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93
793
#함정
최종적으로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지분 30%를 6억 달러에 인터네셔널 매니지먼트에 넘기고 완다 그룹은 매각 자금을 전부 미국 설립한 셰일 오일 개발 합작 법인인 아메리칸 에너지에 투자하기로 합의를 봤다.
이로써 아메리칸 에너지의 자본금은 무려 67억 달러나 됐다.
물론 7억 달러는 장부상에만 기록되는 허수였고 나머지도 대부분 세탁을 해서 비자금으로 빼돌려질 거였으나, 투자금 규모로 따지면 텍사스에서 진행 중인 셰일 오일 개발 프로젝트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컸다.
이런 가운데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북경으로 날아와서는 난데없이 완다 시네마하고 지분 매각 계약을 체결한 정동식 이사는 멍한 얼굴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넋이 나가 앉아있는 정동식 이사의 모습에 혁권이 툭하니 내뱉었다.
“어디 정신을 빼 놓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퍼뜩 고개를 든 정동식 이사는 얼떨떨하니 말했다.
“제 손에 계약서를 들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안 믿겨서 말입니다. 이게 진짜 꿈인지 생시인지 뺨이라도 꼬집어 봐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없기는.”
혁권은 룸서비스로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저번에 미리 말도 해 줬을 텐데, 뭘 이제 와서 그리 놀라워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설마 현실이 되어 눈앞에 떡하니 들이밀어질 줄은 몰랐지요. 그것도 지분이 30퍼센트나 되지 않습니까!”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정동식 이사에게 혁권이 물었다.
“그래, 이 정도면 회사에 도움이 될 것 같나?”
“물론입니다!”
부족하긴커녕 차고 넘친다는 표정으로 정동식 이사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장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의 국내 배급을 저희가 도맡기로 했으니 거기서 나오는 수익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걸로 상당히 폐쇄적인 영화판을 비집고 들어가 기반을 다질 수 있는 확실한 패를 가지게 됐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화 업계에서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가 중국 시장에 대한 독점 배급권을 가지고 있기에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히 동종 업체가 아니라 장사치 취급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급격하게 성장하며 영향력을 넓혀 나가는 것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지만, 주류가 아닌 원래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던 외부인이라는 것이 컸다.
그 때문에 중국 시장을 제외한 영화 쪽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인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를 등에 업는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손에 쥔 패를 어떻게 사용할 건지는 정 이사한테 맡길 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 정동식 이사는 계약서를 소중히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럼 전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혁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더 남았어.”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정동식 이사가 엉거주춤 그 자리에 서서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영문을 몰라하는 그에게 혁권이 차분히 말했다.
“외화 반출 제한에 걸려서 중국에 놔두고 있는 자금이 모두 얼마나 되나?”
다시 소파에 앉은 정동식 이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7천만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그사이 더 늘었군.”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가 대박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선방해서 극장 수입이 꽤 들어왔습니다. 아마 다음 주까지 가면 1천만 달러 정도는 더 들어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흥행이 잘돼서 회사 수입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식 이사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는데, 수익의 상당 부분을 중국 법규에 막혀 한국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쌓아 두고만 있어야 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화로 거의 800억 원가량 되는군.”
“그렇습니다.”
정동식 이사는 속이 쓰린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수익을 거둔 건데 중국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막다니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깝고 분통이 터졌지만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영화 배급사 전체에 적용되는 거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금을 가져가면 어디다 쓸 생각이야?”
“계획 중인 작품 제작에도 투자하고 여기저기 필요한 곳이야 많지요. 설마 쓸데가 없겠습니까.”
혁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예?”
“중국 정부에서 묶여 있는 수익금을 가져갈 수 있도록 승인을 해 주기로 했으니까 필요한 곳에 쓰라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정동식 이사는 이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극장 수입 배분율도 한시적이지만 중국 국내 제작 작품에 준하는 수준으로 올려 주기로 했으니까, 내일 신문출판광전국에 들어가서 장덕천 부장을 만나도록 해.”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기에 정동식 이사는 떡 벌린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혁권이 말한 대로 된다면 당장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중국 지부의 수익이 2배 이상 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허어. 아직 일이 남았다고 하신 것이 이겁니까?”
“맞아.”
엄청난 특혜를 받아 놓고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너무나도 태연한 혁권을 정동식 이사는 허탈한 얼굴로 쳐다봤다.
