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84
884
널찍한 원목 책상 앞에 앉아 각 행정부처에서 올라온 결재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대통령은 노크와 함께 오천구 비서실장이 들어오는 걸 보고 몸을 뒤로 기댔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잘 왔군.”
“그러셨습니까.”
“오늘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봤나.”
“……예.”
업무를 볼 때 쓰는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는 언짢은 얼굴로 오천구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지지율이 지난달보다 4%나 빠졌더군.”
“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아무래도 최근 경제 상황이 어렵다 보니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래 가지고 곧 있을 총선에서 이길 수 있겠어.”
대통령이 여론조사 결과가 적힌 서류를 손바닥으로 탕탕 내려치면서 역정을 냈다.
“추경 예산 집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다음 분기에 나아진 경제 지표가 발표되면 하락을 멈추고 다시 반등할 수 있을 겁니다.”
“쯧. 다들 제대로 하라고 그래! 총선에서 져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 그날로 레임덕이 와서 남은 임기 동안 식물 정부로 전락하고 마는 거야!”
목청을 높이는 대통령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허수아비처럼 그저 자리만 지키다가 퇴임을 하긴 싫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 빠른 감이 있었으나 청와대를 떠난 이후도 대비를 해야 됐다.
지금처럼 대통령과 여당 지지도가 계속 하락한다면 총선은 물론이고 몇 년 뒤에 치러질 대선까지 놓칠지 몰랐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명예로운 은퇴는 고사하고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들처럼 정치 보복의 타깃이 되어 여생을 차가운 교도소 감방에서 보내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기에 더욱 현재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천구 비서실장은 그런 대통령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각하께 한 가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봐.”
“실은 어제 시내 모처에서 김혁권 사장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특사로 임명해서 사우디아라비아 일을 해결하게 했던 그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뿐일 뿐 이후로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특사 일을 잘 처리했다고 말해 주는 자리였는데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습니다.”
“뭐라고 했기에 그래.”
“300억을 정치 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대통령은 이내 허리를 바로 세우며 믿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300억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각하.”
“그 많은 돈을 김혁권 그자가 내겠다고?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하고 무기 거래를 하면서 이윤이 많이 남았나?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럴 이유가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대통령이 머리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오천구 비서실장이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태일그룹의 장남인 김성균 사장이 내는 돈입니다.”
대통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 봐.”
“김종원 회장이 쓰러진 이후로 태일그룹을 두고 두 아들 간에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만큼 김종원 회장과 인연이 있었던 대통령은 절로 입에서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호부 밑에 견자가 없다고 했는데 옛말이 다 맞는 건 아닌 것 같아. 제 아비가 펄펄 날아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둘 다 못 미치는데, 그리 물어뜯고 싸우니 원. 차라리 의식이 없는 게 다행일 수도 있겠어.”
“얼마 전에 현재 그룹 부회장직에 막내아들이 큰 사고를 친 일이 있습니다.”
“태일증권 건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경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일이었기에 대통령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하고 관련해서 김 부회장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나보고 형제간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들라는 거야?”
“태일그룹이 계속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휘청거린다면 경제 상황을 끌어 올리려는 정부 정책에도 큰 악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거 영 내키지가 않는군.”
떨떠름한 반응에 오천구 비서실장이 적극적으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라도 오너 리스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일 그룹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억지로 힘을 실어 주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정유사 경영권을 손에 넣으면서 장남한테로 저울추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천구 비서실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그룹을 계승하게 되면 꾸준히 정치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퇴임 이후를 걱정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비자금이 충분히 확보된다면 자신의 계파 정치인들을 계속 손안에 넣고 주무르면서 방어막으로 써먹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청와대를 나가더라도 막후에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한참 동안 고심을 한 대통령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김 부회장을 검찰 조사를 받게 하는 데 혐의는 충분한 건가?”
