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07
807
다음 날 빈 살만 왕세자로부터 백악관의 결정을 전해 들은 혁권은 곧장 솔레이마니 사령관과 아르마크 국장을 다시 만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오?”
앞쪽 소파에 앉은 아르마크 국장의 말에 그는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란 정부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겠다고 합니다.”
“후후후. 미국이 입을 마구 놀려 대는 에르도안 때문에 똥줄이 타들어 가긴 한 모양이군.”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져서인지 솔레이마니 사령관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제쯤 움직여 주실 겁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더 해 줬으면 하는 것이 있소.”
또 다른 요구사항에 혁권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나 두 사람 앞에서 그런 속내를 곧이곧대로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혁권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말해 보라는 것처럼 상대를 쳐다보았다.
“이왕 손을 댄 김에 존슨 씨가 콘덴세이트 처리까지 해 줬으면 좋겠소.”
“······!”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그는 순간 멈칫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물량이 엄청나 처분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만큼 이윤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평소에 거래하던 곳이 있을 텐데 왜 굳이 저한테 일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혁권의 물음에 아르마크 국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기존 거래처들이 빌어먹을 세컨드리 보이콧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어서 물량을 넘기려면 매입을 해도 괜찮다는 걸 보증해 줘야 되는데, 미국하고 오간 이야기를 알려 줄 수는 없지 않겠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기에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페르시아만이 봉쇄되고 긴장이 고조되면 국제 원유 가격과 함께 콘덴세이트 시세 역시 상승할 것이 분명했기에 혁권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나도 존슨 자네가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 줬으면 하네.”
솔레이마니 사령관까지 말을 보태자 혁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리하도록 하지요.”
“잘 생각했소.”
아르마크 국장이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쪽지를 하나 꺼내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금 절반은 여기 적힌 계좌로 입금시켜 주고 나머지는 현물로 가져다주시오. 물품 목록은 나중에 정리해서 보내 주도록 하겠소.”
쪽지를 펼쳐 적힌 글씨를 빠르게 훑은 혁권이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봤다.
“매각 대금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시고 있습니까?”
“현재 거래 시세에 맞춰 주면 되오. 그쪽도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르마크 국장이 그리 말하자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쪽지를 다시 상대편 앞에 내려놨다.
“제 몫에서 절반을 떼서 두 분한테 드릴 테니 계좌를 적어 주십시오.”
혁권의 말에 아르마크 국장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군그래.”
그러고는 만년필을 꺼내 탁자에 놓인 쪽지에다가 자신의 개인 계좌 번호를 적었다.
더 이상 테헤란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혁권은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비즈니스 제트기에 올라탔다.
주기장에서 활주로가 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혁권은 널찍한 좌석에 앉아 위성 전화기로 빈 살만 왕세자와 통화를 했다.
-어떻게 됐나?
“이틀 뒤에 이란 해군 고속정들이 호르무즈해협에 기뢰를 부설할 겁니다.”
-또 이틀을 더 기다려야 된다는 건가?
날이 갈수록 상황이 수그러들지 않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점점 커지고 있는 데다가, 내부 동요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기 때문인지 빈 살만 왕세자의 목소리에서 조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판을 제대로 벌이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이번 일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왕세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빈 살만 왕세자는 짧게 혀를 차고는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았다.
-쯧. 약속한 돈을 계좌로 넣어 주도록 하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참을성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 일을 확실히 처리해야 될 걸세.
“이틀 뒤부터는 이스탄불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꼭 그리되어야 하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툭 끊어져 버리는 전화에 혁권은 인상을 쓰며 어둡게 변한 액정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다이얼 버튼을 누른 뒤 위성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한참 연결음이 들리고 난 뒤에 스텐저가 전화를 받았다.
-연락을 주신 걸 보니 오늘이 디데이인가 보군요.
“내가 이야기한 건 준비가 다 됐소?”
혁권의 물음에 스텐저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가로 넣어 주신 돈을 합쳐서 5억 2천만 달러를 담보로 레버리지를 40억 달러까지 당길 수 있게 해 놨습니다.
한화로 무려 4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지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패를 훤히 읽고 치는 도박판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내일까지 원유 선물을 있는 대로 싹 다 매입해 주시오.”
-국제 유가가 기대하는 대로 상승하지 않는다면 자칫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될 수도 있습니다.
스텐저가 마지막으로 위험성을 알렸지만 그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위험부담에 대해선 충분히 알고 있으니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오.”
혁권은 스텐저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게 단호한 투로 말을 이었다.
“반드시 내가 지시한 대로 내일을 넘기지 말고 매입을 모두 끝내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은 혁권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잭팟Jackpot이 터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호르무즈해협 무산담 반도 인근 해상.
대형 LNG운반선 세이렌호는 카타르에서 액화천연가스를 가득 실고 목적지인 일본으로 순항 중이었다.
