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4
74
정권을 무너뜨리면 기존에 세력에 협력하던 자들을 쳐 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이제 그의 오른팔이 된 자말만 해도 원래 정부군 장교였다가 강제로 군대에서 쫓겨난 경우였다.
특히나 정권을 잡은 반군과 무기를 맞대고 치열하게 싸웠던 상대였으니 숙청은 더욱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사실상 카다피 시절 군대를 완전히 해체시키다시피 했고 이런 숙청 작업은 정부 기관을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독재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이 큰 피해를 봤고 군과 정부를 실질적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중요한 인재들이 상당수 쫓겨났다는 거였다.
리비아가 민주화 혁명을 이룬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내부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제대로 사회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자위야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이어 갈 가능성이 클 겁니다.”
“주민들만 더 살기가 힘겨워지겠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현재 상황에서 딱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행을 태운 차량은 항구 근처에 위치한 제법 큰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브르급 공기부양정으로 이용한 물자 수송이 자리를 잡고 많은 수익을 올리자 아예 근거지로 쓸 주택을 구입한 거였다.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한꺼번에 차량 서너 대를 주차시켜도 될 만큼 넓은 마당에 방도 8개나 되는 이 층 주택으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매입했다.
그는 이 층에 있는 가장 넓고 좋은 방에 짐을 풀었다.
미리 청소를 해 뒀는지 방안은 상당히 깨끗했다.
짐가방을 놔두고 침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띠리리릭.
상체를 바로 한 혁권은 짐 가방을 뒤져 벨이 울리고 있는 위성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미스터 김, 날세.
전화를 건 사람은 트리폴리 암시장의 거물인 압둘라흐만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허허허.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지만 연락을 하는 사이인가. 이거 섭섭하구먼.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해 본 소리일세. 그것보다 자네도 소식을 들었겠지?
“앨 하샤가 함락된 것 말씀이십니까?”
-맞네. 정부군이 급히 전력을 투입해서 ADDI의 진격을 가까스로 막아 내기는 했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혁권은 티를 내지 않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거 큰일이군요.”
-그래서 자네한테 부탁할 것이 있네.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랐기에 혁권은 살짝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정부군 측에서 급히 의뢰한 물건이 있는데 그걸 좀 운송해 줬으면 하네.
“화물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대충 짐작하겠지만 정부군이 쓸 군수품일세.
“그런 거라면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데 그냥 화물기로 가져오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지 않겠습니까?”
비용은 바다를 이용하는 것보다 조금 더 들어가겠지만 다급한 전선 상황을 생각하면 이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현존하는 공기부양정 중에 제일 큰 규모라고 해도 한계가 분명해서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물량은 화물기와 엇비슷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쉽게도 당분간 공항을 이용하기 어렵게 됐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압둘라흐만이 의문을 풀어 줬다.
-1시간 전에 ADDI가 로켓포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트리폴리 국제공항 활주로가 못 쓰게 되어 버렸다네.
“아니, 그럴 수가…… ADDI가 아직 자위야를 넘지 못한 것 아니었습니까?”
-맞네.
“그런데 어떻게 공항을 공격할 수 있는 겁니까.”
-ADDI가 카디피 군한테서 노획한 BM-27 우라간Uragan을 가지고 있었더군. 그걸 몰래 자위야 동쪽으로 가져가서는 로켓탄을 발사한 거지.
일명 폭풍이라고 불리는 우라간은 220밀리미터 로켓 16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로켓 발사 차량으로 무시무시한 별명처럼 목표 지역 반경 수십 미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무기였다.
이런 무기에 공격을 당했다면 공항이 어떤 상태일지 안 봐도 충분히 짐작됐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정부군이 다연장로켓을 파괴했지만 활주로 곳곳에 포탄 구덩이가 생겨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없게 됐어.
“언제 복구가 될지 장담하기도 어렵겠군요.”
-그렇지.
포탄 구덩이는 어떻게 메운다고 해도 단단하게 아스팔트를 새로 깔지 않으면 중대형 비행기들의 착륙이 불가능했다.
육로가 막히고 기뢰 때문에 항구가 봉쇄된 상황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공항까지 쓸 수 없다면 트리폴리는 완전히 고립되는 거였다.
ADDI 수뇌부도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공항을 공격한 것이 틀림없었다.
-뭐, 정부군한테는 불행한 일이지만 덕분에 공기부양정을 가진 자네의 몸값이 한껏 올라가게 됐으니 나쁠 게 없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건 혁권한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눈에 이채를 띠며 위성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미 운송하기로 한 화물이 있어서 당분간은 일을 맡기 어렵습니다.”
슬쩍 한번 튕기자 압둘라흐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일주일 안에 화물을 가져다준다면 계약금으로 150만 달러 일을 끝내고 그만큼을 더 얹어 주지.
