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92
792
도망가듯 바로 끊어 버리는 것을 보니 지금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혁권은 가슴께가 묵직했던 것이 어느새 사라진 걸 깨닫고 와인 잔에 있는 술을 마시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깨끗한 비누향이 나는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으니 바로 잠이 밀려들어 왔다.
다음 날 오후 혁권은 북경으로 가는 비즈니스 제트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며칠 푹 쉬고 싶었지만 왕민린 완다 그룹 회장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합작 계약은 이미 체결된 상태였고 이번 만남은 사업의 진짜 목적인 비자금을 어떻게 중국 밖으로 옮겨 가고 분배할 건지 논의하기 위한 거였다.
“합작 광구 매입은 잘 진행되고 있나?”
혁권의 물음에 마주 보며 앉아 있던 김덕현 전무가 바로 대답했다.
“아직 주 정부하고 협상 중입니다.”
“금방 끝날 것 같더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갑자기 상대편에서 매각 가격을 20%나 올리는 바람에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던 곳이라 주 정부에서 광구를 빨리 매각하려 한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생짜를 부리는 거지?”
“최근 국제 유가가 정체기를 서서히 벗어나 상승세로 접어들면서 다시금 셰일 오일이 주목을 받자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광구를 팔려고 욕심을 부리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혁권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요구하는 액수가 얼마야?”
“3천만 달러입니다.”
자원 개발에 들어가는 투자비를 생각하면 그리 큰 액수가 아니었으나 문제는 매입을 하려는 광구에 묻혀 있는 것이 채굴 원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타이트 오일Tight oil이라는 거였다.
타이트 오일은 셰일 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퇴적암 층에서 뽑아내는 경질유로, 수평 시추와 수압 파쇄 방식을 사용해서 시추하는 건 셰일 오일하고 똑같았지만, 원가는 훨씬 더 비쌌다.
그것 때문에 몇 년 전 한참 셰일 오일 광풍이 불어닥칠 때도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지금까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거였다.
“현지에 협상팀이 계속 머물고 있지.”
“예.”
“주 정부에서 원하는 액수대로 계약을 체결하라고 해.”
“그럼 저희가 너무 손해를 봅니다.”
“어차피 거기서 제대로 개발을 진행할 생각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합작 법인으로 투자금을 가져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거야.”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 합작 사업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던 김덕현 전무는 이내 수긍하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한쪽에 놓여 있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혁권이 말을 이었다.
“합작 광구에 매장되어 있는 타이트 오일의 생산 원가가 얼마쯤 된다고 그랬지?”
“정확한 건 실제로 시추를 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대략 72달러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78달러라······.”
뒤로 몸을 기댄 채 예상 생산 원가를 작게 읊조리던 혁권은 이내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내뱉었다.
“유가가 미친 듯이 폭등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원유를 뽑아 올려 이득을 보긴 어렵겠군.”
생산 원가를 감안하면 적어도 국제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선을 넘어야지 흑자를 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유가가 오름세라고 해도 이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는 합작 광구에 대한 기대감을 깨끗이 버렸다.
북경에 도착한 혁권은 예약해 둔 호텔에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천안문天安門 근처에 위치한 완다그룹 본사를 방문했다.
세 동으로 지어진 본사 건물은 나름 현대적인 감각을 살리려고 한 것 같았지만, 그가 보기에는 투박한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왕민린 회장의 지시가 있었는지 이번 합작 건을 맡은 임원이 직접 로비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맞이했다.
담당 임원은 부하 직원에게 김덕현 전무와 실무자들을 회의실로 데려가도록 하고는 자신은 혁권을 회장실로 안내했다.
왕민린 회장은 혁권이 통역을 맡은 주정화와 함께 회장실로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손을 내밀면서 반겼다.
“김 대표,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반갑습니다. 그새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마음에 있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으니 그래 보이는 모양이요. 다 김 대표 덕분이오.”
빈말이 아니라 얼마 전 상하이에서 만났을 때보다 확실히 혈색도 좋아지고 조금은 여유가 느껴졌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앉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여비서가 도자기로 만든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진품 홍인紅印이오.”
“호오. 그렇습니까.”
홍인은 중국 특산품으로 유명한 보이차 가운데서도 30년 이상 자연 발효를 해서 만든 골동 보이차로 한 꾸러미에 한화로 1억 원이 훌쩍 넘어가는 고가의 차茶였다.
“어쩐지 차향과 맛이 아주 진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군요.”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요. 한 꾸러미를 더 구해 놨으니 나중에 선물로 가져가시오.”
“잘 마시겠습니다.”
선물로 받기에는 상당히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중국에서도 손에 곱히는 갑부인 왕민린 회장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잠시 소소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푼 왕민린 회장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상은행(ICBC)과 농협은행에서 모두 61억 달러의 자원 개발 대출을 받기로 최종 승인이 떨어졌소.”
