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06
806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은 혁권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틀 사이에 비행기를 연달아 두 번이나 탄 데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설득한다고 신경까지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아무리 좋은 전세기를 가지고 있어도 정신적, 신체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마치 잔뜩 물을 먹은 솜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데, 하킴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스.”
“무슨 일이야?”
감고 있던 눈을 뜬 혁권은 상체를 바로 세웠다.
“L&S코퍼레이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돈은 잘 들어갔대?”
“네. 4억 달러 모두 입금됐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그는 스마트폰을 귀로 가져가면서 하킴에게 말했다.
“시원한 물 한 잔 가져다 줘.”
“예.”
하킴이 객실 한쪽에 있는 미니바에서 생수를 꺼내 유리잔에 따르는 걸 보며 그는 전화를 받았다.
“계약이 마무리됐나 보군.”
그러자 리야드에 남겨 둔 함단의 목소리가 송화구에서 들렸다.
-말씀하신 대로 정부 관리와 계약을 끝냈습니다.
“수고했어. 오더대로 물품을 마련해서 납품하도록 해.”
-미스터 성이 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태일물산 출신으로 이런 일을 많이 해 봤을 테니 안심하고 오더를 맡길 수 있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쪽에서 물품 대금을 전액 다 먼저 입금시켰습니다.
하킴이 내민 물 잔을 건네받으며 그는 미간을 좁혔다.
“3억 달러를 전부 받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무조건 일을 성사시키라는 빈 살만 왕세자의 압박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챈 혁권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쯧. 신경에 거슬리게 하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마진이 얼마쯤 나올 것 같다고 그랬지?”
-정확한 건 물품 견적을 받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미스터 성의 말로는 넉넉잡아 1억 달러 이상 남을 거라고 합니다.
상당한 마진 폭이었지만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설득해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대가였기에, 혁권은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면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입금된 물품 대금에서 1억 달러를 바로 빼내더라도 오더를 진행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겠군.”
-아마도 충분할 겁니다.
“잘됐군. 그럼 1억 달러를 L&S코퍼레이션에 만들어 둔 내 계좌로 송금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왕 들어온 돈이니 그냥 놀려 두기 보단 원유 선물 투자에 자금을 더 넣어서 수익을 최대한 뽑아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혁권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일어나 탁자에 놔두었던 물을 단번에 쭉 들이켰다.
“이제 눈 좀 붙여야겠군. 한숨 자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깨워.”
“예. 편히 쉬십시오.”
하킴의 인사를 들으며 혁권은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혁권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연락을 받고 오후 일찍 다시 혁명 수비대 사령부를 방문했다.
“어서 오게.”
소파에 앉아 사복을 입은 낯선 중년인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약간 굳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제가 좀 일찍 온 모양입니다.”
“아니야. 제때 왔으니 이리 와서 앉게.”
“예.”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자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그를 보며 말했다.
“소개하지. 이쪽은 첩보안보부를 맡고 있는 아르마크 국장이네.”
“······!”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혁권은 내심 숨을 크게 들이켰다.
첩보안보부는 국내외 정보 수집과 보안 그리고 체제 유지 임무를 맡고 있는 이란의 최고 정보기관이었다.
이런 곳의 수장이라면 솔레이마니 사령관 못지않은 권력 실세라는 뜻이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존슨이라고 합니다.”
“아르마크요. 그쪽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이 바닥에서 상당한 거물이시더구먼.”
혁권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상대가 먼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앞으로 나하고도 잘 지내 봅시다.”
“그러시죠.”
웃고는 있지만 탐색하듯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혁권은 역시나 상대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느꼈다.
“이번에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가져왔더군요.”
솔레이마니 사령관과 함께 있을 때부터 대충 상황을 짐작한 혁권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란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겁니다.”
아르마크 국장이 몸을 뒤로 기대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고,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눈을 반짝이던 혁권은 이어진 이야기에 얼굴을 다시 굳혔다.
“하지만 조건이 있소.”
“그게 뭡니까?”
“공해에 정박 중인 유조선에 실린 콘덴세이트Condensate를 전부 처분하도록 해 준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콘덴세이트는 천연가스를 처리하면 나오는 일종의 부산물로 석유화학제품을 만들어 내는 원료로 쓰였는데, 값이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하고 나프타가 많이 나와 여러 수입국들이 이란 산을 선호했다.
