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22
722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간 늦은 시간이었지만 샌더슨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호텔 객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탁자에 놓인 재떨이에는 이미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찬 꽁초더미에 새롭게 하나를 추가한 샌더슨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여 다시 입에 담배를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고 하던 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샌더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나요.
약간 가라앉은 혁권의 목소리에 그는 담배를 입에서 빼 한쪽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일이 끝난 모양이군.”
-그렇소.
담담한 대답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샌더슨은 모사드에서도 최정예 암살 조직인 키돈 요원들을 아무리 기습을 했다고 해도 혁권이 처리했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
그러다 먼저 습격을 받고도 오히려 키돈 암살팀을 전멸시킨 걸 떠올리고는 새삼 혁권이 가진 무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알려 준 장소에 놈들의 시신을 놔뒀으니 뒤처리를 해 주시오.
당연하다는 듯한 요구에 샌더슨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아예 대놓고 날 부려 먹으려고 하는군.”
-나보다는 그쪽에서 정리하는 것이 더 깔끔하지 않겠소.
뻔뻔한 태도에 머리를 절래 흔든 샌더슨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번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상당히 무리를 했다는 걸 미스터 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솔레이마니 사령관과의 만남에서 우릴 실망시키는 일이 없길 바라겠소.”
은근한 압박에 혁권은 잠깐 말이 없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노력해 보겠소.
이쯤하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샌더슨은 괜히 입을 떼었다가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해 그 이상 자극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날이 밝기 전에 싸움을 벌인 창고는 버려져 있던 모사드 요원들의 시신과 함께 CIA 청소부들에 의해 깨끗하게 처리됐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모사드는 발칵 뒤집혔는데 지원팀까지 합쳐 20여 명이 넘는 요원들을 한꺼번에 잃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복수를 외치며 암살팀을 보냈을 모사드였지만 백악관과 CIA의 강력한 압박에 결국 무릎을 꿇은 이스라엘 정부의 지시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속으로 분을 삭여야 했다.
여기에 죽은 새넌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하던 10명의 요원들이 강제 추방을 당하면서 모사드는 최악의 굴욕을 감수해야 됐다.
이런 가운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다시 서울로 돌아온 혁권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특급 호텔 객실에서 대학 선배인 최필성을 만났다.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으응. 아니야.”
아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살벌하게 눈을 번득이며 객실 안팎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의 모습에 주눅이 들었는지 악수를 하고 맞은편 소파에 앉은 최필성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걸 알면서도 혁권은 짐짓 모르는 척하며 불필요한 이야기를 줄인 채 곧장 용건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건 거래를 했으면 하는 물량이 있어서입니다.”
“원유를 말하는 거야?”
얼른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그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정유회사에 팔 물건이라면 원유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이미 몇 번 거래를 하며 상당한 재미를 봐서 그런지 최필성은 바싹 몸이 단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물량이 꽤 많아서 다 감당이 될지 모르겠군요.”
“얼마나 되는데 그래?”
“유조선 12척 분량입니다. 그중에 5척은 ULCC(Ultra Large Crude Carrier)급이고요.”
“그럼 한 400만 톤이 되겠군.”
엄청나게 많은 물량에 놀란 표정을 짓던 최필성은 이어진 혁권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부릅뜨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차가 그렇고 비슷한 규모로 한 번 더 원유를 가져올 계획이니 전부 다 합치면 대략 750만 톤 정도 될 겁니다.”
“7, 750만 톤이라고······.”
말까지 더듬으며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전체가 사흘 동안 풍족하게 쓸 수 있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 서너 개를 원유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물량도 많았지만 그동안 원유 가격이 크게 올라 성사가 된다면 대충 계산해 봐도 매입 금액이 조 단위를 넘기는 초대형 계약이었다.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최필성이 그를 쳐다보면서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 물량을 다 가지고 있다는 거야?”
“설마 제가 원유도 없이 이런 제안을 하겠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김 대표도 알겠지만 물량이 적지 않다 보니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말이야······.”
최필성이 말끝을 흐리면서 눈치를 보자 혁권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에 물러나 있던 정지택이 그걸 보고선 가방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내 최필성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혁권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열어 보라는 것처럼 턱을 까딱이면서 말했다.
“산유국 정부에서 발행한 원유 인도 계약서입니다.”
원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서류였기에 최필성은 팔을 뻗어 서류철을 펼쳤다.
이야기한 대로 계약서에는 원유 750만 톤을 인도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약 상대가 이란국영석유(NIOC)인 걸 확인하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가져온다는 원유가 이란산인 거야?”
