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09
709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Ⅱ
VIP 손님인 만큼 레스토랑 지배인이 직접 들어와 정중하게 메뉴판을 테이블에 펼쳐 보이면서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둘째 형수인 홍수연이 메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카푸치노로 가져다줘요.”
“나도 같은 걸로.”
“알겠습니다.”
지배인이 메뉴판을 챙겨서 나가자 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약간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자고 한 용건이 뭐죠?”
예전부터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데다가 김문관이 사고로 죽고 나서 남편의 몫인 태일정유를 김인철이 빼앗았다는 생각에 더욱 껄끄럽게 그를 대했다.
그런 그녀와 달리 김인철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여유를 부리면서 말을 받았다.
“그래도 한가족인데 너무 쌀쌀맞지 않으십니까?”
“이유는 도련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전 형수님하고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식으로 불러내지 말아 주세요.”
한 마리 암사자처럼 잔뜩 발톱을 세운 모습이 그는 내심 가소로웠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지만 형수님께서 그걸 원하시니 저도 용건만 이야기하고 빨리 끝내도록 하지요.”
때마침 종업원이 주문한 차를 가지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원두 향기가 기분 좋게 퍼져 나갔지만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각자 예의상 한 모금씩 카푸치노를 마셨다.
그러고는 김인철이 앞에 앉아 있는 홍수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오늘 만나자고 한 용건을 꺼냈다.
“둘째 형님이 가지고 있던 태일산업 주식을 전부 저한테 넘기십시오.”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홍수연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세의 2배를 쳐주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절대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 겁니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홍수연은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 지분은 우리 아이들 몫이에요. 태일정유를 가져간 걸로도 부족해서 지금 지분까지 빼앗으려는 거예요!”
테이블에 올린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치밀어 오른 분노에 숨소리마저 거칠어져 있었다.
홍수연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는 김인철이 요구한 태일산업 주식은 지분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일그룹의 지주사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너 일가로 그룹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 걸 내놓으라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인철은 다리를 꼰 자세로 형수를 바라보면서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태일정유를 맡은 건 내가 형을 밀어낸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걸 따른 것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어차피 결과는 똑같잖아요.”
“설득을 한다고 해서 오해를 풀지 않을 것 같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흥!”
“어차피 백화점과 유통을 받아 계열 분리를 해 나갈 거라면 태일산업 지분은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김인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설마 그룹 경영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자 홍수연이 발끈하며 날을 세웠다.
“우리 아이들도 아버님의 친손자들이 당연히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훗, 하하하!”
순간 김인철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홍수연이 눈을 치켜뜨고 뭐라 말하려던 찰나, 돌연 웃음소리가 뚝 멈추더니 전에 비할 데 없이 위험한 분위기를 두른 김인철이 그녀를 비뚜름하게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참 깜찍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걸 나는 물론이고 큰형님이 용납할 것 같습니까.”
순간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살기를 느낀 홍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백화점과 유통이라도 챙기고 싶으면 그룹 경영권에는 시선도 주지 말고 그냥 죽은 듯 엎드려 있어야 될 겁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작은형도 안 계신데 형수님과 조카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기에 진심으로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마치 뱀이 먹잇감을 앞에 둔 것 같은 차가운 시선에 그녀는 몸을 흠칫 떨면서도 애써 당당한 얼굴로 자존심을 세웠다.
“그래도 지분은 팔지 않겠어요.”
처음부터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인철은 그다지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몸을 뒤로 기댄 채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들리는 소문에 형수님 친정이 요즘 많이 어렵다고요.”
홍수연이 정색을 하며 그를 노려봤다.
“무슨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녀의 친정은 국내 2위의 대형 선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몇 년간 계속된 해운 경기 불황에 직격탄을 맞고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나 해운 경기가 좋았을 때 직접 선박을 건조하지 않고 비싼 값에 장기 용선傭船 계약을 맺어 노선을 운항하던 것이 무거운 부담이 되어 회사 재정을 압박했다.
“8분기 연속 적자가 나는 바람에 잉여금이 바닥난 데다, 금융권 대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본사 건물은 물론이고 보유하고 있는 선박까지 매물로 내놨다고 하더군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면서 김인철이 말을 이었다.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는데 이럴 때 500억 원이라는 돈이 들어오면 아주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은근한 협박에 홍수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김인철은 다시 한 번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형수님이 팔지 않는다고 해도 과연 태일산업 지분을 계속 지킬 수 있을까요?”
“······.”
