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85
885
양주 부근 버려진 농가.
여전히 녹이 슬어 있는 철제 의자에 빈틈없이 묶여 있는 박형윤은 의식을 잃은 듯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떨군 머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입에서 흐른 침이 턱 선을 타고 허벅지에 점점이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늙었다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면 안 된다며 항상 깔끔하게 잘 다린 바지를 입고 다니던 평소의 행동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하루가 지나는 동안 사내들이 꽤나 혹독하게 다룬 듯 온몸에 폭력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차민성 과장은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져 있는 손가락과 빠진 손톱, 얼굴에 남은 피멍 등을 보고선 인상을 찡그렸다.
“혼을 내더라도 적당히 강도는 조절해야지. 저러다 숨이라도 꼴딱 넘어가면 책임질 거야?”
“으윽. 죄송합니다.”
사내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짜증을 부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박형윤을 마주 보고 앉아 턱을 까딱였다.
“깨워 봐.”
그러자 사내가 곧장 박형윤에게 다가가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기절해 있던 노인이 으, 낮은 신음을 내면서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붓기 때문에 좀처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던 박형윤은 제 앞에 차민성 과장이 있는 것을 보고선 흠칫 어깨를 굳혔다.
원독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지만 처음보다 확실히 기가 꺾여 있었다.
비스듬히 몸을 뒤로 기댄 차민성 과장은 살짝 턱을 치켜들고는 입을 열었다.
“어때?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나?”
“웃기지 마. 너 같은 양아치들한테 굴복할 내가 아니야.”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지?”
“어차피 살 만큼 살았으니까 마음대로 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내뱉는 박형윤의 모습에 차민성 과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군.”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안 될 테니 차라리 죽여.”
“정말 지독한 늙은이군.”
고령에 견디기 힘든 폭력일 텐데도 굽히지 않고 여전히 꼿꼿하게 버티는 것이 대단했으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뭔가 사고가 터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박형윤을 찾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시간을 더 길게 끌기가 어려웠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
차민성 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저장된 사진들 중 하나를 액정에 띄워 놓고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누군지 알아보겠지.”
의문을 띤 채 액정 화면을 바라보던 박형윤의 눈동자가 점차 커졌다.
멀리 미국에 이민 가 살고 있는 손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외국인 친구들과 웃으며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평범한 장면을 건너편에서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다.
이걸 왜 보여 주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박형윤은 이를 악물며 악을 썼다.
“내 손녀한테 손가락이라도 하나 댄다면 그때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테다!”
“어이구. 무서워라. 그래도 할아버지라고 손녀가 다치는 건 싫은가 보네. 그러니까 더 건드리고 싶은데 어쩌지?”
“닥치라고 했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방금 전과 달리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그걸 보며 차민성 과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손녀가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보지 않으려면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익…….”
눈에 불을 켜며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그뿐이었다.
저 혼자라면 모를까 아끼는 손녀까지 걸려 있는 이상 지금까지처럼 곧은 태도를 고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노려보던 박형윤은 마침내 숨을 몰아쉬고는 힘없이 대꾸했다.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계약서를 가져와.”
결국 상대가 굴복을 하자 차민성 과장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잘 생각했소. 처음부터 이랬으면 괜히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지 않소.”
비아냥거리는 말에 상대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섞기 싫은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혼자 마당으로 나온 차민성 과장은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곤 스마트폰을 열어 김인철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됐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묻는 김인철의 말에 차민성 과장이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잘 풀렸습니다.”
-계약서 하나 받아 내는 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거리는 거야?
가만히 않아 지시만 내리면서 짜증을 부리자 미간에 주름이 잡혔으나 그렇다고 대거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화를 꾹 눌러 참으면서 말했다.
“늙은이가 만만치 않아서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심하기는. 됐고, 처리는 전에 말했던 대로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깔끔하게 묻어 버려.
“알겠습니다.”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뚝 끊겨 버린 스마트폰을 들고 차민성 과장이 얼굴을 구기면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싸가지없는 새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욕까지 들어 먹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는데, 측근에서 온갖 비밀과 더러운 행동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자신을 김인철이 그냥 순순히 놓아 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성격대로라면 보나 마나 불안 요소를 놔두기보다는 죽여서 영원히 입을 막으려고 들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민성 과장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언제까지 네놈 밑이나 닦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흙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이긴 그는 몸을 돌려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창재야.”
“예, 형님.”
얼른 앞으로 다가와 선 사내를 보며 그는 마당에 세워 둔 승용차 트렁크에서 방금 꺼내 온 보스톤 백을 내밀었다.
“약속한 돈이다. 받아라.”
