광고를 추가로 내는 대신 더 이상 이슈를 확대시키지 않기로 했습니다.”
김성균 사장이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사를 다 내리는 것이 아니고 고작 추가 보도를 안 내는 걸로 끝냈단 말이야?”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딱 잘라 거부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이것도 조의창 정책실장의 비리 스캔들을 덮기 위해서인 거야.”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하자 고동욱 비서실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걸로 시선을 끌어도 될 텐데 왜 하필 나야!”
잔뜩 화가 난 김성균 사장의 목소리가 서재에 쩌렁쩌렁 울렸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동욱 비서실장은 죄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는 상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그룹에서 제 놈들 아가리에 쑤셔 넣어 준 돈이 얼만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어디 이딴 식으로 해서 정권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두고 보자.”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선거철은 물론이고 매년 수십억 원에 달하는 돈을 정치자금으로 바쳐 왔기에 그가 느끼는 배신감이 더욱 컸다.
“비열한 놈들 같으니라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김성균 사장은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서 껐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동욱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시끄럽게 난리를 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관심에서 멀어질 겁니다. 그러면 검찰과 협상을 해서 집행유예 정도로 사건을 잘 마무리 지울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담당 검사 놈이 완전히 골통이던데 그렇게 될까?”
“지금이야. 조 정책실장 일을 덮기 위해서 이러는 거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분명 검찰도 태도를 바꿀 겁니다. 그때 가서도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담당 검사를 교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김성균 사장은 그제야 조금 화가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일단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게 언론에 신경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참, 대국은행에서 대출금 연장을 받기로 한 건 어떻게 됐어?”
시선을 받은 구민재 재무이사가 얼굴을 살짝 굳히면서 대답했다.
“약간 이견이 있기는 했지만 대출금 상환을 1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대신 이자율을 종전보다 1% 더 올려서 지급해 주기로 했습니다.”
“1%나!”
김성균 사장이 눈썹을 추켜올리자 구민재 재무이사가 얼른 변명을 했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문제 삼으며 은행 측에서 대출 연장에 난색을 보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길! 또 그게 말썽이군.”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김성균 사장은 속으로 화를 눌러 참기만 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었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탓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 김성균 사장은 새삼 뒤에서 어려운 일을 다 처리해 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박상빈 비서실장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