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44
744
선교船橋를 내려간 혁권은 임시로 놓인 철제 다리를 통해 출렁거리는 바다를 건너 반대편 화물선으로 넘어갔다.
배에 발을 들여놓자 희미하게 켜진 조명을 받으며 박희도 대좌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하하하. 며칠밖에 안 됐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아주 반갑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악수를 나눈 박희도 대좌는 그를 보며 말했다.
“더 회포를 풀고 싶지만 괜히 날파리들이 꼬여들기 전에 일을 끝내야 되니 화물부터 확인하시죠.”
“좋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박희도 대좌가 혁권을 어두운 갑판 안쪽으로 안내했다.
갑판 여기저기 AK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면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선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짧게 자른 머리와 풍기는 분위기에서 단번에 위장한 북한 군인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갑판 한가운데 커다란 컨테이너 네다섯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화물이 바깥에서 알아볼 수 없도록 회색 위장막에 덮인 채 실려 있었다.
“벗겨 내라우!”
박희도 대좌 옆에 있던 한광성이 거친 북한 말투로 지시를 내리자 선원들이 매듭을 풀고 위장막을 걷어냈다.
그러자 마양도 지하 부두에서 봤던 연어급 소형 잠수함이 구름 사이를 뚫고 잠시 비친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여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잠수함을 살펴보고 있는 혁권에게 시선을 주면서 박희도 대좌가 말했다.
“이제 거래를 시작해 볼까요?”
“그럽시다.”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가 손짓을 하자 하킴이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러 라미와 교신을 했다.
잠깐 기다리자 라미가 다른 부하들과 함께 짙은 색 더블백 네 개를 가지고 북한 측 화물선으로 건너왔다.
얼마나 무거운지 더블백 하나를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양쪽에서 들어야 될 정도였다.
발치에 더블백을 내려놓고 부하들이 뒤로 물러서자 눈을 반짝이고 있는 박희도 대좌를 보며 입을 뗐다.
“액수가 맞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박희도 대좌가 눈짓을 하자 한광성이 앞으로 나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지퍼를 내리고 더블백을 좌우로 벌렸다.
그러자 더블백 안에 한가득 들어 있는 유로화 고액권 뭉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금 사용을 추적하기 어렵도록 일부러 사용한 흔적들이 역력한 지폐들로만 가져왔다.
하지만 이미 북한에 지급할 지폐의 일련번호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국정원과 CIA가 파악하고 있었기에 돈을 사용한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액수가 많은 데다 진짜 지폐가 맞는지도 살펴봐야 했기에 돈 가방 4개를 전부 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액수가 맞습니다.”
확인이 끝났는지 한광성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제 화물을 옮겨 가도 되겠지요?”
“물론 그러셔야지요.”
혁권의 물음에 박희도 대좌가 어두워서 그런지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흰 이를 드러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작업을 시작해!”
박희도 대좌가 지시를 내리자 북한 측 선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연어급 소형 잠수함을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쪽 배에 탑재되어 있는 크레인에서 내린 두꺼운 철제 와이어를 앞뒤로 단단히 결박시켰다.
“이쪽이 느슨하잖아.”
“거기 더 당겨! 그렇지.”
어두운 그믐달인 데다 바다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다행히 파도가 그리 높게 치지 않아 별다른 사고 없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치직.
“들어 올려!”
갑판장이 휴대용 무전기를 입에 붙이고 말하자 요란한 기계음을 내면서 크레인이 철제와이어를 감아 올렸다.
100톤에 육박하는 무게였지만 양쪽 화물선에 탑재된 크레인 두 대가 힘을 합치자 연어급 소형 잠수함이 서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
자칫 균형이 흐트러지면 크레인과 함께 잠수함이 바닥에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바짝 긴장한 채 작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자정쯤에 시작된 작업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화물이 뭔지 숨기기 위해 커다란 위장막으로 선원들이 잠수함 선체를 가리는 걸 보며 혁권이 입을 열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김 선생과는 앞으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 가고 싶군요.”
“하하, 언제든 기회만 있다면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점차 밝아지는 주변을 의식하며 혁권은 상대와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눴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럽시다.”
박희도 대좌의 부하들이 현금이 가득 들어 있는 더블백을 챙기는 걸 보며 혁권은 몸을 돌려 자신이 타고 온 화물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두 배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풀리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엔진을 켜고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 완전히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민 일출을 옆에 두고 멀어져 가는 북한 화물선을 갑판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샌더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끝났소?
혁권은 하늘을 힐끔 쳐다보고 셔츠 포켓에 꽂아 두었던 선글라스를 빼서 썼다.
“다 보고 있으면 뭘 묻는 거요?”
어두운 밤인 데다 러시아 영해 안이었지만 CIA라면 인공위성을 비롯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첩보 자산을 동원해서 얼마든지 거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후후후. 조금 있으면 러시아 연안 감시선이 출항할 테니 가능한 한 빨리 공해公海로 나가는 것이 좋을 거요.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몰래 모든 걸 다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 됐건 안전하게 화물을 가지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CIA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혁권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소?”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니오?
