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14
814
김인철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일을 벌이려는 걸 보면 무언가 승산이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 분명한데, 대주주들 가운데 누가 저쪽에 동조를 하고 있는 거지?”
“아직 파악 중입니다만 지난번 주주총회에서처럼 5%가 넘는 지분을 보유한 오로라 펀드가 김성균 사장의 편을 든다면 표 대결로 갔을 때 저희가 불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놈들은 계속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는군.”
“거기다가 이번에 함께 반기를 든 태일캐피탈과 리조트에서 각각 가지고 있는 지분들도 불안 요소입니다.”
오너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태일그룹 계열사들은 서로 주식을 교차 소유하는 순환 출자구 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금융 계열사인 태일캐피탈은 회사 특성상 그룹 계열사 지분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리조트 역시 건설과 연관성이 깊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김인철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두 회사가 보유한 태일건설 지분이 얼마나 되지?”
시선을 받은 차민성 과장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대략 6.2%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젠장 할!”
김인철의 입에서 대번에 거친 욕설이 나왔다.
아무리 계열사들 간에 순환 출자 구조로 묶여 있다지만 고만고만한 규모의 회사도 아니고 자산 총액만 15조 원이 넘어가는 태일건설 지분을 6.2%나 가지고 있다는 건 상당히 특수한 경우였다.
최근 주식 가격이 크게 낮아져 있다고는 해도 지분 가치만 족히 수천억 원대는 될 터였다.
김성균 사장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우호 지분에 이 두 회사의 주식이 합쳐지면 40%가 훌쩍 넘는 지분이 만들어졌다.
반면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태일건설 지분은 20% 아래로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캐피탈과 리조트를 두 회사를 끌어안고 계열 분리를 시도하는 건지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을 그냥.”
이를 갈아 대는 김인철을 보며 차민성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태일건설 역시 두 회사의 지분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으니 그룹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걸로 보입니다.”
“단순하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임을 알아차린 김인철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건설에서 우호 지분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도록 해.”
“예.”
“그리고 당장 건설을 비롯해서 두 회사 대표이사를 해임조치하도록 해.”
그러자 차민성 과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들 아직 임기가 한참 남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계열 분리까지 하려고 드는데, 본사에서 인사 조치를 한다고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계열사라고 해도 엄연히 독립된 법인이었기에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경영진을 교체하려면 이사회나 주주총회를 통해 해임 안을 통과시켜야 됐다.
“당연히 거부하겠지만 이대로 그룹에 분란을 일으키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먼저 선수를 쳐서 회사 내에서 입지를 좁혀 놔야 돼.”
강제력은 없다고 해도 본사에서 해임 조치를 내린다면 해당 계열사의 직원들이 불안해할 테고 그럼 내부에서 상대를 흔들 수 있었다.
그때서야 의도를 알아차린 차민성 과장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차민성 과장이 나간 뒤, 혼자 남은 김인철은 일그러뜨린 표정으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가만히만 있었으면 조금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알아서 제 명줄을 재촉하는군.”
어쩔 수 없지, 하며 중얼거리는 김인철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이번 기회에 후환이 남지 않도록 싹을 모조리 다 뽑아 주지.”
김인철이 지시한 대로 다음 날 그룹 인트라넷에 김성균을 비롯한 캐피탈과 리조트 대표에 대한 인사 조치 공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이미 그룹에서 떨어져 나오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김성균 사장과 두 계열사 대표들은 즉각 강하게 반발하며 공개적으로 김인철에 대해 패륜적이고 독선적인 경영을 한다고 비난했다.
급기야 양측 사이의 다툼이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의 상태하고 맞물려서 그룹 밖으로 새어나와 언론 기사로 실렸다.
-태일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두 형제간의 정면 대결.
-형제의 난에 그룹이 둘로 쪼개질 위기에 처한 태일그룹.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경영권 분쟁 이슈에 상장된 태일그룹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크게 요동쳤다.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PPT 준비와 자료 작성을 하느라 오전부터 열심히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일을 하던 고현덕은 옆자리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날아왔다.
“저, 고 대리님.”
“왜?”
부하 직원은 눈동자를 데굴 굴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고현덕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큰 비밀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얘기. 또 저번처럼 시답잖은 헛소문이나 나불거릴 거면 하지 말고.”
마침 자리도 바로 옆이라 친한 사이이긴 하지만 평소에 입이 가벼운 게 흠이라 사내에 떠도는 이런저런 소문들을 옮겨 대는 통에 은근히 귀찮았다.
“제가 언제 허튼소리하는 거 보셨습니까?”
“많이 봤는데?”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크흠. 왜, 요즘 위에서 좀 시끄럽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회장 자식들끼리 경영권을 두고 또 한판 붙어서 그렇다던데…….”
“아아, 나도 들었어.”
