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89
889
그날 저녁, 강남 모처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한 혁권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리며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올 때가 됐군.”
예약해 둔 일식당은 15층에 있었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일행이 도착하면 별실로 안내해 달라고 한 뒤 녹차로 살짝 입을 축이고 있으니 곧 직원이 문명균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먼저 건넨 인사에 문명균이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맞잡고 악수를 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쪼개어 외출까지 하게 만든 혁권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일단 문명균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서 앉자 직원이 메뉴판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문명균은 메뉴판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가장자리 쪽으로 밀어 두고는 딱딱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바로 용건부터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노골적으로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는 태도였지만 혁권은 딱히 불쾌한 티를 내지 않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볍게 마실 차만 가져다주시오.”
“예.”
직원이 나간 뒤 곧바로 향긋한 향을 풍기는 따뜻한 차가 놓여졌다.
찻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신 혁권은 맞은편 앉아 있는 문명균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택으로 직접 찾아간다고 해도 거절하시는 걸 보면 박 사장님께서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문명균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갑자기 심한 감기에 걸리셔서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몸이 안 좋은게 아니라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요?”
“······!”
가볍게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상대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황하는 모습에 그는 내심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신하면서 말을 이었다.
“대충 상황을 알고 있으니 감출 필요 없소.”
“······.”
“듣자 하니 깔아 둔 채권을 급히 회수하고 있다던데, 몸값을 마련하려고 그러는 거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상대는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쪽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날을 바짝 세우며 말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럼 아닙니까?”
“태일산업 지분이 엮여 있는 이상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납치범을 붙잡고 박형윤 사장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고맙지만 저희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딱 잘라 거절했지만 혁권 역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지 않소.”
“섣불리 도움을 받았다가 일을 아예 망쳐 버리는 것보단 낫겠지요.”
“고집이 세시구먼.”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댄 채 잠시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본 혁권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몸값을 주면 놈들이 순순히 박 사장을 풀어줄 것 같소.”
“······.”
“십중팔구 돈만 챙기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들 거요.”
증거를 없애는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은 얼굴을 아는 박형윤을 죽여 버리는 거였다.
문명균 역시 그 점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 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노출이 된 그쪽하고 달리 난 놈들이 모르니 뒤에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소.”
입을 굳게 다문 문명균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경계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강제적으로 넘어간 지분에 대해 선캐피탈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고 이왕이면 김성균 사장을 지지해 줬으면 좋겠소.”
“그것뿐입니까?”
“그렇소.”
충분히 수용 가능한 조건에 문명균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장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면 당연히 되찾아야 될 것이니 그리하도록 하지요.”
“잘 생각했소.”
“대신 미리 말해 두지만 일을 주도하는 건 저희 쪽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설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물론이오.”
혁권은 웃음을 띤 얼굴로 순순히 대답을 했다.
며칠 뒤, 영등포 대국은행 본점.
칠층 VIP 상담실에 문명균이 본점 지점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액수가 커서 현금으로 전부 마련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송금을 하거나 수표로 끊어 드리면 편하겠지만, 고객님이 원하시는 건데 당연히 거기에 맞춰 드려야지요.”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은 지점장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한꺼번에 많은 액수를 인출하셔서 묻는 말입니다만 혹시 거래 은행을 옮기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수천억대 자금을 움직이는 VVIP 고객이었으니 만에 하나 거래처를 바꾼다면 은행으로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지점장한테도 인사고가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었기에 내심 눈치를 보며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사업상 쓸 곳이 있어서 인출하는 것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얼굴을 활짝 편 지점장은 서류를 문명균한테 내밀면서 말했다.
“원래는 박 사장님께서 직접 오셔야 되지만 지금까지 저희하고 거래해 오신 것이 있으니 대리 인출을 해 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증거 서류가 필요하니 여기 서명을 한 번만 해 주십시오.”
건네받은 인출 확인서를 대충 살펴보고는 바로 한쪽에 놓인 펜을 들어 서명했다.
“이제 다 됐습니다.”