파도도 높지 않고 바람도 잔잔해 항해를 하는 데 아주 좋은 상태였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전자해도와 GPS가 있었기에 세이렌호는 아무런 문제없이 하얗게 파도를 가르면서 바다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장인 시프는 불을 환하게 켠 함교 의자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해 왔기에 이제 육지보다 이렇게 배를 타고 있는 것이 더 익숙한 그는, 사방이 고요한 밤에 보석처럼 수많은 별들로 반짝이는 하늘과 망망대해의 정취를 홀로 온존하게 즐길 수 있는 이 순간을 하루 중에 가장 좋아했다.
“선장님.”
고개를 돌리자 오늘 당직을 맡은 1등 항해사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정이 넘었는데 이제 그만 들어가 쉬시죠.”
“벌써 그렇게 됐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전자시계를 보자 어느새 자정이 지나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방으로 가야 되겠군. 2시에 교대지?”
“네.”
“졸지 말고 사고가 나지 않게 신경을 쓰도록 해.”
“하하하. 정신 바짝 차리고 있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3년째 함께 배를 타고 있는 1등 항해사의 넉살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게.”
“들어가십시오.”
막 발걸음을 떼서 함교를 나가려고 할 때 통신기 앞에 앉아 있던 선원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쳤다.
“서, 선장님. 이걸 좀 들어 보십시오!”
“왜 그래?”
“이란 해군이 공용 주파수로 통신을 보내왔는데 근처에 기뢰가 매설됐으니 당장 뱃머리를 돌리라고 합니다.”
“뭐야!”
시프 선장과 항해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황급히 통신기로 뛰어왔다.
선원이 스피커 볼륨을 키우자 중동 특유의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가 반복적으로 흘러 나왔다.
-우리는 이란 해군이다. 귀 선박은 아국이 설정한 봉쇄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항로에 기뢰들이 매설되어 있으니 즉시 뱃머리를 돌려라.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이 이후에 일어나는 상황은 전적으로 귀 선박 책임이니 어서 회항해라!
“······!”
“선장님, 어떻게 합니까?”
너무 놀라 그대로 몸이 굳어 있던 시프 선장은 항해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이런 미친 새끼들! 당장 배를 멈춰, 어서!”
“예!”
항해사가 얼른 뛰어가 장치를 조작하자 선체 전체가 격하게 흔들리면서 배 엔진이 멈춰 섰다.
반동에 균형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 뻔하다가 겨우 바로 선 시프 선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들 괜찮아?”
“······으으. 예.”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천천히 속력이 줄어들고 있는 걸 확인한 선장은 구겨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회사에 주변 해상 관제소에 현재 상황을 알리고 지시를 기다렸다.
세이렌호뿐만 아니라 호르무즈해협을 지나려던 다른 많은 선박들도 똑같은 일을 겪으며 황급히 운항을 중단해야 됐다.
이로써 하루에도 수십 척의 대형 선박들이 바쁘게 드나들던 호르무즈해협이 완전히 봉쇄되어 버리고 말았고 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란이 어젯밤 기습적으로 호르무즈해협에 기뢰를 설치하고 군함을 배치해 페르시아만을 봉쇄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유와 천연가스 공급에 심대한 차질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조금 전 열린 뉴욕상업거래소에서는 다음 달 인도분 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급등하고 있습니다. 백악관에서는 긴급 브리핑을 열어 이번 사태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며 이란에 즉각 봉쇄를 풀지 않으면 군사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 했습니다. 한편······.
서울로 돌아와 새로 입주한 저택 거실에 앉아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CNN 뉴스를 보던 혁권은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제 곧 충격이 공포로 바뀌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천정부지로 미친 듯이 뛰어 오르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수록 자신이 미리 매입해 둔 원유 선물들은 그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 줄 테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박한 말투로 속보를 내보내고 있는 앵커의 말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얼음을 넣은 온더록스 잔에 담긴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때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자 잔뜩 흥분한 스텐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시아만에서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지금 뉴스를 보고 있는 중이오.”
-지금 선물 가격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벌써 매입가에서 3%나 상승했는데, 얼마나 더 올라갈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따로 내가 말을 할 때까지 선물은 절대 팔지 말고 놔두시오.”
-당연하지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파는 머저리가 어디 있답니까.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까지 쏟아 내면서 대답한 스텐저가 이내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도저히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궁금함이 가득 묻어나는 어조였으나 혁권은 쉬이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어떻게 알았겠소.”
-아, 역시, 그렇겠지요.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경로로 정보를 입수한 건지는 알 길이 없으나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원유 선물을 매입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탠저는 그냥 모르는 척 수긍하고 넘어갔다.
“시장에 다른 변화가 생기면 다시 연락을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르지만 잭팟을 터트리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마지막 말에 혁권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