회사 내에선 쉬쉬하고 있지만 당장 인터넷만 켜도 포털에 기사가 바로 뜨는 판이었으니 눈이 붙어 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러다 진짜 그룹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거 아닙니까?”
부하 직원이 심란한 듯 말하면서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공공연히 다 아는 사실이라도 역시 사무실 안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눈치가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 들어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 와 태일그룹에서 떨어져 나오면 밑에 있는 저희들만 피 보는 거잖습니까.”
“…….”
어느새 키보드에서 손을 뗀 고현덕의 얼굴도 그리 좋지 않았다.
계열 분리가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회사가 어찌 되는 건 아니었지만 태일그룹이라는 대기업 집단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하고 아닌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최근 회사가 어렵기는 했으나 그래도 10대 재벌 그룹에 속한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면 정말 허탈할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태일그룹에 속해 있으면서 그동안 누려 왔던 여러 가지 복지와 혜택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부하 직원 앞에서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애써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괜히 사무실에 분위기를 흐리는 말은 삼가도록 해. 이럴 때일수록 입조심해야 된다는 것 정돈 알고 있겠지?”
“그렇기는 한데…….”
더 얘기하고 싶은 듯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부하 직원이 말끝을 흐리는데,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과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이, 거기, 회사가 무슨 놀이터인 줄 알아? 잡담은 퇴근하고 나서 해.”
아무래도 잠깐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이 꽤 길어졌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일어나 고개를 숙이곤 옆을 향해서 째릿 눈치를 주자 부하 직원도 알겠다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는 과장의 시선을 피해 파티션 뒤로 머리를 숙였다.
고현덕도 얼른 컴퓨터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방금 나눴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슬그머니 마우스를 클릭해서 인터넷에 올라온 태일그룹 관련 기사를 읽어 본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현덕뿐만 아니라 회사 직원들 대부분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새파란 바다 물결을 흰 빛의 선체가 천천히 가로질렀다.
잔잔한 지중해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요트 갑판엔 편하게 햇볕과 따스한 바람을 즐길 수 있도록 긴 의자와 가죽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현재 오롯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혁권 혼자뿐이었다.
기왕이면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있으면 더없이 좋았겠으나, 연인인 소현은 멀리 한국에 있으니 혁권은 차갑게 식힌 샴페인을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흠…….”
손에 든 태블릿 PC로 인터넷에 접속해 태일그룹과 관련된 한국 언론 기사들을 살피던 혁권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진흙탕 싸움이 되어 가는군.”
그룹 본사의 인사 조치에 대항해서 김성균 사장 측은 여러 언론사에 입장문을 뿌려 부회장인 김인철이 부당한 방법으로 그룹 경영권을 빼앗아 갔다며 폭로성 발언을 하는 등 양쪽의 다툼은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치고받는다면 계열 분리 시도가 어떻게 끝이 나든 서로 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김인철을 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실어 주고는 있지만, 김성균 사장 역시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혁권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보스, 저기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그림자처럼 한쪽에 서 있던 하킴의 말에 고개를 들자 멀리 날렵하게 생긴 모터보트 한 대가 파도를 가르면서 이리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탄 요트보단 작았지만 2층으로 된 10인승 중형 모터보트로 충분히 바다를 횡단할 수 있는 크기였다.
“보스.”
옆을 돌아보자 하킴이 묵직한 빛깔이 도는 글록 권총을 거꾸로 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혁권은 슬쩍 모터보트를 쳐다보곤 가볍게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필요 없을 테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알겠습니다.”
군말 없이 짧게 대답한 하킴은 권총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사이 바로 근처까지 접근한 모터보트는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이내 엔진을 완전히 끄고는 요트 우현으로 다가왔다.
얼마 있지 않아 모터보트에서 이쪽으로 중동인 세 명이 건너왔는데,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약간 통통한 체격의 중년인 한 명과 건장한 사내 둘이었다.
중년인은 오늘 만나기로 한 타헤리안주 그리스 이란 대사였고, 나머지는 경호원 같았는데 바람에 윗도리가 펄럭이자 허리춤에 찬 권총이 살짝 보였다.
앞으로 다가온 타헤리안 대사는 그에게 먼저 한쪽 손을 내밀며 중동 억양이 섞인 영어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슨 씨를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CIA나 모사드의 감시를 걱정할 필요 없이 편하게 만날 수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타헤리안 대사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였기에 다른 이들의 감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가볍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안쪽 선실로 들어가서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물건을 가져오셨겠지요?”
“물론입니다.”
혁권이 눈짓을 하자 뒤편에 서 있던 부하들이 양옆으로 들어야 될 정도로 큰 푸른색 낚시용 대형 아이스박스 다섯 개를 하나씩 가져와서 쌓았다.
잠금 장치를 풀고 플라스틱 뚜껑을 열자 아이스박스 안에는 물고기 대신 비닐도 뜯지 않은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