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05
805
빈 살만 왕세자와 헤어져 리야드로 돌아온 혁권은 성석호와 함담한테 오더 계약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 뒤, 다음 날 곧장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이란으로 날아갔다.
넓은 좌석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둥근 방풍창 아래에 있는 하얀 구름을 내려다보면서 위성 전화기로 스텐저와 통화를 했다.
“현재 내 계좌에 남아 있는 여유 자금이 얼마나 있소?”
-2천만 달러 정도가 있습니다.
“액수가 그리 많지는 않군.”
-얼마 전에 태일건설 주식과 용산 드림타운 지분을 매입하는 데 상당히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직접 지시를 내렸던 사안이었기에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던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스튜어디스가 와서 주문했던 위스키를 들고 왔다.
그녀는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테이블을 더럽히지 않도록 밑에 작은 받침을 깔고 그 위에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내려놓았다.
술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그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4억 달러를 추가로 보내 주면 그거까지 합쳐서 증거금으로 선물시장에서 레버리지를 최대한 당기면 얼마까지 가능하겠소?”
-조금 무리를 한다면 35억 달러까지 매매 액수를 늘릴 수 있을 겁니다.
한화로 무려 3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는데, 초기 증거금으로 계약금의 일부만 납부하면 선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제도 덕분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물론 레버리지 거래가 가능한 만큼 옵션 매입 단가의 등락에 따라 거액의 증거금을 추가로 내야 됐는데, 만약 제때 이걸 맞추지 못한다면 바로 파산하게 되는 위험도 함께 떠안아야 했다.
“내가 말을 하면 원유 선물을 전부 다 매입해 주시오.”
그러자 스텐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35억 달러를 다 투자하신다는 겁니까?
“그렇소.”
담담하게 말하는 혁권과 달리 스텐저는 크게 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마시오.”
확신에 찬 말투에 지난 몇 년간 자산관리를 해 온 스텐저는 혁권이 결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인 선물 거래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객이 원하는 일이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혁권이 보여 준 능력을 생각해 보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런 베팅을 하는 것이리라.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돈의 주인은 존슨 씨니까요.
자기 돈을 자기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떠보듯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런 거액을 배팅하시는 걸 보니 뭔가 확실한 정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나중에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요.”
은연중에 확신이 드러나는 목소리였으므로 스텐저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하나 유능한 변호사이자 자산관리사답게 고객이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에 있어선 굳이 캐묻지 않는 미덕을 발휘하며 스텐저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소.”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고 푹신한 좌석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아직 차가운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으면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란이 페르시아만을 봉쇄하고 미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보내면서 금방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긴장감이 조성된다면, 미리 사 둔 원유 선물 가격은 엄청나게 폭등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함께 판을 만들어 가고 있었기에 이건 절대 질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거였는데, 눈앞에 뻔히 돈을, 그것도 엄청난 거액을 벌어들일 기회가 보이는데 그걸 그냥 놔두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걸 현실로 만들어 내려면 우선 이란 정부를 이번 일에 끌어들여야 했기에 그는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어떻게 설득할지 깊이 고심했다.
혁권이 테헤란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뜨거운 햇볕이 남아 있는 오후였다.
최근 험악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듯 공항 역시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호텔에서 잠시 쉰 혁권은 일행과 함께 약속 시간에 맞춰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혁명수비대 사령부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회색으로 단조로운 테헤란 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군데군데 새롭게 올라가는 고층 건물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동안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 상당히 활기차게 돌아가던 이란 경제였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며 경제 재제가 재개될 거라는 소식에 다시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표정이 어두웠고 상점 물품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야 될 판매대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게다가 거리엔 피켓을 들고 반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였는데, 모인 숫자도 적지 않은 데다가 성조기까지 불에 태우며 과격한 발언을 쏟아 냈지만, 경찰은 그걸 뻔히 지켜보면서도 제지하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다 보니 더욱 거리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느껴졌다.
“아직 미국의 경제 재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가 살벌한 것 같습니다.”
조수석에 탄 하킴의 말에 고개를 바로 한 혁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방증이겠지. 거기다가 이미 한번 재제 해제로 국민들이 풍요를 맛봤기에 예전보다 충격과 동요가 더욱 클 거야.”
