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2
892
다음 날 아침.
김인철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부속실에 있던 비서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작게 소곤거리던 목소리도, 복사용지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던 이들도 일순간에 행동을 멈춘 채 마치 왕이 행차한 것처럼 김인철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야 했다.
거친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비서실 직원들은 오늘도 기분이 별로인가 보군, 하고 자기네들끼리 시선을 마주쳤다.
요 근래 연이어 닥친 악재에 김인철의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가장 가까운 데서 함께 있어야 되는 비서실 직원들 역시 일하기가 죽을 맛이었다.
하기야 그의 곁에서 일하는 게 딱히 좋았던 적도 없었지만 최근엔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 같으니 견디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부회장실로 들어간 김인철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는 수입 원목으로 만들어진 넓은 책상 앞에 앉았다.
따라 들어온 여비서가 재빨리 그의 코트를 받아 들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두는 동안, 차민성 과장 바로 아래의 선임 격인 남자 비서가 오늘 봐야 할 결재 서류를 들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뭐야?”
시비를 거는 것처럼 툭 내뱉은 말에 비서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네?”
영문을 몰라 딱딱하게 굳은 남자 비서가 조심스레 되물으니 김인철이 손가락으로 결재 서류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왜 차 과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걸 들고 오냔 말이야.”
“아, 과장님께선 아직 출근을 안 하셨······.”
“뭐가 어쩌고 어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인철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새끼가 정신을 어디 갖다 팔았나?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출근을 안 해?”
게다가 상사인 자기보다도 더 늦다는 사실이 가뜩이나 저기압이던 김인철의 신경을 건드려서 짜증을 급격히 끌어 올렸다.
“연락은 해 봤어?”
“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봤습니다만,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 비서실도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아주 간이 배 밖에 나왔군그래. 설마 어디서 술이라도 처먹고 늘어지게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태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이상함을 느낄 법도 했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김인철은 신경질적으로 결재 서류를 허공에 팍 던지면서 소리쳤다.
“차 과장한테 연락해서 당장 튀어 나오라고 해!”
사방에 흩어진 하얀 종이들을 황급히 끌어 모으며 비서가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든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어.”
애써 짜증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발신번호 제한 표시가 떠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좁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대학동창이자 스폰 관계인 전병주 검사의 목소리에 김인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연락을 안 할 거라더니 어쩐 일이야?”
-이봐,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정말 그런가 보네. 이렇게 정보가 느려서야 어쩌려고 그래.
“······.”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김인철이 정색을 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 봐.”
-박형윤이라고 알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전 검이 그자를 어떻게 아는 거야?”
-그자를 납치 협박해서 태일산업 지분을 가로챘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충격에 그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움켜쥐면서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차민성이 다 실토를 했어.
“뭐······.”
-지금 대검 특수부에 들어와 있는데 네 지시를 받아서 박형윤을 납치하고 협박을 가해 태일산업 지분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진술을 한 모양이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인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미친 새끼!”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아니고 가뜩이나 상황이 안 좋은 판에 핵폭탄이 터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붙잡혔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모자랄 텐데, 나불나불 일을 모두 실토하다니 눈앞에 차민성이 있었다면 갈기갈기 찢어 놨을 터였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야.
“······.”
-그러지 않아도 재판이 걸려 있는 데다가 태일증권 사건에 이번 일까지 불거진다면 구속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구치소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이야?”
황급히 되묻는 말에 전병주 검사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경제 범죄였지만 이건 납치에 협박 그리고 갈취 사건이잖아. 거기다가 확실한 증거까지 있고 말이야.
“끄으응.”
-더군다나 박형윤을 데리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가 거래 현장에서 체포됐다고 하니까 현행범이기까지 하잖아. 이러면 꼼짝 못하는 거지.
눈썹을 치켜 올린 김인철이 스마트폰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몸값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몰랐던 거야? 하긴 나도 이미 지분을 가졌는데 돈 몇 푼에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의아하기는 했어.
“설마? 차민성 이놈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관여를 했든 안 했든 차민성이 네 지시를 받아서 움직였다고 진술을 한 것이 중요해. 아마 어떻게든 너한테 죄를 떠넘겨서 형량을 줄이려는 거겠지.
“제기랄!”
저절로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최측근 심복한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으니 더욱 배신감이 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가운데 전병주 검사의 말이 이어졌다.
-이르면 오늘 오후라도 검찰 수사관이 구속 영장을 가지고 찾아 갈지도 모르니까 미리 대비를 해두도록 해.
구속영장이라는 말에 김인철의 얼굴이 오래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튼 그리 알고, 오래 통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이만 전화 끊을게.
그러면서 뚝 끊긴 스마트폰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김인철인 이내 거칠게 팔을 휘둘러 바닥에 내던졌다.
“이런 쌍!”
콰직.
그러고서도 제 분에 못 이겨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양손으로 다 쓸어버렸다.
