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71
771
아기오스 토마스섬에 새로 지은 저택 발코니에 앉아 혁권이 향긋한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확 트인 바다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탁자에 올려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스텐저 변호사의 이름이 뜬 걸 본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이거 바쁘신데 연락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나도 쉬고 있었소.”
-그러시군요. 다름이 아니라 흥미로워하실 만한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같은 그룹 계열사인 태일증권에서 대주주 자격으로 오늘 태일건설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는데, 안건이 경영 부실의 책임을 지고 현 경영진을 해임시키는 거라고 합니다.
“······!”
아직 그룹 경영권을 완전히 차지한 건 아니었기에 곧 두 형제간의 2차전이 있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기에 혁권은 놀란 얼굴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놨다.
“태일증권이 김 부회장의 손에 들어갔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김성균 사장이 가진 우호 지분이 만만치가 않은데, 설마 그사이에 과반수가 넘는 주식을 확보하기라도 했다는 거요?”
-숨겨진 지분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파악하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임시주주총회에서 현 경영진을 해임시키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김성균 사장을 압박하는 동시에 최근 태일건설이 부진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는 의도인 걸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태일건설을 공격하기 전에 김성균 사장의 지배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짝 간을 보려 한다, 이거요?”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회사 상황이 안 좋기 때문에 김성균 사장 측이 받을 타격이 꽤 클 겁니다. 무엇보다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시장과 투자자들 사이에 퍼진다면 그룹 총수 자리는 더욱 멀어지겠지요.
그룹 내에 기반을 단단히 다질 시간을 벌고 동시에 경쟁자인 김성균 사장의 평판에 흠집을 낼 수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치밀하게 판을 짜서 상대를 압박하다니, 정말 예전에 성급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욕심만 많던 모습을 이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확 변해 있었다.
이럴수록 혁권은 더욱 자신한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김인철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한 그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텐저 씨가 보기에 태일그룹 총수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 것 같소?”
-글쎄요. 상황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거라 확언을 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써는 김 부회장이 상당히 유리하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년후견인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으나 그가 봐도 김인철 쪽으로 저울추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김성균 사장도 마지막까지 그룹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계속 코너에 몰린다면 차선책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뭐요?”
-태일건설과 영향력이 미치는 몇몇 회사들을 계열 분리해 그룹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겁니다.
이마를 찡그린 혁권은 스텐저 변호사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직 성년후견인 재판에서 이기면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남아 있는 데다 무엇보다 그룹 경영권에 대한 집착이 큰데 계열 분리를 선택하겠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임시주주총회 이후에 지금 있는 자리마저 위험하다고 느낀다면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가지고 있는 걸 지킨 다음에 그룹 경영권은 성년후견인 재판 결과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다시 승부를 보는 것이 김성균 사장 입장에서는 훨씬 유리할 겁니다.
“흐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에 그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응을 해야 될지 고심하던 혁권은 문득 드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기는 한데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왜 해 주는 것이오?”
-존슨 씨는 저희 회사 고객분들 가운데서도 VVIP 아니십니까. 그러니 관심 두시는 일을 제가 챙겨 드리는 건 당연하지요. 일종의 서비스이니 편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굳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으니 스텐저 변호사가 보충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 정보를 잘만 활용하면 유용한 사업 기회가 될 것 같아서요. 혹시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기회라······ 어떤 식으로 말이오?”
살짝 흥미가 생긴 혁권이 그렇게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반색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오로라 펀드가 보유하고 있는 태일그룹 지분 가운데 태일건설 주식이 있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이오.”
오로라 펀드는 자신을 감추고 그동안 이런저런 방법으로 끌어모은 태일그룹 지분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기 위해서 조세회피 지역인 버진 아일랜드에 만든 개인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였다.
혁권이 하나하나 관리하기 어려웠기에 스텐저 변호사가 몸담고 있는 L&S코퍼레이션에 운용을 위탁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태일건설 주식 4%를 잘만 활용한다면 두 형제의 싸움에서 결과를 좌지우지할 결정적인 캐스팅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하며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듣고 보니 괜찮은 의견에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4%뿐인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거요?”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대주주는 존슨 씨 하나뿐인 상황입니다. 만약 김 부회장의 손을 들어 준다면 열세를 단번에 뒤집고 이번 임시주주총회에서 단순히 압박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확실한 방패막이가 될 겁니다.
“태일건설의 주인이 누가 될지 결정할 칼자루를 내가 쥐고 있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아주 솔깃한 이야기에 혁권은 테이블을 가볍게 손끝으로 탁탁 치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딱히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에게 아주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진 걸 깨달고는 눈동자를 번득였다.
