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72
772
나흘간 650억 원이 넘는 거액을 쓰면서 주식을 쓸어 담은 오로라 펀드는 목표한 대로 태일건설 지분의 5%를 확보하자 바로 매수를 멈췄다.
그러고는 바로 5% 룰에 따라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에 주식 보유 상황과 목적을 신고하면서 경영 참여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태일건설이 발칵 뒤집히는 건 당연했고, 김인철 역시 오로라 펀드의 행보를 크게 경계하면서 접촉을 시도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혁권은 구름 위를 나는 비즈니스 제트기 안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널찍한 테이블엔 서류들이 잔뜩 흩어져 있고 반쯤 식은 커피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었다.
혁권이 또 다른 보고서를 꺼내 들며 읽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하킴이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보스, 스텐저 변호사가 보낸 메일을 출력해 왔습니다.”
“아, 고마워.”
혁권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하킴이 가져온 서류철을 펼쳤다.
서류에는 태일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들이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감정 평가액까지 아주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급 순위 5위 안에 들어가는 메이저 1군 건설사답게 열 장이 넘는 서류를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산이 금융권에 담보로 잡혀 있었는데, 심각한 건 담보 비율이 평가액의 100%에 육박하는 것들이 상당수라는 거였다.
여유없이 대출을 되는대로 한도까지 다 받았다는 뜻이었다.
이것만 봐도 태일건설의 자금 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내용을 다 확인한 혁권은 서류를 손에 든 채 등을 뒤로 기대면서 짧게 혀를 찼다.
“쯧. 아무리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 때문에 그룹 내부가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군.”
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한심스러웠으나 김인철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이대로 김성균 사장이 무너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자산이 없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테이블에 올려 둔 위성 전화기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비행 중이라 그런지 잡음이 약간 섞인 채 스텐저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내 드린 메일은 확인하셨습니까?
혁권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막 다 읽은 참이었소.”
-어떻습니까?
“솔직히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고민이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스텐저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추천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크게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혁권이 대답했다.
-태일건설이 서울시 랜드마크로 짓고 있는 용산드림타워는 어떻습니까?
“······!”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좌석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저쪽에서 그걸 팔려고 하겠소? 거기다가 아직 완공도 안 된 건물이지 않소?”
-그러니까 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태일그룹 총수 자리는 물론이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건설사까지 김 부회장한테 빼앗길 상황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흐음.”
-물론 통째로 다 넘기라고 하면 절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공사 대금 문제로 며칠간 현장이 멈춰 설 정도로 자금 압박이 심한 만큼 지분의 일부를 매입하는 건 가능할 겁니다. 그것도 아주 헐값으로 말입니다.
“공사 규모를 생각할 때 유의미한 수준의 지분을 가지려면 적어도 수천억 원이 들어갈 텐데, 그만한 액수를 투자할 가치가 있겠소?”
-완공 이후에 공실률을 얼마나 낮추느냐가 관건이겠지만, 최상의 입지 조건과 상징성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봅니다. 등락이 있기는 해도 지금까지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생각하면 몇 년 안에 상당한 차익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거액의 자금이 한곳에 묶이는 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의 숙원 사업이자 태일그룹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일부라도 자신이 가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김인철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결정을 내린 그는 손에 든 위성 전화기를 고쳐쥐면서 말했다.
“최소한 지분 10% 이상을 가지려면 얼마나 필요할 것 같소?”
그 정도는 되어야지 의미가 있지 이것보다 낮다면 굳이 거액을 투자해서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협상을 해 봐야 되겠지만 5억 달러 정도면 될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기로 공사비만 10조 원에 달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그것만 가지고 되겠소?”
미심쩍어하는 혁권과 달리 스텐저 변호사는 자신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정상적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태일건설이 심각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형제간에 치열한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가 가진 태일건설 지분은 아주 좋은 협상 카드가 될 겁니다.
수긍하는 얼굴로 작게 머리를 끄덕인 그는 잠시 고심하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일을 맡길 테니 최대한 지분을 많이 가져올 수 있도록 협상을 해 보시오.”
-곧 좋은 소식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소.”
통화를 끝낸 혁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둥근 방풍창 너머로 하얀 구름들이 카펫처럼 아래에 깔려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음 날 오후, 구민재 재무이사가 급히 사장실로 김성균을 찾아왔다.
“또 무슨 일이야?”
계속되는 악재와 임시주주총회 소집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던 김성균 사장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구민재 재무이사를 봤다.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뭔지 말해 봐.”