두꺼운 문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지자 비서실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달려들어 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완전히 엉망이 된 사무실 한가운데에 김인철이 어깨를 씨근덕거리며 서 있었다.
“부, 부회장님.”
“다 나가 있어!”
“예. 옛.”
날 선 외침에 비서실 직원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자신들한테 튀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
분명 흔적을 남기지 말고 박형윤을 처리하라고 했는데, 몰래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망친 것도 부족해서 자신의 발목까지 잡다니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차민성을 잡아 와서 직접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 붙잡혀 있다니 그럴 수는 없었고 일단 지금 급한 건 이번 일을 어떻게 넘기느냐는 거였다.
김인철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얼굴로 부회장실 안을 서성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의 짧은 법률 지식으로 생각을 해 봐도 제아무리 거액을 주고 대형 로펌에 변호를 의뢰하고 전관예우를 받는 거물급 변호사들을 한가득 내세운다고 해도 이번 사건은 구속을 면하기 어려워 보였다.
곧 지주사인 태일산업 임시주주총회가 예정되어 있는 등 경영권 다툼이 절정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구속이라니, 그건 정말 최악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더 심각한 건 박형윤이 살아 돌아갔으니 이제 강제로 빼앗긴 태일산업 지분을 어떻게든 되찾고 그를 적대시할 거라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임시주주총회를 열어서 투표까지 해 보나 마나 자신이 패배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사면초가가 따로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들끓는 분노가 너무 거센 나머지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것만 같았다.
김인철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할 탈출구가 없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아무리 짜내어도 도저히 이렇다 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마치 누군가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팔 다리를 다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경영권을 빼앗기고 차가운 교도소 감방에 갇혀 수년을 썩으며 지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싸움에서 진다면 자신이 그랬듯이 그룹을 차지한 큰형이 그를 그냥 놔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하거나 밖에 나온다고 해도 온갖 위협에 시달려야 될지도 몰랐다.
너무나도 분하고 화가 났지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살고 봐야 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김인철은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방금 전에 자신이 부숴 버린 걸 깨닫고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소파 옆 협탁에 놓인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부회장님.
“지금 당장 그룹 전용기를 대기시켜.”
-예? 오후에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비롯해 일정이 많은데 그건 어쩌시고······.
“다 취소하면 되지, 뭐가 이렇게 말이 많아!”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인터폰을 받은 비서실 직원이 움찔하며 얼른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라고 할까요?
잠깐 고심을 한 김인철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 상해로 간다고 해.”
-알겠습니다.
검찰에서 출국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조치를 취하려고 할 테니 최대한 비행 시간이 짧은 곳으로 가야 했다.
일본은 치안이 좋은 데다가 한국하고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어서 애써 도망을 치더라도 현지에서 체포될 가능성이 컸다.
반면 중국은 넓은 국토와 수십억이 넘는 인구 때문에 치안망이 허술하고, 무엇보다 돈을 주고 완전히 신분을 바꾸고 다른 국가로 출국해 잠적할 수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은 이상 검찰에서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리기 전에 먼저 서둘러 서울을 떠야 했다.
물론 그 전에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나중을 위해서 개인금고에 숨겨 둔 비밀 장부와 그룹 비자금을 몽땅 다 챙겨 가야 했다.
둘 다 훗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재기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김인철은 다시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고는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김광범입니다.
본사 전무인 김광범은 그룹 비자금 관리를 맡고 있는 일종의 금고지기였다.
금융계 출신으로 수십 개의 계열사들을 통해 만들어진 비자금을 세탁하고 몰래 은닉할 뿐만 아니라 그룹에서 관리하는 정치인과 공무원 그리고 언론 쪽에 정기적으로 은밀하게 떡값을 뿌려 우호적인 인맥을 관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난데 지금 통화 가능한가.”
-아, 부회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 당장 빼낼 수 있는 비자금이 전부 얼마나 있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김광범이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한 건 확인을 해 봐야 되겠지만 대략 바로 꺼낼 수 있는 건 500억 원가량 될 겁니다.
김인철은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것밖에 안 돼?”
-경영권을 방어하느라 상당한 자금을 쏟아붓는 바람에 남아 있는 현금성 자산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삼300~400억 정도는 추가로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필요한데?”
-여기저기 깔아 둔 걸 꺼내, 문제가 생기지 않게 가져오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린다면 검찰에 체포돼 구치소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기에 아깝지만 남은 비자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됐으니까 당장 가능한 것들만 파나마에 있는 은행 비밀 계좌로 송금시키도록 해.”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그래. 1시간 안으로 다 끝내.”
-알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내려진 명령이라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김인철은 일부러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전화를 끊은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면서 천천히 내쉬었다.
이렇게 쫓기듯 급하게 떠나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언론과 검찰의 먹잇감이 되어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죄인처럼 다뤄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룹을 전부 손안에 두는 걸 바로 눈앞에 두고 이렇게 무너져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 분통해 김인철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