서류를 챙긴 지점장은 소매를 걷어서 손목에 찬 금장 롤렉스시계를 확인하곤 문명균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돈이 거의 운송 트럭에 실렸을 텐데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머리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난 문명균은 지점장을 따라 VIP 상담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금고실이 있는 지하층으로 곧장 내려갔다.
외부인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된 지하층에는 은행 경비와 직원 들이 금고에서 막 꺼내와 비닐도 뜯지 않은 5만 원권 뭉치들을 1톤 탑차 화물칸에 차곡차곡 옮겨 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건장한 덩치의 사내가 문명균한테 다가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사내의 이름은 김귀근으로 박형윤 사장 밑에서 힘쓰는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지?”
“예. 액수를 전부 다 확인하고 금고에서 가져 나왔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문명균이 탑차를 쳐다보자 은행 직원 외에 체격이 좋은 사내 일곱 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모두 김귀근이 데려온 인원들이었다.
“액수가 큰데 경찰서에 호송을 요청해 드릴까요?”
지점장의 말에 문명균이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거절했다.
“따로 인원을 데려왔으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힐끗 김귀근과 부하들을 쳐다본 지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그때 은행 직원 한명이 한쪽 손에 서류철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트럭에 현금을 다 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 보시겠습니까.”
작게 머리를 끄덕인 문명균은 지점장과 함께 탑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활짝 문이 열려진 화물칸 안에는 5만 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열 개짜리 다발이 비닐을 써서 한 덩어리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한 묶음에 5천만 원씩이었다.
이런 현금 뭉치 200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다 맞는 것 같군요.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이렇게 처리해 줘서 고맙습니다.”
“저희 은행 VVIP이신데 당연히 편의를 봐 드려야지요.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러죠. 그럼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은행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승용차에 올라탄 그는 잠시 뒤 현금이 실린 탑차와 함께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밝은 햇살에 눈가를 살짝 찌푸린 문명균은 앞서 가는 탑차를 쳐다보며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저장된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돈은 준비됐소?
“그 전에 사장님이 무사하신 것부터 확인하고 싶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실물을 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사진만 보고 덥석 거금을 가져갈 수는 없지. 신문 날짜야 얼마든지 컴퓨터로 조작할 수 있는데.”
-신중하시군.
제 주인을 지키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주 우스운 듯 작은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명균이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있자, 곧 상대편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자리를 떠나는 듯 부스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2~3분 정도 기다렸을까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리는 미약한 신음성에 문명균이 허리를 바짝 곧추세웠다.
-으음. 자넨가.
“사장님!”
잔뜩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힘 빠진 목소리였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금방 구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마트폰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로 다급히 말하는 그에게 박형윤이 미안하다며 말했다.
-자네에겐 면목이 없어.
만약 눈앞에 박형윤이 있었다면 분명 고개를 푹 떨군 초라한 모습일 것이었다.
항상 대쪽같이 곧던 사람이 이렇게 꺾여 버린 것에 문명균은 슬픔보다 분노를 먼저 느꼈다.
“아닙니다. 저한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때 차민성 과장이 다시 전화를 빼앗아 들곤 말했다.
-아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이군. 자 이제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겠지?
문명균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을 내뱉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말해.”
-지금부터 1시간 뒤에 난지 노을 공원 입구 광장으로 오시오. 물론 다른 짓을 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러지.”
-그럼 조금 있다가 봅시다.
통화를 끝낸 문명균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귀근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놈입니까?”
“그래.”
문명균은 눈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난지 노을 공원 입구 광장까지 1시간 안에 가야 되니까 서두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한 김귀근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로 다른 차량에 탑승해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그걸 지켜보던 문명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고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이 혁권이 전화를 받았다.
-연락이 왔소?
“1시간 뒤에 난지 노을 공원 입구 광장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적당히 인적이 없고 바로 강변북로를 타고 서울 외곽 순환고속도로로 빠질 수 있으니 거래를 하기 딱 좋은 장소군.
“사장님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알고 있소.
전화를 끊고 나니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뒷목이 나무판자처럼 빳빳하게 굳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문명균은 한숨을 내쉬며 가죽 시트에 무거운 몸을 푹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