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23
723
며칠 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보고를 처음부터 다 들은 표현구 원장은 낮게 탄성을 흘리면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사드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닌데 작전이 완전 실패한 상태에서 그대로 손을 뗐다는 건가?”
이철웅 2차장이 시선을 받으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거 대상이었던 김혁권이 다시 버젓이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작전을 포기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측의 강제 추방 조치에도 항의를 전혀 해 오지 않고, 실종이 됐다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순히 출국을 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실종된 사람이 이스라엘 대사관 무관이라고 했지?”
“네. 새넌이라고 신분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모사드 화이트 요원 가운데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유 없이 사라졌을 리는 없고,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겠군.”
“아마도 이번 사건에 엮여서 목숨을 잃었을 거라 추정 중입니다.”
“흠······.”
표현구 원장이 깊이 생각하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모사드가 왜 이렇게 쉽게 물러난 것 같나?”
짐작되는 구석이 있으면 얼른 이야기해 보라는 눈빛에 이철웅 2차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중간에 CIA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미국이?”
“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표현구 원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사드가 과격한 수단을 써서 김혁권을 제거하려던 이유가 이란에서 원유를 대규모로 가져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란산 원유는 매입이 금지된 품목일 텐데?”
“맞습니다. 미국이 실시하는 대이란 경제 제재의 핵심이라 유럽을 비롯한 각국이 예외로 적용해 달라는 요구도 전부 거부했을 정도입니다.”
더욱 의문스러운 표정이 된 그가 재차 물었다.
“그럼 미국이 모사드를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란과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김혁권을 막아야 되는 것 아냐?”
정상적이라면 표현구 원장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았다.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야?”
표현구 원장은 지금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는 걸 눈치챘다.
“김혁권이 이란산 원유를 가져오는 것이 CIA,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악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거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표현구 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좁혔다.
“확실한 거야?”
이철웅 2차장이 시선을 주자 함께 원장실에 들어온 심인성이 대신 입을 열었다.
“본인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허어.”
헛웃음을 내뱉은 표현구 원장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미국이 뒤로 뭔가 꾸미는 일이 있는 거군.”
“시리아에서 점점 격화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을 봉합시키기 위한 비밀 협상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앞뒤 사정을 모조리 파악한 그가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 그런 거였군.”
“이런 사정을 모사드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이철웅 2차장이 말을 덧붙이자 그는 동의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판을 짜기 위해서 당연히 이스라엘 정부와 이야기가 오갔겠지만 비밀스럽게 추진되는 일이었던 만큼 모사드에는 전달이 늦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조직 간에 정보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보안에 치중하다 보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였다.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니 대단하군.”
그러고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김혁권은 지금 어디 있지?”
“오늘 아침에 홍콩으로 출국했습니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스텐저 변호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공항 청사 앞에 세워 둔 벤츠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탔다.
부드럽게 승용차가 출발하자 고급스러운 수제 양복에 명품로고가 박힌 넥타이를 맨 스텐저 변호사가 미소를 띤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경제 제재로 수출길이 꽁꽁 막힌 이란산 원유 매입을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받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혁권은 솔 루시두스가 아닌 이번 거래에만 이용할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서 모든 일을 진행시켰다.
거기에 필요한 서류 작업을 스텐저 변호사가 대신 맡아서 해 줬기에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었다.
“거래가 전부 마무리되면 뒤탈이 없도록 확실히 처리해 주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 그리고 오늘 법인 계좌로 DK정유에서 보낸 계약금 900만 달러가 들어왔습니다.”
놓치기 아까운 제안이었기에 예상대로 DK정유는 그가 확보한 이란산 원유를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총액이 10억 달러가 넘는 아주 큰 계약이었다.
정상적이라면 10%인 1억 달러를 계약금으로 지불해야 됐지만, DK정유도 자칫 문제가 생겨 원유 인도에 차질이 생기거나 아예 거래가 무산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지고 가는 걸 감안해서 계약금 액수를 낮추기로 합의했다.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스텐저 변호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페이퍼 컴퍼니를 몇 군데 거쳐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으로 전부 송금했습니다.”
“수고했소.”
유럽 중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 소국小國인 리히텐슈타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세 회피처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말해 둔 건 어떻게 됐소?”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대답과 함께 스텐저 변호사가 발밑에 놔둔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쓰기 편하게 10만 달러짜리로 준비했습니다.”
잠금장치를 풀고 가방을 열자 안에는 미국 정부에서 발행한 재무부채권이 다발로 묶여 들어 있었다.
개수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가방을 닫아 옆에 놔두자 스텐저 변호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란산 원유는 이번 한 번만 거래를 하시는 겁니까?”