“오로라 펀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성균 사장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접촉이 전혀 안 된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의심스러웠습니다만 확인 결과 오로라 펀드 쪽 관계자가 확실한 걸로 파악됐습니다.”
최근 급격하게 지분을 늘리는 모습에 경계심을 가지고 주시하던 상대였기에 김성균 사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정말 거래소에 공시한 대로 경영에 참여할 거라고 하던가?”
다그치듯 묻자 기세에 눌린 구민재 재무이사는 앞에 있는 김성균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대주주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말만 하고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자고 했습니다.”
김성균 사장이 언짢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결국 단순 투자는 아니라는 뜻이군.”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맞을 겁니다.”
“쯧.”
인상을 찡그린 채 짧게 혀를 찬 김성균 사장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오로라 펀드가 확보한 지분이 정확하게 얼마나 된다고 했지?”
“5.1%가 조금 넘습니다.”
“계속 주식을 매집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공시를 내고 난 이후로는 매수 주문을 전혀 안 내고 있습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처음부터 딱 그 정도만 매집할 계획이었을 수도 있겠군.”
그러자 구민재 재무이사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독자적으로 경영권을 위협하지는 못하겠지만 오로라 펀드가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임시주주총회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제길.”
동생인 김인철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또 다른 변수의 등장에 그는 표정을 구긴 채 욕설을 내뱉었다.
무리수를 둬 가면서 자사주를 대량 매입해 겨우 지분을 늘려 놨는데, 그게 몽땅 헛일이 될 수도 있었으니 짜증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입술을 질근 깨문 김성균 사장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자네가 직접 오로라 펀드 관계자를 만날 건가?”
“그럴 예정입니다.”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들어주고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김성균 사장은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듯이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헤지펀드까지 끼어들어 자신을 뜯어 먹으려고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지만 지금은 참아야 될 때였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동생을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룹 경영권을 되찾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 날 이 모든 치욕을 몇 배로 되갚아 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아침이 되어서 잠을 깬 혁권은 자연스럽게 침대 옆자리에 손을 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소현의 날씬한 허리를 부여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긴 후 조금 더 잠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차갑게 식은 빈자리만 있는 것을 느끼곤 그제야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깔끔한 흰색 벽지와 베이지 톤 가구, 화장대에 조그맣게 장식되어 있는 향수병과 작은 꽃까지 차례대로 둘러본 혁권은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실내화를 신고 침실을 나왔다.
“뭐 하고 있어?”
혁권이 가스렌지 앞에 서 있는 소현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 일어났어요.”
“응.”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이 작게 웃으며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혁권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거울이라도 한번 보고 나오지.”
“그렇게 못 봐 줄 꼴이야?”
“내 눈에는 여전히 잘생겼으니까 용서해 줄게요.”
그러면서 돌아서는 그녀를 혁권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일단 잠이 깨고 나자 식욕을 돋우는 냄새에 벌써부터 침이 고일 정도였다.
“모처럼 실력 발휘 좀 하고 있죠. 다른 건 몰라도 김치찌개는 잘 끓인다고요.”
“그냥 간단하게 커피랑 샌드위치 정도면 돼.”
다음부턴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고생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지만 소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요. 아침엔 든든하게 밥을 먹어야죠.”
소현은 모델이라는 직업상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적었지만, 혁권에겐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고 싶었다.
항상 자신에게 맞춰 주면서 신경 써 주는 만큼 가끔은 소현도 이 정도 보답은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부러 마트까지 가서 냉장고도 꽉 채워 왔다고요. 그러니까 얌전히 식탁에 앉아 있어요.”
안 그래도 배가 출출했던 혁권은 소현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 음식이 차려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좋아하는 대로 참치와 마늘을 듬뿍 넣어 맵싸한 향이 나는 김치찌개가 식탁에 올려지고, 따끈한 쌀밥에 계란말이, 양파와 함께 볶은 소세지 등 간단한 반찬까지 한데 놓이자 먹음직스러운 아침 식사가 완성되었다.
“음, 맛있어!”
제일 먼저 김치찌개를 맛본 혁권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빵보다는 역시 밥이 낫죠?”
소현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안 그래도 며칠 전까지 그리스에 있었다면서요. 슬슬 한식이 그리울 때가 됐다 싶었죠.”
후훗, 하고 소현이 뽐내듯 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은걸.”
“기분 내키면 종종 해 줄게요. 찌개 끓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정말? 기대할게.”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는 혁권을 보면서 소현도 나란히 식사를 했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운 그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 스케줄이 있다고 그랬지?”
“오후 촬영이니까 천천히 가도 돼요.”
“과천 스튜디오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