“왕정을 뒤집고 혁명을 한 호메이니 시대하곤 지금은 다르니까요.”
“맞아. 그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을 미국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이란 정부가 반미 시위를 더욱 부추기는 거지.”
하킴이 슬쩍 눈치를 보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이란 정부가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사정이 이러니 더욱 거부할 수 없을 거야.”
“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혁권은 무심한 눈빛으로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위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제 재제를 앞두고 미국과 서방 세계에 자신들의 힘을 보여 줄 필요성이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 결속을 다지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러자 하킴은 이해가 됐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시위대 때문에 막히던 정체 구간을 벗어나자 혁권을 태운 승용차는 다시 천천히 속력을 올렸다.
얼마 뒤, 혁명수비대 사령부에 도착한 그는 미리 지시를 받고 기다리던 살림 대위의 안내를 받아 곧장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 주는 살림 대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군복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군.”
“지난번에 도움을 주신 건 감사했습니다.”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리고 경제 재제를 앞두고 한국 정부가 너무 미국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한번 충격을 줄 필요가 있었고 말이야.”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호의만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 됐건 덕분에 국정원에서 함부로 그를 건드릴 수 없게 됐으니 고마워하는 것이 맞았다.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로 가서 마주 보고 앉았다.
“약소하지만 감사의 표시로 준비한 겁니다.”
“그냥 와도 되는데 또 뭘 이런 걸 가져왔나.”
혁권이 내민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슬그머니 앞으로 가져와 열어 본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빳빳한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가 가득 담겨 있는 걸 확인하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잘 쓰도록 하지.”
돈 가방을 챙겨 발밑에 내려놓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한결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뭔가?”
“우선 이걸 읽어 봐 주시겠습니까.”
그는 품속에서 빈 살만 왕세자가 준 편지를 꺼내 솔레이마니 사령관한테 내밀었다.
봉투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채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편지를 본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친서입니다.”
말을 듣자마자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표정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사우드 가문의 그 빈 살만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사우드 가문이었다.
얼굴이 굳어진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그를 보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걸 가지고 왔군.”
“사령관님과 이란 정부에도 득이 되는 내용입니다.”
“흐음.”
잠깐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내 한쪽 팔을 뻗어 탁자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밀봉된 부분을 찢고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내서 펼쳐 봤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편지를 읽는 동안 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만약 화를 내거나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면 시작부터 계획이 꼬이는 거였기에 더욱 신경 써서 반응을 살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내용을 다 읽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을 내뱉었다.
“빈 살만이 아주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군.”
그러고는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권이 몸을 앞으로 가까이 하며 묻자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걸로 카리니 사건을 덮으려는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뭐지?”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이럴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명분과 실리입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물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게.”
“우선 거둘 수 있는 건 굳이 핵이나 탄도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강한 경고를 주며 존재감을 내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페르시아만에 문제가 생긴다면 전 세계 경제가 뒤흔들릴 테니까요.”
실제로 중동 지역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그 여파가 전 세계 경제로 미쳤기에 이번에도 상당한 충격이 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 재제를 앞두고 내부에 쌓인 불만과 분노를 바깥으로 돌려 결속을 다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10억 달러를 현금으로 넘겨주겠다고 했으니, 실질적인 이득도 거둘 수 있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그땐 어떻게 책임을 질 텐가?”
미국하고 강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지만 양측이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면 약간의 생채기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이란 최고위층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도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하얀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까딱거리는 그의 얼굴에 살짝 비웃는 기색이 서렸다.
“겉으론 세계의 경찰이니 평화니 하는 번지르르한 말만 해 대더니 결국엔 똑같은 속내로군. 뒤로는 이런 구린내를 풍기고 있으니 역시 양키 놈들은 믿을 수가 없는 족속이야.”
이득을 위해 온갖 음모와 술수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이 국제정치였기에 그건 굳이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정부나 권력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혁권은 굳이 생각을 밖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사령관님과 이란 정부가 얻을 이득만 가지고 판단을 해 보십시오.”
한참 동안 가만히 담배를 피우면서 고심하던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건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윗분들과 논의를 한 다음에 결과를 알려 주도록 하지.”
크게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으나 겉으로 제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정도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쉽지 않은 일인데 제안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확실히 결정 난 것이 아니니 그 말은 나중에 듣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