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15
815
“다 합쳐서 2천만 달러입니다.”
타헤리안 대사는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달러 뭉치들을 확인하곤 흰 이를 드러낸 채 빙그레 웃었다.
“역시 듣던 대로 일 처리가 확실하군요.”
혁권이 가져온 돈은 이란산 콘덴세이트를 처분하고 받은 대금 가운데 일부였다.
원래는 조세회피처인 리히텐슈타인에 이란 정부가 만들어 둔 비밀 계좌에 송금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상당액을 현금으로 가져다주길 원해서 이렇게 은밀하게 만난 거였다.
페르시아만 봉쇄에 은밀하게 협력을 하면서 잠시 멈췄지만 이제 곧 강하게 압박해 올 미국의 경제 제재를 피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쓸 수 있는 현금을 해외에 미리 은닉해 두려는 속셈이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지 대충 짐작이 됐지만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란산 콘덴세이트 매각은 백악관과 CIA의 묵인을 받은 거였기에, 설사 현금을 건넨 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드러내 놓고 현금을 넘겨줄 수는 없었기에, 조금 번거롭지만 바다로 나와 몰래 만남을 가졌다.
“액수가 맞는지 확인해 보시죠.”
타헤리안 대사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 왔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고는 손짓을 하자 함께 왔던 경호원이 한쪽 소매에 달린 무전기 마이크로 뭔가 중얼거렸다.
잠시 후, 무전을 받고 왔는지 선원 복장을 한 건장한 사내 몇이 들어와 쌓여 있는 아이스박스를 차례대로 선실 밖으로 운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헤리안 대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권했다.
“하나 하시겠습니까?”
“기꺼이.”
혁권이 담배를 하나 받아 입에 물자 하킴이 뒤에서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들고 불을 붙여 주었다.
하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은 타헤리안 대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의류 공장에 리조트, 부동산 개발 회사까지 그리스에서 사업을 꽤 많이 하고 계시더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경계심이 들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적당히 대꾸를 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한 곳이 그리스여서 그런지 여기에 애착이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타헤리안 대사가 은근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조만간 아테네 항구를 통해 화물을 하나 옮겼으면 하는데, 존슨 씨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린 혁권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몰래 가지고 나가려는 화물이 무언지는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금수 목록에 올려놓고 철저하게 이란으로 반입되는 걸 막고 있는 물품일 것이 보나 마나 뻔했다.
카리니 암살 사건이 해결됐으니 이제부터 미국 정부가 이란을 본격 압박하기 시작할 텐데, 이런 상황에서 구태여 자신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는 에둘러 상대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쪽은 잘 몰라서 도움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겸손의 말씀이시군요. 아테네 항구를 좌지우지하는 부두 노동조합의 뒤에 존슨 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타헤리안 대사의 말에 혁권이 미간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군요.”
혁권은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리지요.”
“으음.”
상대가 재차 미안하다고 하자 더 이상 화를 내기도 좀 그랬던, 혁권은 깊은 숨을 내쉬며 속을 가다듬었다.
타헤리안 대사의 말대로 예전에 오이코스 조직을 박살 내고 사업체들을 접수하면서 제일 큰 이권인 부두 노동조합도 함께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물건이라도 아테네 항구를 통해 들여오거나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걸 알고 타헤리안 대사가 이런 부탁을 하는 거였다.
솔직히 화물이 뭐가 됐든 세관의 눈을 피해 배에 선적시켜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될 위험이 문제였다.
“대가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란 건 아실 텐데요.”
혁권은 피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단호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부탁하신 건 들어드릴 수가 없겠군요.”
생각한 것보다 더욱 차가운 반응에 타헤리안 대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존슨 씨.”
혁권은 대답 대신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나도 그렇지만 이란 정부를 위해서라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겁니다.”
“······.”
“CIA가 바보도 아니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란과 거래를 한 날 분명 감시 목록에 올려 두고 주시하고 있을 텐데, 아테네 부두 노동조합을 통해 금수품을 밀반출시키려고 한다면 그걸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타헤리안 대사가 흠칫 얼굴을 굳혔다.
일부러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제재를 앞두고 기존에 이란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부터 감시하거나 때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금수품 밀반출을 도와준다면 스스로 맹수의 입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타헤리안 대사는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자 타헤리안 대사가 깨끗이 미련을 버린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무리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어찌 됐건 제안을 거절한 거였기에 불편한 기색을 보일 만도 했지만, 장차 이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실력자인 솔레이마니 사령관하고의 관계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서로 예의 바른 태도를 고수하곤 있으나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분위기가 조용히 흐르고 있을 때, 타헤리안 대사의 경호원이 뒤에서 몸을 숙여 무언가 귓속말을 전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상대는 혁권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보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타헤리안 대사는 혁권과 악수를 나누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갔다.
