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0
890
혁권이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자 앞에 타고 있던 하킴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로 돌리면서 말했다.
“예상대로 현금 트럭에 꼬리가 붙었습니다.”
“문명균이 다른 꼼수를 부리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지.”
행운의 상징처럼 항상 가지고 다니는 담배 케이스를 꺼낸 혁권은 가지런히 들어 있는 담배 가운데 한 개비를 빼서 입에 물었다.
“어느 쪽 놈들인지 정체는 파악됐어?”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고 합니다. 번호판을 조회해 봐도 대포차로 나오고 말입니다.”
살짝 입맛을 다신 그는 이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배후가 누군지 알 수 있겠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고 따라가.”
“예.”
하킴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임영식과 눈을 맞추고는 턱짓을 하자 바로 엔진 시동을 걸고 SUV를 출발시켰다.
그러자 부하들을 태운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두 대가 바로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혁권은 담배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살짝 내린 차창을 바라봤다.
이제 제법 날이 길어져서 아직 해가 떠 있는 가운데 금빛 노을이 우뚝 속아 있는 고층 건물들 사이로 쏟아졌다.
멀리 상암 월드컵 경기장과 바로 앞에 넓은 한강 둔치 난지 하늘 공원은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서울에서 나오는 온갖 쓰레기들을 파묻은 매립지였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생활 폐기물 소각 시설 양옆으로 펼쳐진 잔디와 키가 큰 나무들은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마치 멀리 교외로 나온 듯한 느낌을 줬다.
상당히 넓은 주차장은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인적이 거의 없는 가운데 가로등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승용차 세 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차민성 과장이 담배를 입에 물고 서 있었다.
“이놈의 미세먼지는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군.”
도시를 뒤덮은 뿌연 미세먼지가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드니 마치 사막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파란 하늘을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는 투로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박창재 역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바깥에만 나서면 눈은 뻑뻑하지, 목도 칼칼하지, 아주 살 수가 없다니까요.”
“이딴 공기 마시며 사는 것도 얼마 안 남았어.”
차민성 과장은 훗, 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 거래만 잘 끝내면 남태평양의 멋진 섬에서 미녀를 옆에 끼고 백사장에 누워서 마티니를 마시며 남은 인생을 즐기는 거야. 당연히 미세먼지 따위는 볼 수도 없을 테고.”
“그거 좋은데요.”
“부하들한테 무기는 다 나눠 줬지.”
“예. 예전에는 사시미를 들고 움직였는데 러시아 애들이 덕분에 이런 걸 다 만져 봅니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박창재가 윗도리를 살짝 들추자 허리에 시커먼 권총이 하나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는 떼떼(TT) 권총이라고도 불렸던 러시아제 토카레프(Tokarev)였는데 2차대전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만 정이 만들어져서 세계 곳곳에 뿌려진 무기였다.
그러다 보니 군대 밖으로 흘러나와 어둠의 세계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에서는 야쿠자들의 총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박창재가 가지고 있는 권총 역시 러시아 선원들이 부산항을 통해 몰래 밀반입한 거였는데, 모두 다섯 정을 구해 하나씩 소지하도록 했다.
물론 차민성 과장 역시 품속에 하나를 숨겨 두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저런 것도 준비했습니다.”
박창재가 한쪽 팔을 들어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짧게 자른 덩치 두 명이 사냥용 산탄총을 꺼내 놓고 탄환을 장전시키고 있었다.
“잘했어.”
총이 하나도 아니고 일곱 자루나 되니 이번 거래를 원하는 대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현금을 손에 넣으면 곧장 인천으로 가서 미리 구해 둔 밀항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원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돈을 은닉해 놨다가 김인철이 영 가망이 없어 보이면, 관리하고 있는 다른 비자금까지 몽땅 다 챙겨서 외국으로 도피할 작정이었지만, 얼마 전에 자신까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조사를 받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교도소에 갇혀 세월을 보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짭새들은 안 붙었다고 했지?”
“뒤에서 감시하고 있는 애들 말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군.”
“영감탱이가 저희 손에 있는 이상 딴짓은 못할 겁니다.”
“그래야지.”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박창재가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시선을 들자 멀리 차량 여러 대가 진입로를 따라 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빛을 번득인 차민성 과장은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구둣발로 비벼서 끄며 차갑게 말했다.
“드디어 왔군. 다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해.”
“옛.”
박창재가 손짓을 하자 산탄총을 든 부하 두 명이 서둘러 한쪽에 세워져 있는 간이 화장실 뒤로 몸을 숨겼다.
차민성 과장도 품속에서 토카레프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는 슬라이드를 뒤로 당겨, 철컥 소리를 내며 총알을 장전시켰다.
그러고는 허리 뒤춤에 권총을 꽂아 넣고는 윗도리로 가렸다.
그사이 차량이 입구를 지나 야외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산 승용차 세대에 1톤짜리 흰색 탑차였다.