“그룹 경영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큰형님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둘째 형님이 남긴 태일산업 지분을 회수하려고 할 겁니다. 그 대가는 백화점과 유통이 될 거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죽은 그이한테서 물려받은 정당한 재산인데 누구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거예요?”
“과연 그럴까요. 형수님도 기업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크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재산과 경영권 앞에서는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볼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분하고 화가 났지만 그녀는 김인철의 말이 송곳처럼 가슴에 아프게 꽂혔다.
“저한테 지분을 넘기면 거액의 돈을 손에 쥘 뿐만 아니라 다음에 있을 주주총회에서 백화점과 유통을 계열 분리해서 조카들한테 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손을 꽉 움켜쥔 홍수연은 고민에 찬 표정을 지었는데 김인철은 미웠지만 그가 내민 제안은 너무나 솔깃했다.
VIP룸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김인철은 느긋한 얼굴로 몸을 뒤로 살짝 기댄 채 찻잔을 들어 주문한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결정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홍수연이 처음과 달리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에 김인철은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바로 하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닐 테니 좋습니다. 사흘간 시간을 드리도록 하지요.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입니다. 지분을 매도하고 나서도 제 쪽에서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한테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 그녀도 눈치가 있었기에 순순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그녀 역시 괜히 태일산업 지분을 팔아 버린 것이 빨리 알려진다면 시어머니와 큰아주버님인 김성균 사장이 화가 나서 백화점과 유통을 떼어 주기로 한 걸 없던 일로 해 버릴 수 있었기에, 가급적이면 주주총회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 밝혀지는 것이 나았다.
대화를 모두 끝낸 두 사람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비록 바로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김인철은 작은형수가 결국에는 자신한테 태일산업 지분을 팔 거라고 확신했다.
기존에 김종원 회장한테 증여를 받아 가지고 있던 주식에, 둘째 형수에게 매입할 것까지 합치면 태일산업 지분을 6%로 늘릴 수 있었다.
여기에 차명으로 된 주식을 더한다면 10%가 조금 못 되는 지분을 확보할 수 있어 큰형과 충분히 맞서 볼 만했다.
다음 날 오후, 김포 공항에 도착한 혁권은 간단하게 입국 수속을 끝낸 뒤 VIP 통로를 이용해 공항 청사를 나왔다.
공항 청사 앞에는 그가 국내에서 이용하는 검은색 벤츠 S클래식 롱바디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독일에 있는 벤츠 본사에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차량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VR 방호 등급에서 가장 높은 VR10 등급을 적용해 일반 소총탄은 물론이고 수류탄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고 거뜬하게 견디는 성능을 자랑했다.
거기다가 외부 도청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자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장치를 갖추고 주문 생산한 차량이었기에 가격 또한 동급 모델에 비해 훨씬 높아 7억이 조금 안 되는 비용을 지불했다.
정말 억 소리가 날 만큼 비싼 가격이었지만 안전을 위한 거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혁권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뒤따라서 올라탄 주성철을 보며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새 변동 사항이 있었다고?”
“예. 체크 재팬 계좌에 들어가 있던 가상화폐들이 어제 오후에 다시 한국 거래소로 옮겨져서 시세를 크게 떨어뜨리지 않을 만큼 순차적으로 나눠 환전되고 있습니다.”
벌써 돈이 인출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얼마나 환전이 됐지?”
혁권의 물음에 주성철이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재빨리 상황을 확인해 보고는 바로 대답했다.
“150억 원이 조금 넘습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나흘 안에 가상화폐를 모두 처분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 되는 돈이 풀려도 시세가 안 흔들릴 만큼 거래 규모가 크다는 거야?”
“하루에 평균 1조 원이 넘는 거래가 이루어질 정도로 국내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순위권에 들어가는 규모입니다.”
“대단하군.”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거래 규모에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든지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데다 세금도 내지 않고 계좌를 추적당할 염려도 없으니 검은 자금을 세탁하고 사용하기에는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겠군.”
“저희도 도박 사이트와 체크 재팬 거래소를 해킹해 놓지 않았다면 이런 움직임을 포착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랬겠지.”
혁권이 크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환전을 한 돈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알아낼 수 있나?”
그러자 주성철이 기다렸다는 듯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모두 10개의 각자 다른 이름으로 된 계좌인데 은행과 지점이 동일한 곳입니다.”
“대포 통장일 확률이 높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종이를 펼쳐 본 혁권은 10명의 이름과 함께 계좌 정보가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는 걸 잠시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어 조수석에 탄 하킴에게 시선을 줬다.
“누군지 짐작이 되지만, 대포 통장들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그리고 빼돌린 자금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알아봐.”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