얼마 뒤 타헤리안 대사가 탄 모터보트가 멀어지는 걸 갑판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혁권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하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기오스 토마스로 뱃머리를 돌리라고 해.”
“옛, 보스.”
고즈넉한 분위기의 최고급 호텔 일식집.
은은한 향나무 냄새가 주변을 감돌고, 완벽히 일본 전통식으로 꾸며진 실내엔 다다미와 함께 옆으로 넓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 분재가 도코노마를 장식하고 있었다.
조용히 담소를 나누면서 차라도 한잔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정작 방 안은 무거운 정적이 가득 차 있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마냥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차민성 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연락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만둬.”
냉랭한 목소리로 그리 내뱉은 사람은 김인철이었다.
그는 현재 제 형과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으나 정작 상대가 약속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비추지 않아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쯤 더 시간이 흘렀을까 김인철의 인내심이 끊어지려고 할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특실 문을 열고 김성균 사장이 수행원하고 같이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지배인이 빼 주는 자리에 김성균 사장이 앉자 그가 약간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속 시간은 6시였을 텐데.”
“그래? 어찌 됐건 왔으니 된 거 아냐.”
일부러 신경을 긁으려는 듯한 말에 김인철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러자 옆에 선 지배인이 만나자마자 불을 튀기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지금 바로 식사를 올릴까요?”
“그냥 차나 한 잔 마시지.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지배인이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김인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앞에 있는 김성균 사장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많이 변했네.”
“무슨 소리야?”
“예전하고 달리 여유가 없어 보여서 말이야. 하긴 그룹 경영권에서 멀어지고 그나마 쥐고 있던 건설 사장 자리까지 쫓겨날 상황이니 불안할 만도 하지.”
김성균 사장이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이 자식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멱살을 잡을 것 같은 기세였지만 김인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큰형 말대로 웃는 얼굴로 앉아 있을 사이는 아니니까 바로 본론을 꺼내도록 할게. 건설이라도 챙기려고 꽤 애를 쓰는 것 같은데, 어차피 형은 날 이길 수 없어. 그러니까 괜히 더 화나게 만들지 말고 내가 적당한 계열사 몇 개를 떼어 줄 테니까 이쯤에서 멈추도록 해.”
“회사를 주겠다고?”
“그래. 태일알루미늄하고 화력발전, 경기 도시가스를 줄게.”
마치 크게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태도에 김성균 사장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거나 먹고 떨어져라 이거야?”
“빈손으로 쫓겨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아, 그리고 큰형이 가진 그룹 지분도 섭섭지 않은 가격에 매입을 해 줄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이상 못 들어 주겠군.”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당연히 내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들을 야비한 방법으로 가로채 놓고, 뭐 어쩌고 어째?”
김성균 사장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는 위협적인 태도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한 말, 그대로 다 돌려주지. 지금 얘기한 계열사들을 다 너한테 줄 테니까 그룹을 떠나.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어때, 공정한 거래 아니야?”
그러자 이번엔 김인철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왜? 자기가 말해 놓고 막상 너한테 해 보라 하니까 그건 싫나 보지.”
그가 사납게 김성균 사장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정말 끝까지 가 보자는 거야.”
“난 아직 네놈이 나한테 준 굴욕과 치욕감을 잊지 않고 있어. 그리고 둘째에게 한 짓도 말이야.”
같이 날을 세우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자 김인철이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쥔 채 눈가를 실룩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혔다.
서로 눈동자를 마주치며 살기를 내뿜는데 마치 칼날이라도 달린 양 살벌하기 그지없는 데다, 숨 막히는 침묵까지 더해지니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김인철이 싸늘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피를 보자는 거군.”
“그게 내가 흘리는 피는 아닐 거야.”
“마지막 기회를 줬는데도 싫다니 어쩔 수 없지. 곧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좋아. 누가 이길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김인철은 사나운 기세를 풀풀 풍기면서 그대로 별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고동욱 비서실장이 굳은 얼굴로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너무 자극해 버린 게 아닐까요?”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거꾸러져야 이 싸움이 끝날 테니까.”
이제 와 형제 운운하기에는 두 사람 다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