“300만 달러라…… 화물은 얼마나 됩니까?”
-컨테이너 20개 물량이네. 지금 그리스 파트레Patrai에 있으니까 사흘 안에 발레타로 가져갈 수 있네.
“흐음. 그 정도면 최소한 두 번에 나눠서 운송해야 되겠군요.”
-그렇지.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하도록 하죠.”
-고맙네. 돈은 바로 스위스 계좌로 보내 주도록 하지.
“그래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얼마간 더 통화를 하다가 끝낸 혁권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엉덩이를 일으켰다.
“자말.”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름을 부르자 자말이 금방 그 소리를 듣고 다가 왔다.
“필요하신 것이라도……?”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난 덕인지 항상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나랑 잠시 얘기 좀 하지.”
혁권의 말에 자말은 ‘그럼 이쪽으로…….’ 하면서 비어 있는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방 한쪽에 서서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자 금방 불 켜진 라이터가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진 자말의 행동에 혁권은 자기도 모르게 낮게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인 혁권은 이내 하얀 연기를 내뱉으면서 본론을 꺼냈다.
“방금 전에 압둘라흐만한테서 전화가 왔어.”
“무슨 일로……?”
“정부군이 쓸 군수품을 가져다 달라는군.”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말은 미간을 좁혔다.
“잘못 나섰다가 자칫 보스께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걸 아시면서 왜 제안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자말의 시선을 혁권은 담담히 받아 넘기면서 이야기를 했다.
“압둘라흐만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수송 루트를 확보하고 있다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데다 솔직히 트리폴리 암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압둘라흐만이 작정하고 훼방을 놓는다면 사업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이번 싸움에서 정부군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
“예?”
“솔직히 지금 리비아 정부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하지만 최선이 없다면 차악을 선택한다는 말도 있잖아? 최소한 과격 무장 단체인 ADDI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혁권의 말을 들은 자말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들을 착취하고 자기 잇속을 챙기는 건 양쪽 다 똑같았다.
그러나 적당한 선을 지키고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해 주는 리비아 정부와 달리 ADDI는 수입의 7할 이상을 세금으로 거둬 가면서 주민들을 마구 탄압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미 결심을 굳히신 것 같군요.”
혁권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저도 보스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화물 운송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 줬으면 좋겠어.”
“예.”
맡긴다는 뜻으로 어깨를 두드려 준 혁권은 자말을 뒤로하고 집 밖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발밑에 부드럽게 밟히는 잔디의 감촉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니 서울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밤하늘이 펼쳐졌다.
풀 냄새가 섞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어디선가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절반가량 태운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 그것이 흩어지는 모양을 보면서 혁권은 어지럽게 생각이 얽히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며칠 뒤.
혁권은 정부군에 넘길 군수품을 가득 싣고 트리폴리로 향하는 포세이돈 함에 올라타고 있었다.
얼마 전과는 달리 그의 머리 위에 펼쳐진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으며, 귀를 울리는 것 또한 정취 가득한 벌레 우는 소리 대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거친 엔진 소리였다.
하얀 린넨 셔츠 하나만을 걸치고 함교 난간에 나와 있는 혁권은 가는 눈을 뜬 상태로 일렁이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낮에는 푸른 보석처럼 반짝이지만, 밤이 되면 바다는 사람 하나쯤은 통째로 삼켜 버려도 모를 검은 심연으로 그 모습을 바꾼다.
저 깊은 바닥 너머에 얼마만큼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리라.
밤이 되니 괜히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며 스스로를 자조할 만큼 쓸데없는 상념을 떠올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계셨습니까?”
그 목소리는 케노스 선장이었다.
혁권은 그가 다가와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설 때까지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냥 뱃머리에 다가왔다 부서지며 흩어지는 하얀 포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정말 짜릿하지 않습니까. 탁 트인 넓은 바다를 거칠 것 없이 파도를 가르면서 달려 나갈 때는 마치 F1카를 몰고 경기장을 질주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바로 이 맛에 제가 이놈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지요.”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몸을 옆으로 돌린 케노스 함장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렇게 다시 포세이돈 함을 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일을 잘 수행해 주고 있으니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이쪽이지.”
자신을 향한 감사의 말마저 상대방의 공으로 돌리는 혁권의 모습에 케노스 함장은 살짝 감격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줘.”
“예. 맡겨만 주십시오.”
대답하는 케노스 함장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때 함교에서 갑판장이 나와 다가왔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케노스 함장은 굵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속력을 반으로 줄이고 만약을 대비해 총원 전투배치를 시켜.”
“옛.”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인 갑판장은 바로 함교로 돌아갔다.
“함께 들어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