“감사합니다, 형님.”
허리를 숙인 박창재는 두 손으로 가방을 건네받았다.
5만 원권 지폐로 가득 채워진 가방은 상당히 묵직했는데 한 사람당 5천만 원씩 해서 모두 2억이었다.
“난 서울에 올라가 봐야 될 것 같으니까 늙은이를 잘 데리고 있어.”
그러자 돈을 받고 희희낙락하던 박창재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봤다.
“일이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박형윤이 갇혀 있는 방을 힐끗 쳐다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직 받아 낼 것이 더 남았어. 마무리가 되면 수고비를 또 챙겨 줄 테니까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돈을 더 준다니 불만을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해.”
“염려 마십시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차민성 과장은 상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밖으로 나가 승용차에 올라탔다.
“늙은이가 가진 재산이 얼만데 고작 이것만 챙기고 끝낼 수는 없지.”
납치를 한 이상 김인철 몰래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빨아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챙길 작정이었다.
엔진 시동을 건 차민성 과장은 곧바로 버려진 농가를 나와 서울로 향했다.
한편 혁권은 논현동에 위치한 저택 서재 소파에 앉아 위성 전화기로 리야드에 머물고 있는 함단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수송기가 도착해 현궁 대전차 미사일이 들어 있는 40피트 컨테이너 두 개를 사우디아라비아군에 인도했습니다.
“그럼 이제 항공 수송은 다 끝난 건가?”
-그렇습니다. 배에 실은 M270 MLRS용 확산탄만 도착하면 납품이 모두 마무리됩니다.
“어디까지 갔다고 그랬지?”
-오전에 스리랑카 인근 해역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했으니까 사흘 뒤에는 제다Jeddah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홍해와 접한 제다는 인구 350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상업 항구도시였다.
수도인 리야드하고 더 가까운 곳에 담맘Dammam이라는 항구가 있었지만, 그리로 가려면 좁은 페르시아만을 거쳐야 되는데, 적대국인 이란이 자칫 화물선을 나포할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우회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경비와 시간이 들더라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긴장을 풀지 말고, 사고가 나지 않게 마지막까지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로 목을 가볍게 축이는 동안 함단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조만간 사우디아라비아군에서 추가 주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납품도 다 안 끝났는데 무슨 소리야?”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함단이 이유를 설명해줬다.
-가져다주는 족족 전투기에 장착해서 예멘으로 날아가 폭격을 해 대고 있다 보니까 재고가 쌓일 틈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 정도로 소모율이 높다는 말이야?”
-리야드를 향한 탄도미사일 공격 이후로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20소티Sortie 이상 F-15S 전폭기를 출격시켜 폭격을 단행하고 있다 합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정말 단단히 화가 났나 보군.”
소티는 전투기 1대가 1회 출격하는 것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였다.
함단의 말대로라면 매일 스무 대가 넘는 전폭기가 예멘 상공으로 날아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두 발씩만 장착했다고 쳐도 하루에 한화 40억 원이 넘는 거액이 꼬박꼬박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는 거였다.
전쟁은 돈으로 한다는 말을 사우디아라비아가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폭탄을 쏟아붓고 있으니 재고가 남아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
-이번에 알게 된 공군 장교가 귀띔해 준 정보가 맞으면 저희가 가져다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발주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동의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지상전이 다시 재개되면 폭탄이 더욱 많이 필요한 데다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언제 공급이 끊길지 모르니까, 그 전에 미리 충분한 물량을 비축해 두려는 거겠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물량이 2배만 된다고 해도 주문 액수가 4억 달러는 가볍게 넘어가겠군.”
액수도 컸지만 사실상 GPS유도폭탄을 수입할 곳이 한국 하나뿐인 상황에서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가 전시 비축탄까지 먼저 반출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방산 수출을 밀어주고 있었기에 더욱 상황이 좋았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혁권은 손에 든 위성 전화기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그거 우리가 잡도록 하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우선 물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고 언제 발주가 이루어질 계획인지부터 알아내도록 해.”
-정보를 빼내려면 군 인사들한테 돈을 좀 뿌려야 될 겁니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대신 소문이 나면 딴 놈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 괜히 눈독을 들이지 못하도록 미리 결재 라인에 있는 인사들을 우리 편으로 확실하게 포섭해 놔.”
-제가 잘하는 일 아닙니까. 맡겨 놓으십시오.
“변동 사항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옛.
통화를 끝낸 혁권은 어떻게 물량을 따낼지 생각하면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가 어느새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는 걸 확인하곤 다시 내려놨다.
사람을 불러 커피를 다시 가져오도록 시키려고 할 때 노크를 하며 하킴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