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86
886
“보스, 방 사장이 찾아왔습니다.”
하킴의 말에 그는 깜빡하고 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나기로 했었지.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하킴을 따라 들어온 방갑수가 그를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접으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군. 그리로 앉도록 해.”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마카오에서 정킷방 모집책 노릇을 하면서 카지노를 찾은 한국인들 주머니나 털던 피라미였었는데, 이제 제법 서울 한쪽 구석을 주름잡는 조직의 우두머리 티가 났다.
“요즘 사업은 잘되고 있나?”
“도와주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인수한 비즈니스호텔 지하층을 리모델링해서 클럽과 고급 룸살롱으로 재개장할 예정입니다.”
“업소가 함께 있으면 객실 회전률에도 도움이 될 테니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이런 걸 보면 잔머리를 많이 굴리고 아부꾼 기질이 있어서 그렇지 나름 사업을 하는 감각이 꽤 뛰어나 보였다.
“그건 그렇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뭐지?”
딱히 바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예의를 차리면서 대화를 나눌 상대는 아니었기에 어서 본론을 꺼내라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자 방갑수가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용건을 꺼냈다.
“혹시 요즘도 명동 흑곰 영감한테 관심을 있으십니까?”
“명동 흑곰이라면 박형윤 사장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뜻밖의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우연찮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뭔지 궁금해지는군.”
관심을 보이자 방갑수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듯 살짝 소리를 낮추며 이야기를 했다.
“그 영감이 외출을 했다가 괴한들한테 납치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혁권이 흠칫 놀란 얼굴로 황급히 물었다.
“납치라니 확실한 거야?”
“영감의 수족인 문명균이라는 자가 눈이 벌게져서 여기저기를 마구 쑤시고 다니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으음.”
문명균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오래전부터 박형윤을 가까이에서 보필해 온 최측근이었다.
일선에서 반쯤 물러난 박형윤을 따라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문명균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면 뭔가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명동 흑곰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오랫동안 사채놀이를 크게 하면서 재산을 불려 왔으니 원한을 가진 자들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영감이 뒈진다면 박수를 치며 좋아할 사람이 한 트럭은 될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몸을 뒤로 기댄 혁권은 팔짱을 낀 채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번에 태일정유를 손에 넣으면서 김인철을 그룹 부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필요한 지분을 추가로 확보해 더 이상 박형윤이 쥐고 있는 주식이 필요 없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껄끄러운 느낌이 걸렸다.
이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여태껏 그를 위기에서 번번이 구해 줬던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어 조용히 앉아 있는 방갑수를 바라보았다.
“좋은 정보를 가져왔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박 사장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바로 말을 해 줬으면 하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체 없이 연락을 드릴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맙군.”
그 이후로 얼마간 더 대화를 나눈 뒤 방갑수를 내보낸 혁권은 항상 몸에 가지고 다니는 담배 케이스를 버릇처럼 손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한쪽에 서 있는 하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하킴.”
“예, 보스.”
“방 사장이 알아본다고 했지만 정확한 속사정을 파악하긴 힘들 테니까 우리 쪽에서도 박형윤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조사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하는 걸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박 사장이 가지고 있던 태일산업 지분에 변동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옛.”
명령을 내린 혁권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어두운 눈동자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도시의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통 유리창 앞에 선 김인철이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탁한 눈동자에 황홀하게 점멸하는 불빛들이 비쳤으나 그 아름다움마저도 그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전자 도어락 소리가 들리며 차민성 과장이 한쪽 손에 서류 봉투를 하나 든 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부회장님.”
몸을 뒤로 돌린 김인철이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민 서류 봉투를 받아든 김인철은 거친 손길로 안에 든 지분 매매 계약서를 꺼내 확인했다.
계약서에는 박형윤이 가진 태일산업 주식 10%를 전부 홍콩에 만든 페이퍼 컴퍼니인 선캐피탈에 매각한다고 되어 있었다.
김인철은 눈을 번들거리면서 한쪽 손을 꽉 움켜쥐었다.
차명계좌를 포함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분에다가 이번에 빼앗은 주식을 더하면 모두 26%가 되니 큰형이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다고 해도 충분히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게 됐다.