탑차 화물칸에 현금이 잔뜩 실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쳐다보던 차민성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얼마 안 있어 천천히 속도를 줄인 상대편 차량들이 거리를 약간 두고 차례대로 멈추어 선 뒤 건장한 사내들이 내렸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문명균이 김귀근과 함께 앞으로 나오자 차민성 과장이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시간을 딱 맞춰서 왔군.”
유들유들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문명균이 뚫어 버릴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몇 번은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터였다.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본 문명균은 얼굴을 굳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네놈 짓이었군.”
“그러게 진즉에 곱게 이야기를 했을 때 지분을 팔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는 모습에 문명균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지금은 박형윤을 무사히 구해 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사장님은 왜 안 보이는 거지?”
“데리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
문명균은 미간에 힘을 줘 찡그린 상태로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 내뱉는 듯이 말했다.
“사장님을 실제로 보여 줄 때까지 돈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맨손으로 덤벼드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 놔두지 않을 각오였다.
잠시 눈싸움을 벌인 차민성 과장은 짧게 혀를 차곤 알겠다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뒤편에 서 있는 박창재를 보며 말했다.
“영감을 데려와.”
“예.”
박창재가 손짓을 하자 부하들이 손을 뒤로 묶어 승용차 뒷좌석에 가둬 놓은 박형윤을 양쪽에서 붙잡은 채 끌고 왔다.
몰라볼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에 문명균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사장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형윤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네 왔구먼.”
꺼져갈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달려가려는 문명균을 차민성 과장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원하는 대로 영감을 보여 줬으니 이제 그쪽 차례야.”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상대를 쏘아본 문명균은 이내 옆에 있는 김귀근에게 지시를 내렸다.
“트럭을 보여 줘.”
“옛.”
엔진 소리를 내며 차체를 뒤로 돌린 탑차가 화물칸을 보이면서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덜컹.
자물쇠를 풀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양쪽으로 열자 비닐에 싸인 채 빽빽하게 들어찬 현금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차민성 과장의 눈에 순식간에 탐욕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멋진 광경이군.”
“정확히 100억이다. 원하는 대로 전부 5만 원권으로 준비했으니 확인해 봐라.”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서로 믿고 거래를 해야 되지 않겠어.”
그러자 문명균이 곧장 같잖다는 것처럼 코웃음을 흘리며 삐딱한 자세로 섰다.
“돈을 옮겨 실을 거냐, 아님 트럭째 끌고 갈 거냐?”
“번거롭게 두 번 일을 할 필요 없이 이대로 가져가면 될 것 같군.”
“마음대로 해.”
퉁명스럽게 내뱉은 문명균이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박형윤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돈도 확인했으니 사장님을 넘겨주지.”
“아니, 그 전에 트럭 열쇠부터.”
이미 그의 온 신경은 박형윤에게로 향해 있었고, 조금이라도 몸이 휘청거리면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릴 정도였다.
“그쪽을 어떻게 믿고?”
“그럼 나는 뭘 믿고 먼저 인질을 넘겨주지. 이봐, 원하는 대로 노인네를 보여 줬잖아. 그러면 이번에는 내 요구를 들어줄 차례지 않겠어.”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거지만 목숨은 하나뿐이니 무엇이 더 소중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명균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주머니에서 트럭 열쇠를 꺼내 던졌다.
열쇠를 받고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차민성 과장이 팔을 들어 손짓하자 부하들이 박형윤을 거의 질질 끌 듯하면서 두 사람 앞으로 데려왔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박형윤을 덥석 끌어안은 문명균은 놀랄 정도로 살이 빠진 몸에 새삼 이를 갈았다.
“자네 덕분에 살았군.”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어서 사장님을 차로 모셔.”
“예.”
사내 둘이 얼른 다가와 박형윤을 부축해서 데려가자 문명균이 차민성 과장을 똑바로 노려봤다.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진 가운데 문명균의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러고는 정색을 한 채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다음에 또 만날 때는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글쎄,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군.”
“흥.”
짧게 콧방귀를 뀐 문명균은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발을 몇 걸음 옮겼을까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그 자리에 멈춰 뒤를 돌아보자 차민성 과장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보내면 많이 찝찝할 것 같단 말이야.”
“……!”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그는 굳은 얼굴로 상대를 쳐다봤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건 사양이거든 그러니까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을 내는 것이 좋겠어.”
눈썹을 치켜 올린 문명균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과 동시에 상대편 부하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들었다.
“꼼짝 마!”
“이런 쌍!”
이쪽도 숨겨 온 사시미를 꺼내 들었지만 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거기다가 간이 화장실에 숨어 있던 덩치 두 명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 산탄총을 겨누자 퇴로까지 막혀 버렸다.
“벌집이 되기 싫으면 괜한 저항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영감을 넘겨준다고 했지 그 뒤에 곱게 보내 주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비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자 문명균이 상대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을 내뱉었다.
“양아치 같은 놈, 이럴 줄 알았어.”
“…….”
놀란 것도 잠시 가라앉은 두 눈으로 그를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에 차민성 과장은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총성이 정적을 깨고 밤하늘 가득 울렸다.
타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