위험 요소인 김인철이 태일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걸 막으면서도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 혁권은 결정을 내리고는 다시 입을 뗐다.
“오로라 펀드에 현재 여유 자금이 얼마나 남아 있소?”
자금 상황을 확인하는 듯 잠깐 컴퓨터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스텐저 변호사가 대답했다.
-1,500만 달러 정도가 있습니다.
한화로 170억 원 가까이 되는 돈이니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손을 대도록 합시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필요한 만큼 자금을 송금해 줄 테니까 보유 지분을 5%까지 늘리시오. 그럼 확실하게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지 않겠소?”
그러자 스탠저 변호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지요.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고개를 돌려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면서 경영권을 지켜 주는 대가로 김성균 사장한테 뭘 받아 낼지 생각했다.
새롭게 태일증권 사장이 된 조병득의 취임식에 참석한 김인철은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과시하고는 주요 임원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룹을 지탱하는 핵심 계열사 중 한 곳을 자신의 손에 집어넣어서인지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승용차가 큰길에 접어들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차민성 과장이 몸을 뒤로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건설에서 성남 아파트 부지를 담보로 900억 원을 추가 대출받았다고 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대국은행에서 빨리 대출 승인을 줬나 보군.”
“신용 대출로 나간 차입금 일부를 변제하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변제 액수가 얼만데?”
“300억 원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김인철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그럼 담보를 주고 받은 돈의 삼분의 일을 신용 대출 상환에 썼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어쩐지 대국 은행에서 대출 승인을 빨리해 줬다고 했더니 이런 꼼수가 숨어 있었군.”
전체적으로 총액은 늘어났지만 리스크Risk가 큰 신용 대출은 줄이고 알짜배기 자산인 성남 아파트 부지를 담보로 잡았으니, 은행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큰형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협력 업체들이 일손을 놓으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기간이 길어지자 용산드림타워 프로젝트에 PF대출을 해 준 금융기관들의 압박이 꽤 컸던 것 같습니다.”
“하루만 공사가 지체돼도 손실액이 수십억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곧 열릴 임시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걸 무마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한몫했겠지. 그래 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겠지만 말이야.”
공정률이 이제 겨우 40%를 넘은 상태에서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수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계속 들어가야 했기에 특단의 조치가 있지 않는 한 태일건설의 재정난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큰형인 김성균 사장을 밀어낼 명분이 커지는 거니까 김인철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몸을 편하게 뒤로 기댄 김인철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정리해 줘야 될 공사 대금이 1천억 가까이 된다고 했지?”
“예.”
“그나마 대출을 받은 돈도 미수금을 정리하고 나면 다 써 버리겠군.”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추가로 보유 중인 자산을 매각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봤자 경기가 안 좋아 처분이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팔린다고 해도 이미 대부분의 자산이 금융권에 담보로 잡혀 있어서 빚을 갚고 나면 손에 쥐는 건 얼마 되지 않을 것이 뻔하지.”
김인철이 하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자 승용차 안에 설치된 공기청정기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봐.”
“오로라 펀드라고 기억나십니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에 살짝 이마를 찡그리던 김인철은 오래지 않아 기억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그룹 계열사 지분을 상당수 가지고 있는 외국계 헤지펀드를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적대적 M&A를 비롯한 기타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서 그룹 계열사들의 지분 변동을 수시로 살피고 있었기에, 오로라 펀드의 존재 역시 오래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경영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주주였기에 그룹 차원에서 몇 번 접촉을 시도했지만, 상대가 만남을 거부하고 딱히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에 일단 예의 주시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자들이 왜?”
“오후 장이 열린 이후로 태일건설 주식이 갑자기 하락을 멈춰 이유를 알아봤는데, 오로라 펀드에서 지분을 대거 매입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매수를 했기에 그러는 거야?”
“확인된 것만 150억 원이 넘습니다.”
액수를 들은 김인철은 대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김인철과 김성균 사장이 서로 주식을 매입했지만 계속되는 악재에 태일건설 주식은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최저가를 기록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만한 액수라면 상당한 지분을 매수할 수 있었다.
“오로라 펀드가 원래 가지고 있던 태일건설 지분이 얼마나 되지?”
“4%가 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매수를 계속한다면 5%를 넘길 수도 있겠군.”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보유 지분이 5%가 넘어가면 경영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김인철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갑자기 지분을 매수하는 의도가 뭐야?”
“그건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 최우선으로 알아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진 김인철은 반쯤 피운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그러고는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오로라 펀드가 지분을 늘린 목적이 무엇인지 고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