두 곳 다 중국 4대 금융기관에 들어가는 초대형 상업은행이었는데, 막대한 예금 보유고를 가지고 있지만 60억 달러가 넘는 거액을 한 은행이 전부 빌려주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절반씩 나눠 대출을 일으킨 거였다.
그렇게 위험부담을 나눴다고 해도 상당히 큰 액수였는데 특히나 공공 부분과 각 기업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부채에, 중국 중앙 정부가 대출 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있는 시점이었기에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대출 승인이 더 빨리 통과됐군요.”
왕민린 회장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백 부부장님이 힘을 써 준 덕분 아니겠소. 그렇지 않았다면 승인은 고사하고 대출 신청도 하기 어려웠을 거요.”
작년부터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각 금융기관들이 신규 대출을 거의 하지 않고 기존에 빌려준 자금도 회수하는 분위기였기에, 그냥 하는 공치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원래 말한 것보다 액수가 더 늘어났군요.”
“아. 그건 은행 관계자들한테 줄 수수료요. 대출액 일부를 떼어 주는 것이 관행이기는 하지만 1억 달러나 처먹다니 완전 도둑놈들이 따로 없다니까.”
“그렇군요.”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맨손으로 재벌 그룹을 일군 사람답게 왕민린 회장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 번에 걸쳐서 연말까지 대출금이 전부 나오면 그 즉시 합작 법인으로 투자금을 송금할 거요.”
“그때쯤이면 미국 현지에서도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테니 딱 적당한 것 같군요.”
왕민린 회장이 열심히 통역을 하고 있는 주정화를 힐끔 쳐다보곤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쪽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LGT은행에 개설한 비밀 계좌 번호요.”
유럽의 영세 중립국인 리히텐슈타인에 본사를 두고 있는 LGT은행은 프라이빗 뱅킹을 전문적으로 하는 금융기관으로 일반인들한테는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객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비밀로 지키는 걸로 명성이 높았다.
각국의 압박에 스위스가 그동안 고수해 오던 비밀주의를 일부 철회하면서 리히텐슈타인으로 많은 검은 자금이 옮겨지는 추세였다.
왕민린 회장 역시 나중에 중국 정부가 쉽사리 자신이 빼돌린 자금을 찾아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리히텐슈타인에 비밀 계좌를 만든 거였다.
당연히 여러 차례 세탁을 거친 돈이 입금되면 다시 왕민린 회장만 아는 계좌로 옮길 게 분명했다.
쪽지를 펼쳐서 확인한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접어 챙겨 넣었다.
“아마 첫 입금은 석 달 뒤나 되어야 될 겁니다.”
“조금 더 서둘러 일을 진행해 줄 수는 없겠소?”
조급해하는 모습에 혁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 법입니다. 나중에 뒤탈이 없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건 그런데······.”
“만약 중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미 투자금은 중국이 아닌 미국 땅으로 옮겨져 있을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러자 왕민린 회장이 입맛을 다시면서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마음이 급하다 보니 내가 무리한 이야기를 한 것 같소.”
“아닙니다.”
“투자금 처리는 김 대표한테 맡겼으니 알아서 잘해 줄 거라고 믿소.”
“염려하지 마십시오.”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아직 미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왕민린 회장은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 통화에서 김 대표 몫 가운데 일부를 현금 말고 다른 걸로 달라고 하지 않았소?”
“예.”
“정확히 뭘 원하는 거요?”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지분을 대신 받았으면 합니다.”
몸을 뒤로 기댄 왕민린 회장은 잠시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혁권을 봤다.
“지분은 몇 퍼센트나 생각하고 있소?”
그는 상대의 시선을 마주 쳐다보면서 미리 생각해 둔 걸 이야기했다.
“3억 달러에 지분 10%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10%라······.”
3년 전에 완다 그룹이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를 35억 달러에 인수했던 걸 감안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시 기준일 뿐 그동안 완다 그룹을 등에 업은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의 가치가 많이 올랐기에 조금은 무리한 요구였다.
그걸 알면서도 혁권이 10%를 달라고 한 건 중국 정부의 압박에 염증을 느낀 왕민린 회장이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그룹에서 완전히 손을 뗄 생각이라 회사에 별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지분을 정말 원한다면 6억 달러에 30%를 주겠소.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어떻소?”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오.”
뜻밖의 제안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혁권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정확한 건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해 봐야겠으나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제작사인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지분 30%를 6억 달러에 인수할 수 있다면 헐값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수 자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부담이 전혀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소.”
“그게 뭡니까?”
“지분 매각 대금을 합작사에 모두 투자할 테니까 함께 세탁을 해 줬으면 좋겠소.”
왕민린 회장의 의도를 알아차린 혁권은 더 이상 재지 않고 웃으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