“그쪽이 그렇겠지. 그리고 화물을 무사히 가져가는 것이 CIA한테도 이득이잖소.”
아예 대놓고 정보를 요구하는 혁권의 태도에 샌더슨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위험이 있으면 바로 알려 주도록 하겠소.
“알겠소.”
-그럼 제주도에서 만납시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이제 상당히 멀어진 북한 화물선을 한번 바라보고는 부하들과 함께 함교로 올라갔다.
공해로 나온 화물선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태평양 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방향을 틀어 홋카이도를 지나 일본 열도를 쭉 따라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규슈를 돌아 나와서 나흘간의 항해 끝에 최종적으로 제주도에 위치한 해군기지에 도착했다.
야심한 밤 연어급 소형 잠수함을 실은 화물선은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제주 해군기지 방파제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10만 톤이 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도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접안시설을 가지고 있었기에 입항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변은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고 선착장 주변은 미리 국정원에서 해군의 도움을 받아 주위를 통제한 덕분에 인적이 거의 없었다.
길게 쭉 뻗어 있는 선착장에 화물선이 멈추어 선 뒤 굵은 밧줄을 앞뒤로 묶어 계류를 시키자 철제 계단이 아래로 내려졌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샌더슨과 심인성이 나란히 화물선으로 올라왔다.
앞으로 다가온 샌더슨은 선원들이 위장막을 벗겨내 존재감을 드러낸 연어급 소형 잠수함을 쳐다보면서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이게 그 연어급이군.”
그동안 존재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샌더슨의 눈빛이 반짝였다.
심인성 역시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국가를 위해서 큰일을 해낸 거요.”
하지만 혁권은 별다른 감응이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맡은 일은 다 끝냈으니 이제부터는 그쪽에서 알아서 하시오.”
“물론이오. 김 사장한테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시오.”
더 이상 깊이 연관되는 것이 싫었던 혁권은 바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나중에 봅시다.”
먼저 손을 내민 심인성과 악수를 하자 환하게 켜진 조명 불빛을 받으며 선 샌더슨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멋지게 일을 처리했소, 미스터 존슨.”
그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가볍게 한쪽 손을 내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화물선에서 내렸다.
대기 중이던 승용차에 올라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자 앞에 앉은 하킴이 뒤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샹그릴라 리조트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해.”
잠시 뒤 연어급 소형 잠수함을 하역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는 선착장을 뒤로하고 혁권과 부하들이 탄 승용차 행렬은 조용히 해군기지를 빠져나갔다.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니 결국 이른 아침부터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쏴아아아.
넓은 통유리를 두드리는 굵은 빗소리를 들으며 러닝머신 위를 뛰던 혁권은 스톱 버튼을 누르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 후우.”
“보스.”
옆에서 대기하던 하킴이 준비해 둔 수건과 이온음료를 건넸다.
그래, 하면서 이온음료를 꿀꺽꿀꺽 삼킨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주위를 지키고 서 있는 부하들에게 위로 올라가자는 말을 했다.
리조트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는 운동 기구뿐만이 아니라 안의 공용 샤워장에서도 사우나와 마사지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반 숙박객이라면 모를까 혁권이 그 시설을 이용할 일은 없었다.
부하들과 함께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에 도착한 혁권은 바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혁권이 소파에 앉자 곧장 트레이에 실린 브런치가 앞에 놓였다.
메뉴는 그가 주문한 대로 진하게 탄 커피와 달콤한 버터 냄새를 풍기는 프렌치토스트, 그리고 후식을 겸해서 딸기와 라즈베리가 곁들여진 것이었다.
일단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프렌치토스트를 조금 잘라 입 안에 넣자 겉은 바삭한데 속은 우유에 적신 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했다.
“으음.”
혁권은 특급 호텔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룸서비스 수준에 만족하면서 천천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거의 끝냈을 때 백성균이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입을 열었다.
“보스, 샌더슨과 심인성이 이리로 올라온다고 로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그는 손에 든 커피잔을 내려놨다.
“불청객이 왔군.”
“어떻게 할까요?”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귀찮더라도 만나야지 어쩌겠어. 다 먹었으니까 이거 치우라고 해.”
“예.”
백성균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부하가 얼른 다가와 탁자에 놓인 음식을 트레이에 옮겨 안 보이는 곳으로 가져갔다.
얼마 안 있어 객실 벨소리가 울리더니 샌더슨과 심인성이 각자 수행원 한 명씩을 데리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번 거래는 어젯밤에 다 끝난 걸로 아는데, 또 뭐 남은 것이 있는 거요?”
혁권의 시선을 받은 샌더슨이 넉살 좋게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는 좋은 일로 왔으니까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없소.”
“······.”
샌더슨의 말에 어쩐지 그는 더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