오천구 비서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알아본 결과 직접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정황상 이번 사건을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소환 조사를 벌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균형추가 장남인 김성균 사장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데다가 이번에 도움을 준다면 두고두고 태일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실탄이 넉넉하게 확보된다면 총선에서 각하를 따르는 계파 인사들을 적극 밀어줘서 당내에 주도권을 더욱 확실히 쥐고 갈 수 있게 될 겁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대통령은 한쪽 손을 들어서 아침에 매끈하게 면도를 한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을 했다.
대선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총선이 시작되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막대한 선거자금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현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와 함께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대선까지 이어지는 기세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는 큰 변곡점이 될 수 있었기에 양쪽 다 피 튀기는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법으로 정해진 선거 비용이 있었으나 유세가 가열되다 보면 그걸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통령으로서 중립을 지켜야 했지만 당내에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선거에 나서는 계파 의원들을 지원해 줘야 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뒤를 밀어줄 수는 없어 고민이 많았는데, 거액의 정치 자금이 들어온다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됐다.
망설이던 대통령은 계속된 설득에 결정을 내렸다.
“좋아. 자네 말대로 경제도 어려운데 태일그룹 같은 대기업이 흔들리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지. 검찰에 법대로 수사를 진행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야당이나 언론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지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주변 단속을 철저히 하고.”
“조심해서 움직일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각별히 신뢰하는 측근이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인 대통령은 알아서 잘하리라 믿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집무실을 나온 오천구 비서실장은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본관 뒤편에 위치한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왕산의 가파른 바위 절벽이 멋들어진 풍경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이제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산책로 양옆으로 봄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한창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라서 그런지 주위에 오천구 비서실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그는 엄지로 액정을 쓸어 올리며 주소록을 쭉 넘기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쯤 반복되었을 때, 전화가 연결되면서 상대편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귀에 들렸다.
-여보세요.
“피 부장, 나 오천구요.”
-아이고. 선배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그가 연락을 취한 피우영은 서울지검 부장검사로 오천구 비서실장하고는 같은 대학 동문으로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오천구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측근으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정권 실세였고, 피우영 부장검사 역시 향후 유력한 검찰 총장 후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엘리트 검사였는데, 서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우면서 상부상조를 해 오고 있었다.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뭔지 말씀해 보십시오.
“이번에 터진 태일증권 배임 횡령 사건을 그쪽에서 맡고 있지?”
-예. 맞습니다.
“소환이 예정된 피의자 중에 김인철 부회장도 포함되어 있나?”
-글쎄요. 제가 직접 맡은 사건이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씀은 못 드리지만, 관례대로 한다면 태일증권 사장 정도까지만 불러들일 겁니다.
그럴 걸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에 오천구 비서실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사건을 좀 더 키웠으면 좋겠네.”
-예?
“서민들이 아끼고 아껴서 납입한 펀드 자금을 가지고 자기들 경영권 방어에 마음대로 끌어다 쓴 악질적인 범죄 행위인데 꼬리 자르기 식으로 임원 몇 명만 달랑 불러 조사를 한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나?”
-그럼…….
“김 부회장까지 소환을 해야지 국민들이 어느 정도 납득하지 않겠나. 솔직히 이런 일을 계열사 사장이 단독으로 결정해서 실행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걸세.”
-김 부회장을 말씀입니까?
놀란 반응에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조사를 받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국민들한테 이번 정부는 재벌이라고 해서 범죄 행위에 성역이란 없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거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네.”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롭고 국민들을 위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는데, 구구절절 핑계를 늘어놓지만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연차도 어느 정도 찼으니까 이제 차장검사로 승진할 때가 됐지. 이번 승진 때 내가 신경을 써 줄 테니까 이야기한 대로 해 주게.”
솔깃한 제안에 피우영 부장검사는 마음이 흔들렸다.
재벌을 건드리는 것이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힘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고는 해도 청와대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통령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오천구 비서실장한테 찍히면 당장 내일이라도 지방으로 발령이 나 한직을 떠돌다가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해야 될 터였다.
그냥 이야기를 해도 군말 없이 들어야 할 판에 승진까지 약속을 해 준다니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를 하도록 하죠.
“고마워.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지.”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통화를 끝낸 오천구 비서실장은 원하던 대로 일이 해결되자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