“됐군. 이걸로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겠어.”
길게 숨을 내쉰 김인철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차민성 과장을 보며 말했다.
“늙은이는 확실히 처리를 했겠지.”
시선을 받자 내심 뜨끔했지만 차민성 과장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쯤 서해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 물고기 밥이 됐을 겁니다.”
“잘했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뒷마무리도 깔끔하게 끝내도록 해.”
“예.”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아진 김인철이 걸음을 옮겨 막 소파에 앉으려고 할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한쪽 다리를 꼬면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곤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고문 변호사의 목소리에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뭔데 그러는 거요?”
-그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고문 변호사는 김인철이 막 짜증을 내려고 할 때 나쁜 소식이 뭔지 이야기를 했다.
-태일증권 사건하고 관련해 검찰에서 피의자 소환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부회장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와락 얼굴을 구긴 김인철은 실내가 떠나가라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를 듣고 차민성 과장이 놀란 얼굴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옆에서 살피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김인철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스마트폰을 세게 부여잡으면서 다그치듯 말을 쏟아 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가 없었잖소!”
-분명히 명단에 없었는데 난데없이 부회장님이 포함돼서 저희도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딴 변명으로 해결될 일이오, 이게!”
-아무래도 중간에 갑자기 이름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검찰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저희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겨우 구멍을 하나 틀어막아 놨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터진 나쁜 상황에 김인철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뜩이나 태일정유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또다시 검찰 포토라인에 선다면 여러 가지로 그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김인철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내가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라도 나온 거요?”
만약 그렇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수사 비밀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검찰 측 분위기로 봐서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검찰이 이러는 이유가 뭐요!”
-윗선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가 그딴 지시를 내렸단 말이오?”
자신을 엿 먹이려는 상대가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기세였다.
-서울지검 에이스인 피우영 부장검사가 오더를 내리기는 했는데 뒤에 청와대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지금 청와대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거기서 왜?”
-총선을 앞두고 여론을 의식해서 일부러 재벌을 엄하게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됐습니다.
“젠장 할!”
청와대라니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김인철의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김성균 사장은 신문을 펼쳐 든 채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검찰 태일그룹 김인철 부회장 피의자 소환 확정.
태일증권의 펀드 자금 횡령과 배임 사건에 그룹 본사의 지시 의혹.
연이은 오너 리스크 태일 그룹 이대로 괜찮은가.
탁자에 놓인 신문 일면마다 김인철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게 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검찰에서 소스가 흘러나오자마자 각 언론사에서 앞을 다퉈 특종으로 대서특필을 한 거였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재판을 거론하면서 재벌들의 부도덕성과 무책임한 그룹 경영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고, 이런 적폐에 과감하게 철퇴를 내려 그동안 당연하다시피 이어지던 재벌에 대한 봐주기를 혁파하겠다는 정부와 검찰의 의지를 보여 주는 거라며 지지하는 내용의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기사가 실린 신문을 하나하나 살펴본 김성균 사장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 인철이 녀석이 이걸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군.”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아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피고인 신분으로 소환 통보를 하다니, 검찰에서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측근인 구민재 재무이사의 말에 김성균 사장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다 권력과 돈의 힘 아니겠어.”
“맞는 말씀입니다.”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아예 구속이 되어 버리는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하는 말에 왼편 소파에 앉아 있던 손종환 상무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조병득 사장이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검찰도 그건 조금 부담스러울 겁니다.”
“그렇겠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손종환 상무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구속까지 안 가더라도 김 부회장으로서는 상당한 타격일 겁니다. 당장 태일산업 임시주주총회는 물론이고 곧 시작될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재판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뛴 벌이지.”
비록 형제였지만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데다 지금까지 쌓인 원한이 있었기에 측은해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기회가 왔을 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확실히 짓밟아 놓을 생각뿐이었다.
“구 이사.”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도움을 준 사람이 청와대에 있는 오천구 비서실장이라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약을 먹는 놈이 힘을 제대로 쓰는 법이니까 사과상자를 하나 마련해서 아무도 몰래 건네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과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