“언제 또 이런 특혜를 받아 내셨는지 정말 대표님의 능력은 가늠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편 수는 얼마 안 되지만 할리우드 영화도 배급할 수 있는 쿼터를 받았으니까 최대한 수익을 뽑아 보도록 해.”
정 이사의 실력을 발휘해 볼 때야, 하고 혁권이 말하자 그가 입을 딱 벌렸다.
“할리우드 영화까지 말입니까!”
그러다 이내 눈동자에 반짝이는 열의를 품고서 외쳤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아주 두 팔 걷고 나서서 중국에 있는 돈을 갈퀴로 긁어 보이겠습니다.”
한국 영화도 인기가 많았지만 할리우드 대작은 들어오는 관객 규모 자체가 달랐기에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쯤 하킴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슬쩍 몸을 숙여 말했다.
“보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슬슬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런, 벌써 그렇게 됐나.”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혁권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문출판광전국을 찾아갈 때 천민열 부국장과 장덕천 부장한테 적당히 감사 표시를 하는 걸 잊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동식 이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수행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통행이 많고 혼잡하기로 유명한 북경 도심답게 도로가 꽉 막힌 채 차량들이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을 했다.
이럴 줄 알고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나왔기에 혁권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차창 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난방을 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심해진 미세먼지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스마트폰 벨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
고개를 돌리자 통역 겸 비서로 동행한 주정화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진동으로 바꿔 놓는 걸 깜빡했어요.”
“괜찮으니까. 그냥 받아.”
“······금방 통화를 끝내겠습니다.”
혁권의 말에 주정화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핸드백에서 여전히 시끄러운 벨소리를 울리고 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응. 새언니, 왜 그래······ 우는 거야?”
편하게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화들짝 놀라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주정화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겨우 이었다.
“알았어. 내가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통화를 끝낸 주정화가 손으로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자 혁권이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흑. 감사합니다.”
“한국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탈북자인 주정화가 새언니라고 부를 사람은 오빠인 주성철하고 결혼한 서은하뿐이었기에 그리 짐작했다.
“그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그는 생각이 맞는 걸 알아차리고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 봐. 세 사람은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 준다고 약속했잖아.”
진심 어린 말에 주정화는 다시금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중국에서 온 연락을 받고 오빠가 오늘 아침에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선양으로 갔다고 해요.”
“선양을 혼자서 갔다고?”
“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의 얼굴이 쓰디쓴 한약을 삼킨 것처럼 찌푸려졌다.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인 주성철이었기에 여권과 의지만 있다면 어딜 가든 자신의 마음대로였다.
하지만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 3성에 속한 이 지역 최대 도시인 선양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많은 북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탈북을 했거나 외화벌이를 위해 공장에 파견을 나온 이들도 있었고, 인신매매를 당해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여성들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탈북자들을 체포하거나 현지 교포와 한국인 관광객 들을 상대로 공작 활동을 벌이는 북한 보위부 요원들도 대거 암약했다.
한마디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는데, 특히나 보위부의 납치 대상이 될 수 있는 탈북자들한테는 더욱 그랬다.
북한 엘리트 출신인 데다가 121 해커 부대 출신인 주성철은 신분이 들통 나면 납치는 물론이고 목숨을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위험을 각오하고 선양으로 갔다면 그래야 될 만큼 절박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거긴 왜 간 거야?”
“아버지를 찾으려고요.”
“······!”
뜻밖의 대답에 혁권은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부모님하고는 연락이 끊겼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평양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목이 메는지 주정화는 말을 멈췄다가 겨우 다시 이었다.
“어제 갑자기 브로커한테서 연락이 와서 아버지가 다른 가족들하고 함께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군.”
똑똑한 주성철이 왜 앞뒤 재지 않고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선양으로 떠났는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가족이 중국에 와 있다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혁권은 다행이라는 생각보단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브로커가 주 대리 연락처를 알고 있는 거지?”
“혹시 몰라서 중국에 있는 아버지 지인한테 오빠가 스마트폰 번호를 가르쳐 줬었는데 그걸 가지고 전화를 걸어온 것 같아요.”
“그렇군.”
의문점은 하나 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진 않았다.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화장이 지워져 눈물 자국이 선명한 주정화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주 대리한테 연락해서 내가 갈 때까지 브로커를 만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대표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그래.”
주정화는 깜짝 놀라면서도 혁권이 가 준다고 하니까 안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