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13
813
다음 날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와 공항으로 향하던 혁권은 홍콩에 있는 스텐저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저희 회사에서 존슨 씨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은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다스의 손이라고 합니다. 이번 선물거래로 단번에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셨으니 틀린 말도 아니지요.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혁권은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그 말을 하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요?”
-실은 태일건설에 특이 동향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게 뭐요?”
그는 살짝 얼굴을 굳히면서 관심을 보였다.
-김성균 사장이 계열 분리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쪽 재무이사가 은밀히 접촉을 해 와 도와줄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옆에서 부추길 때는 안 움직이더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요?”
-김인철 부회장이 인사권을 휘두르면서 태일그룹을 빠르게 장악해 나가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행 중인 성년 후견인 재판이 지지부진한 상태인 것도 한몫했고 말입니다.
“더 미적거렸다가는 건설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든 모양이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혁권은 잠시 상황을 정리했다.
껄끄러운 상대인 김인철의 힘이 강해지는 걸 원치 않는 그의 입장에서 태일그룹이 둘로 쪼개지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되길 은근히 바랐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면 현재 사장으로 있는 건설만 독립을 해서 나온다는 말이오?”
-아닙니다. 태일리조트와 함께 금융 계열사인 캐피탈을 함께 들고 계열 분리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캐피탈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의아한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리조트는 건설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캐피탈은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요?”
-캐피탈 사장이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의 처남입니다.
“그렇게 연결 고리가 이어져 있었군.”
-김 부회장이 자기 사람으로 캐피탈 사장을 교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니까 거기에 반발해 김성균 사장한테 붙은 것 같습니다.
“주력 계열사는 아니지만 내 기억으로는 기업 규모가 꽤 큰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자본금 4,500억 원에 작년 한해 영업이익이 1천억 원 정도로 중급 정도의 금융회사입니다.
“그 정도면 태일그룹 입장에서도 꽤 타격이 되겠군.”
-태일리조트도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가운데 용인 골프장을 비롯한 알짜배기들이 많아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동의하듯 혁권은 머리를 끄덕였다.
회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자산 가치가 장부가로 따져도 거의 1조 원 대에 육박했기에 태일리조트도 결코 허투루 볼 곳이 아니었다.
“정말로 계열 분리가 이루어진다면 태일그룹의 재계 순위가 확 떨어지겠는군.”
-앞서 백화점과 유통이 나간 것에 이어서 주력 계열사인 건설이 빠져 버리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10대 그룹에서 탈락하는 건 확정적이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15위 권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을 겁니다.
재계 순위는 단순한 줄 세우기를 넘어 해당 재벌 그룹이 가지고 있는 위상과 힘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태일그룹이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김종원 회장이 있을 때만큼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기는 어려워질 터였다.
어찌 됐건 혁권으로서는 딱히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물론 계열 분리가 되고 태일그룹이 시끄러워지면 주가가 크게 떨어지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뭘 도와 달라는 거요?”
-오로라 펀드가 가지고 있는 지분으로 계열 분리를 위한 주주총회 때 자신들을 적극 지지해 달라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 오로라 펀드가 가진 태일건설 지분이 5%가 넘어가니, 주주총회에서 의제를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도움이 꼭 필요할 터였다.
-어떻게 할까요?
혁권은 턱 끝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하시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김성균 사장이 일을 벌이면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소?”
-김 부회장 쪽에서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겠지만, 우리가 힘을 실어 준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긍정적인 대답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형제간의 싸움이라……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군.”
태일건설 사장실 소파에 김성균을 비롯한 다섯 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비서실장인 고동욱과 손종환 상무, 구민재 재무이사에 조영두 전무까지 하나같이 김성균 사장의 최측근 심복들이었다.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는 꽁초가 가득했고 다들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몸을 살짝 뒤로 기대면서 김성균 사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로라 펀드를 우리 편을 들어 주기로 확실히 약속을 했다는 거지?”
시선을 받은 구민재 재무이사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주주총회가 열리면 우리 쪽에 표를 주겠다고 확답을 줬습니다.”
“따로 조건은 달지 않고?”
“네.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용산 드림타워 지분을 뜯어 가 놓고, 이번엔 순순히 부탁을 들어줬다니 이상하군.”
김성균 사장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옆에 있던 손종환 전무가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말했다.
“지분을 넘기는 대신 우호 세력이 되어 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그걸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름 일리 있는 대답이긴 했으나 그래도 김성균 사장은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이득이 생길 것 같으면 하이에나처럼 덤벼드는 놈들인데, 그렇게 순순히 우리 뜻을 따를 리가 없어. 당장 계열 분리가 되면 주가가 떨어질 것이 뻔하잖아.”