혁권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스텐저 변호사를 쳐다봤다.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 풀리는 건 국제 시세 변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데다 이번 거래로 꽤 짭짤한 수수료를 받기로 되어 있었기에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 것 같소.”
“아쉽군요.”
정말로 아쉬운 듯 스텐저 변호사가 입맛을 다셨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에 우뚝 서 있는 초고층 빌딩에 위치한 L&S 코퍼레이션 사무실로 가서 보다 자세한 보고를 받고 향후 행동을 지시한 혁권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숙소로 잡은 호텔에 들어갔다.
근접 경호를 맡은 정지택이 캐리어를 한쪽에 내려 두는 사이 그는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걸어가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옆으로 걷었다.
그 유명한 홍콩의 야경이 한눈에 확 펼쳐지면서 빌딩과 차 들의 반짝거리는 불이 아름답게 빛났다.
가만히 서서 전망을 바라보고 있으니, 부하 한 명이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가져와 혁권에게 내밀었다.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든 혁권은 위스키를 한 번 홀짝인 뒤 이내 화려한 야경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가죽 소파로 가서 앉자 백성균이 한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보스, 샌더슨이 보내온 겁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본 혁권은 온더록스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서류 봉투를 건네받아 안을 열어 봤다.
열 장 정도 되는 서류에는 이제 며칠 뒤면 만나서 이란 정부가 이스라엘과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해야 될 솔레이마니 사령관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CIA가 가지고 있던 자료답게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 인물과 이란 최고 권력층 내부의 세력 구도까지 내밀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차분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혁권은 뭔가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냈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란 내부 사정이 예상한 것보다 더 안 좋은 것 같군.”
“그렇습니까?”
백성균이 관심을 보이자 혁권은 서류를 툭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수도인 테헤란뿐만 아니라 남서부에 있는 후제스탄주에서 폭력 시위가 벌어져서 사망자까지 나왔다는군.”
“사람이 죽었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런 시위가 갈수록 점점 격렬해지고 이란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는 거야. 안 그래도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이란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곤란한 상황이지.”
온더록스 잔을 집어 든 혁권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이란 내부의 혼란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했다.
방해하지 않도록 백성균이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고, 한동안 침묵이 드리워진 가운데 정적을 깨는 벨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럽게 생각의 흐름이 끊긴 혁권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지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요, 샌더슨.
어쩐 일인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보내 준 자료는 확인했소?
“그걸 물어 보려고 전화를 건 거요?”
-실은 급히 알려 줄 일이 생겨서 연락을 했소.
“······.”
아직 이야기를 듣진 않았지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 텔아비브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져 이스라엘 경찰관과 일반인 20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벌어졌소.
“아니, 어쩌다가?”
-어제 예루살렘에서 미국 대사관 이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진압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이 총격을 가해 팔레스타인 청소년 3명이 죽는 일이 있었소. 아무래도 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 같소.
혁권이 눈썹을 찡그린 가운데 샌더슨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이스라엘 정부가 F-15 전폭기를 동원해서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 국경 지역에 설치된 헤즈볼라 군사기지와 훈련 시설을 내일 새벽에 폭격할 계획이라는 거요.
“자살 폭탄 테러 배후가 헤즈볼라인 겁니까?”
-그렇소.
갑작스러운 악재에 혁권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니, 그러면 헤즈볼라의 근거지인 레바논을 폭격해야지, 왜 시리아에 공습을 가하려는 거요?”
-친미 성향에 이스라엘하고도 유화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를 배려한 거라고 하는데, 우리 쪽 판단으로는 이란과의 협상을 탐탁지 않게 열기는 군부 강경파가 이란 정부를 자극해서 판을 깨려는 꼼수를 부리는 것 같소.
시아파 테러 조직인 헤즈볼라의 뒤에 이란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에, 이스라엘이 정말로 공습을 실행한다면 가뜩이나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양국 사이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가 공습을 제지할 수는 없는 거요?”
-그게 어찌 됐건 테러를 당한 것에 대해 보복을 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막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소.
“이래 놓고 어떻게 나더러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설득하라는 거요?”
미미하게 짜증 섞인 투로 투덜거리자 샌더슨이 면목 없다는 듯이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하고 샌더슨이 말을 계속했다.
-공습을 완전히 막을 순 없지만 규모라도 축소시킬 수 있도록 애를 쓰는 중이니까 조금 기다려 보시오.
혁권이 쯧 혀를 찼다.
“상황이 진행될 때마다 바로 연락해 주시오.”
-알겠소.
뚝 끊어진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혁권은 잘 안 풀리는 상황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