하지만 미국이 핵협정을 탈퇴하고 이란을 다시 압박하기 시작하자 세컨더리 보이콧을 적용받는 걸 우려한 각국이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바람에 현재는 판로가 막혀 버린 상황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약속한 돈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기회를 이용해 경제 제재 여파로 처치가 곤란해진 콘덴세이트 재고를 한꺼번에 처분하면서 부족한 달러를 벌어들일 속셈이었다.
상대의 의도를 읽은 그는 아르마크 국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처분할 물량이 얼마나 됩니까?”
“1천만 배럴이오.”
혁권은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VLCC급 대형 유조선 여덟 척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가 쉽사리 묵인해 주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쪽에서 원하는 걸 얻어 가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소.”
아르마크 국장은 허벅지에 가볍게 올린 손을 맞잡으며 혁권에게 말했다.
“존슨 씨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소?”
순간 울컥했으나 짜증 나는 미소를 띠고 있는 아르마크 국장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선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미국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겠지.”
아르마크 국장은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기브 앤 테이크. 협상의 기본 아니겠소.”
고개를 돌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쳐다보자 그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심을 하던 혁권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상대편에 요구 조건을 전달하도록 하지요.”
“1천만 배럴에서 단 한 방울도 더 줄일 수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시오.”
“······그러지요.”
워싱턴 DC.
백악관 1층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Oval office]에는 대통령을 포함한 네 명의 사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날씨와 달리 방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통령이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콘, 뭐라고 했더라?”
“콘덴세이트입니다.”
러셀 CIA 국장의 말에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거 1천만 배럴을 유통시키는 걸 묵인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쉽게 감이 안 잡혀서 그러는데, 콘덴세이트 1천만 배럴이면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 거지?”
“7억 달러 정도 됩니다.”
“그리 큰 액수는 아니군.”
그러자 한쪽에 있던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문제는 경제 제재를 실행을 목전에 두고 상대의 숨통을 틔워 줄 뿐만 아니라 이란을 가둔 제재 망에 틈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고작 7억 달러밖에 안 되는데 너무 많이 나가는 거 아냐.”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정색을 하며 대통령을 봤다.
“튼튼한 제방도 작은 구멍 하나에 무너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빈 살만 왕세자가 약속한 것도 있으니 이번 일로 이란 정부에 17억 달러가 넘는 돈이 흘러들어 가는 겁니다.”
“흐음.”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의 지적에 대통령도 팔짱을 낀 채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 정도면 확실히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 어려운 액수이기는 했다.
대통령이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왼편에 자리를 잡고 있던 제리 백악관 비서실장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뭘 우려하는지 알겠지만 지금 빨리 카리니 사건을 덮지 않으면 상황이 더 골치 아파질 거라는 걸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미국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할 거라는 이야기에 증시가 크게 빠졌지 않습니까. 야당과 언론의 주장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제재를 가한다면 중동 지역 최대 우방을 잃는 건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중동 지역에서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동맹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브랜스테드 국무장관도 쉽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자칫 연임에 실패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거론하자 대통령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군수 업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무기 수출 계약을 맺은 액수가 얼마라고 그랬지?”
“대략 1,100억 달러가량 됩니다.”
한화로 124조 원이 넘어가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이만한 계약이 파기되거나 수출이 중단된다면 제아무리 미국 군수 산업의 규모가 크다고 해도 관련 업체들이 휘청거릴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지난 선거 때 대통령에게 가장 많은 헌금을 낸 곳이 바로 군수 업체들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 정부가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경제 회복인데, 사우디아라비아가 투자한 자금이 빠져나가 주식이 폭락하고 중동 정세의 악화로 성장세가 둔화되거나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라도 한다면 연임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였다.
“지금은 의회와 언론이 제재를 주장하고 있지만 페르시아만이 봉쇄되고 이란하고 전쟁 위기가 고조된다면, 금방 상황이 바뀔 겁니다. 곧 있을 중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우리 쪽에 불리한 카리니 사건을 빨리 끊어 내고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됩니다.”
“여론 조사 결과가 별로 안 좋다고 했지?”
“네. 상원은 그럭저럭 다수를 유지할 것 같지만 하원이 문제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야당에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은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러셀 국장.”
“말씀하십시오.”
“이란이 요구한 걸 수용하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입맛이 썼지만 조기 레임덕에 빠지지 않고 연임을 성공하려면 이번 중간 선거를 꼭 이겨야 된다는 걸 브랜스테드 국무장관도 알았기에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