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04
804
혁권을 태운 레인지로버 SUV는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사막 한가운데 곧게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갔다.
앞뒤로 약간 거리를 두고 붙어 있는 호위 차량을 제외하곤 다른 차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혁권은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황량한 사막에 시선을 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온통 모래뿐이군.”
간간이 모래 구릉이나 돌덩이 같은 것이 보이긴 했지만 그 외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풍경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먼지를 닦아 낸 혁권은 조수석에 타고 있는 하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
그러자 하킴이 대시보드에 달려 있는 네비게이션을 확인하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하고 많은 장소 중에 왜 이런 데서 보자는 거야.”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침이 되자 상대편에서 약속 장소라고 알려 준 것이 달랑 GPS 좌표 하나였다.
위치를 확인해 보고 사막 한가운데라는 걸 알고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몰랐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거친 모래사막을 10분여 정도 더 달리자 커다란 아랍식 텐트 서너 개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공터에는 하나같이 검은색으로 짙게 선팅이 된 고가의 대형 SUV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경호원 복장의 사내들이 HK416자동소총을 손에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모두가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뿐인 주변 풍경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멈춰 선 차에서 혁권이 부하들과 함께 내리자 턱수염을 기르고 깔끔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존슨 씨, 어서 오십시오.”
정확하게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손을 내밀자 혁권은 신중한 눈빛으로 상대를 살피곤 천천히 맞잡았다.
“반갑소. 그런데 먼저 만나자고 청했으면 그쪽 이름부터 알려 주는 게 예의이지 않소.”
약간 날이 서 있는 투였으나 사내는 그다지 기분 나쁜 티도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린자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존슨 씨를 여기로 부른 분은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요?”
그러자 린자위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고개를 위로 들며 말했다.
“저기 오시는군요.”
“······?”
린자위가 가리키는 대로 하늘을 쳐다본 혁권은 살짝 놀란 얼굴로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헬리콥터 두 대가 불쑥 나타나 시끄러운 로터 소리를 내며 이리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면서 착륙한 헬리콥터 옆문이 열리자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사내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까지 흩날리는 먼지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있던 혁권은 사내의 정체를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놀랍게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하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압둘 아지즈 현 국왕의 아들이자 국방장관과 제2부총리라는 요직을 겸직하며 고령인 국왕을 대신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 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직접 나올 거라고는 그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혁권은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는 차분히 상대를 바라봤다.
머리에 케피야를 쓰고 턱수염을 기른 빈 살만 왕세자는 그를 힐끔 쳐다보곤 비서실장인 린자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마치 품평을 하듯 그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본 빈 살만 왕세자는 능숙한 영국식 영어로 입을 열었다.
“빈 살만이오.”
“존슨입니다.”
왕족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혁권은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쳐다보며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옆에 있던 린자위 비서실장이 그걸 보고 눈가를 찡그리는 것과 달리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에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린자위의 안내를 받아 텐트들 가운데 제일 크고 가운데 위치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겉으로는 단순히 크기만 할 뿐 평범해 보였으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는 완전히 별세계였다.
두툼한 양탄자를 바닥에 깔아 놓아 아늑했고, 버석거리는 모래는 물론 바깥에서 부는 바람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어 방음 효과마저 뛰어났다.
화려한 수가 놓인 푹신한 쿠션과 비단 방석 들이 둥그렇게 쌓여 있는 자리들 중 가장 안쪽에 혁권과 빈 살만 왕세자가 마주 본 자세로 앉자 중동 특유의 짙은 눈 화장과 아름다운 갈색 피부를 가진 빼어난 미모의 시녀가 다가와서는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차 시중을 들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빈 살만 왕세자는 쿠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
뭘 이야기하는지 알았기에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말을 들었다.
“지난번에 리야드에서 벌인 일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행동이었소.”
“그저 의뢰를 받아 수행했을 뿐 일부러 왕세자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비즈니스일 뿐이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잠시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빈 살만 왕세자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고 늘어지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건 이쯤하고 넘어가도록 하지.”