지금도 그룹의 지원을 거의 못 받고 있었지만 계열 분리가 되어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면 모기업의 후광과 도움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해지는 거였기에 회사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태일건설 지분을 상당수 가지고 있는 오로라 펀드로서는 이번 일로 손해가 클 터였다.
그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이쪽 편을 들어 주겠다고 하니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어찌 됐건 오로라 펀드가 힘을 실어 준다면 일이 한결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김성균 사장은 찝찝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으나 지금은 다른 문제들도 많았기에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노조 쪽은 어떻게 됐나?”
그러자 왼편에 앉아 있던 고동욱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노조 위원장과 주요 임원들을 거의 회유하기는 했습니다만, 대신 현금 5억 원을 각각 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김성균 사장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번에 아주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모양이군.”
“박쥐 같은 행태가 마음에 안 들어도 노조에서 계열 분리를 반대하고 나서면 주주총회 통과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돈을 주고 부리는 머슴 같은 놈들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는 것에 짜증이 났지만, 더 큰 걸 이루기 위해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원하는 대로 주도록 해. 대신 나중에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확실히 단속을 해 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국은행의 동의를 받는 일만 남았군.”
주거래은행인 만큼 태일건설이 지고 있는 대출과 채권 절반 이상을 내주고 지분도 일부 소유하고 있었기에, 대국은행의 동의 내지는 묵인이 꼭 필요했다.
구민재 재무이사가 김성균 사장을 보며 말했다.
“전승훈 은행장하고 바로 약속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어때? 설득이 될 것 같나?”
“전임 은행장처럼 부회장 측하고 손을 잡은 낌새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전에 있던 최민찬 은행장은 김인철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을 압박해 오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걸 떠올린 김성균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주거래은행을 다른 곳으로 바꿀 수 있게 준비를 해 놓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몇 곳하고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예 본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외국계로 갈아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지난번에 대출을 해 준 시티은행 쪽에도 한번 의사 타진을 해 봐.”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데 빈손으로 가기 그러니까 탈 없는 걸로 돈을 좀 마련해 놔.”
“얼마나 준비를 할까요?”
잠깐 생각을 한 김성균 사장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사과박스 하나를 트렁크에 실어 줘. 그래도 위치가 있는데, 그 정도는 줘야 약발이 먹힐 거 아니야.”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2킬로그램짜리 사과박스 하나를 5만 원권 뭉치로 꽉 채우면 딱 10억이 들어갔다.
상당한 거액이었지만 대국은행장 같은 거물을 움직이려면 이만한 성의는 보여야 했다.
김성균 사장은 좌우에 앉아 있는 측근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부회장 측이 상황을 알아차리면 분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열 분리를 막으려고 들 테니까,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통과될 때까지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예.”
어떻게든 태일그룹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빼앗긴 총수 자리를 찾아오려고 했던 김성균 사장은 오랜 고심 끝에 어렵게 계열 분리 결정을 내리고도 내심 미련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인 김인철이 지주사인 태일산업을 장악하고 빠르게 그룹 장악력을 높여 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현재 쥐고 있는 건설마저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 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며 물밑에서 조심스럽게 계열 분리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지만, 오래지 않아 태일건설의 움직임이 김인철 부회장 측에 포착됐다.
“지금 뭐라고 했어!”
고개를 든 김인철 부회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 좋은 소식을 가져온 차민성 대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그런 김인철 부회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김성균 사장이 계열 분리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인철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책상을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 미친 거 아냐!”
건설은 태일그룹을 떠받치는 핵심 계열사 가운데 하나인데다가 태일산업을 중심으로 한 순환출자 구조에서 중요한 고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눈을 부릅뜨며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태일건설뿐만 아니라 리조트와 캐피탈도 김성균 사장의 행동에 동조해 함께 그룹에서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회사까지! 그거 확실한 거야?”
다그치듯 묻자 차민성 과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몰래 대주주들과 접촉해 설득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포착됐습니다.”
“제길. 이 자식들을 진즉에 싹 다 정리해 버렸어야 됐는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김인철은 두 눈을 번들거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태일캐피탈 사장은 어머니의 남동생이 김종원 회장 때부터 오랫동안 경영을 맡아 왔고, 리조트 역시 큰형의 측근이 사장직을 맡고 있어 연말 정기 인사에서 한꺼번에 물갈이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꾸로 이렇게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