“네.”
처음에 눈을 반짝거렸던 것과 달리 삽시간이 김이 샌 표정이 되었다.
“이건 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혁권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최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핵 협정이 파기되고 미국 정부가 대이란 경제 제재를 재개한다고 선언한 상태에서 이란산 원유를 매입하는 건 곤란해. 자칫 잘못했다가는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조항에 적용을 받아 회사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지도 몰라.”
원유는 미국 정부가 가장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제재 품목이었으니 매입을 거부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혁권이 한쪽 다리를 꼬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이맛살을 찌푸린 최필성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미국 정부에서 승인을 받은 거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바로 얼마 전에 이란산 원유를 구매하지 말라는 미국 정부의 정식 공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 최필성은 불신에 찬 시선으로 혁권을 봤다.
“계약서 뒷장에 승인 서류가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설마하며 계약서를 넘겨보자 정말로 미국 정부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승인 서류가 있었다.
DK정유는 다행히 이란에서 원유를 거의 도입하지 않았기에 그리 큰 피해가 없었지만, 거래가 많은 몇몇 정유사들이 어떻게든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에 로비를 벌였으나 예외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데 대형 정유사들도 받아 내지 못한 미국 정부의 승인을 혁권이 얻어 냈다니 당황스럽고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상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혁권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제대로 절차를 거쳐 발급받은 거니까 미국 대사관에 가져가서 확인을 해 봐도 됩니다.”
진짜가 아니라면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긴 최필성은 부쩍 구미가 당기는 얼굴로 물었다.
“얼마에 팔 생각이야?”
“현재 시세가 배럴당 52달러 정도 되니까 전량을 다 매입한다면 51달러에 넘기도록 하죠.”
물량이 엄청났기에 1달러를 빼 줘도 차액이 아주 컸다.
더군다나 최근 경제 회복과 중동 정세 불안이 맞물리면서 국제 원유 가격이 다시 상승하는 추세였기에 DK정유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혁권도 골치 아프게 이런저런 신경을 쓰지 않고 확보한 물량을 한꺼번에 처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격은 그 정도면 됐군. 물량이 많아서 내가 혼자 결정할 수가 없는데, 며칠 시간을 줄 수 있겠어?”
한두 푼도 아니고 성사가 된다면 조 단위의 계약이 될 테니 과장 직급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오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시간은 이틀을 주도록 하죠.”
“그건 너무 촉박한데.”
시간을 더 줬으면 하는 뉘앙스였지만 혁권은 단호히 거부했다.
“안 된다면 다른 매수자를 찾아보겠습니다.”
“뭐? 아, 아니야.”
생각 외로 더 단호한 태도였기에 졸지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최필성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틀 내로 답을 주도록 하지.”
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원유는 이번 달 안으로 절반이 들어올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
최필성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원유 매입 승인을 받기는 했지만 알다시피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동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이 안전할 테니까요.”
설명을 들은 최필성은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갑자기 미국 정부가 승인을 취소하고 원유 인수를 막아 버린다면 그것보다 난감한 것이 없겠지.”
“그렇지요.”
애초에 혁권이 국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유를 매도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최필성은 엉거주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럼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겠군.”
“서류는 사본을 따로 만들어 뒀으니까 가져가도록 하세요.”
혁권이 손짓을 하자 정지택이 다가와 미리 준비해 둔 사본을 최필성한테 건네주고는 원본은 다시 서류 가방에 챙겨 넣었다.
“결정이 나면 바로 연락을 주세요.”
“그러지.”
가볍게 악수를 나눈 최필성은 서류 사본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서 객실을 나갔다.
다시 소파에 앉은 혁권이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자 백성균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그는 어깨를 뒤로 기댄 채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백성균에게 시선을 줬다.
“화물 선적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예. 내일 오후까지 작업이 모두 완료될 겁니다.”
“그러면 늦지 않게 일정을 맞출 수 있겠군.”
지난 며칠 동안 모사드를 상대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함단과 성석호가 차질 없이 일을 진행시켜 놨다.
“그리고 함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보스를 모실 경호원 열 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혁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러?”
“아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데다 죽거나 다쳐서 빠진 숫자가 꽤 되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인원을 보충하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쓸데없는 신경을 썼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려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테네에 있는 성석호한테 연락해서 늦지 않게 유조선들을 하르그섬(Khàrg Island)으로 보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하르그섬은 중동 페르시아만 북동부에 위치한 이란 최대의 원유 수출 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