이걸 가지고 자신을 어떻게 압박할까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던 혁권은 예상과 달리 상대가 너무나도 쉽게 비자금을 반출시킨 일을 넘기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왜 이러는 건지 더욱 의구심이 강하게 생겼다.
“단순한 비즈니스였다고 하니 내 의뢰를 받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
“······!”
“왜 대답이 없나?”
뜻밖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혁권은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맡기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빈 살만 왕세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거만한 태도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 줄 거라 생각하네.”
거절이란 단어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한 말투였다.
이에 약간 반감이 든 혁권은 도발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그 기름칠한 혀로 앞서 말한 것이 다 거짓인 게 되겠지. 물론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치러야 할 거야.”
싸늘한 대답에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혁권은 잠시 빈 살만 왕세자를 바라보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전 누구에게 강제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날 적으로 만드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단순히 던지는 농담이 아닌 듯 빈 살만 왕세자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여기서 더 대립각을 세워 봤자 득 될 것이 없었기에 그는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의뢰할 것이 뭡니까?”
“솔레이마니하고 친분이 깊다고 들었네.”
“이란하고 관계된 이야기입니까?”
혁권의 시선을 받은 빈 살만 왕세자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솔레이마니를 설득해서 이란이 페르시아만을 봉쇄하도록 만들어 줬으면 하네.”
“······!”
순간 혁권은 자신이 이야기를 잘못 들었나 의심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것도 잠시 이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농담이나 하려고 그쪽을 이리로 부른 것 같나?”
당연히 아닌 것을 안다.
그러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페르시아만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30%가 오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 문제가 생긴다면 세계 경제에 오일 쇼크에 버금 가는 엄청난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원유 수출로 충당하는 사우디아라비아였기에 페르시아만이 봉쇄될 경우 인근 산유국들과 함께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도저히 빈 살만 왕세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어 그를 살피던 중, 문득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페르시아만에 긴장감을 조성해서 터키에서 있었던 카리니 사건을 덮으려는 겁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군.”
혁권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빈 살만 왕세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까지 페르시아만 주위에 자리 잡고 있는 산유국들은 어느 한 곳도 만만한 국가가 없었다.
거기다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 대부분이 이권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자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상황을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터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화약고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겁 없이 불장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파급력이 큰 일인 만큼 실제로 이란이 페르시아만 봉쇄에 나선다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빈 살만 왕세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카리니 암살 사건을 단번에 덮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아울러 이란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실추된 위상을 끌어 올릴 수 있으니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절묘한 승부수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혁권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벌이면 그 즉시 엄청난 비난과 함께 자칫 서방 국가들과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란이 이걸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화를 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이란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니 분명 받아들일 거야.”
확신에 찬 상대의 태도를 본 혁권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면서 물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있습니까?”
“봉쇄는 그리 오래 끌지 않을 거야. 딱 일주일만 시간을 끌면 모든 상황이 정리될 테니까 말이야.”
“미국이 참지 못하고 그사이에 공습이라도 가한다면 어떡할 겁니까?”
일주일뿐이라고 해도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고, 카타르 알우데이드 공군기지에 1만 명이 훌쩍 넘는 미군과 수백여 대의 공군기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이었기에 백악관에서 결정만 내리면 미국은 언제든지 이란을 공격할 수 있었다.
“미국은 움직이지 않을 거네.”
“백악관하고도 이야기가 끝난 겁니까?”
“터키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게.”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빈 살만 왕세자의 태도에 이미 미국과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섣불리 이런 일을 벌이지는 못할 터였다.
빈 살만 왕세자가 품속에서 밀봉된 편지를 하나 꺼내 탁자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보여 주고 솔레이마니가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주면 되는 거네. 그러면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깨끗하게 잊도록 하지.”
그는 굳은 얼굴로 빈 살만 왕세자와 아래에 놓인 편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걸 잘만 이용한다면 꽤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영향력을 가진 빈 살만 왕세자하고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였다.
“좋습니다. 일을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말과 함께 혁권이 편지를 집어 안주머니에 챙겨 넣자 빈 살만 왕세자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