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25
925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지금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입맛을 다신 혁권은 소매를 걷어 왼쪽 팔에 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전용기는 대기시켜 놨지?”
“예.”
“그럼 이제 슬슬 가 볼까.”
몸을 일으킨 혁권이 저택을 나와 뒤편 정원으로 나가자 초록색 잔디밭에 중형 개인 헬리콥터 두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원들과 함께 조종사 뒷좌석에 탑승한 혁권은 익숙하게 한쪽에 놓인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다른 한 대에는 필요한 짐과 나머지 경호원들이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하셨으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헤드폰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에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머리를 끄덕이자,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쓴 조종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계기판 스위치를 눌러 엔진을 가동시켰다.
위이이잉.
엔진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기체에 달린 블레이드 로터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주위에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육중한 기체가 살짝 기우뚱하면서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곧 저택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내려다보였다.
충분히 고도를 올린 헬리콥터는 방향을 틀어 에메랄드빛 바다를 발아래에 두고 아테네 공항을 향해 날아갔다.
중동 쿠웨이트 상공.
난기류를 벗어났는지 벨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표시가 뜨자 혁권은 탁자에 올려 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다섯 장 정도 되는 서류에는 이번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다바그 왕자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한번 봤던 거였지만 그동안 일부 추가된 것도 있고 설득을 하려면 먼저 상대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기에 복습을 하듯 천천히 살펴봤다.
단순히 보여 주기식으로 군복무를 한 것이 아니라 다바그 왕자는 2차 걸프전에 전차 대대장으로 직접 참전해서 무공훈장까지 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함께 복무를 했던 이들이 지금은 다 별을 달고 군 요직에 있어 군부에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사업적으로도 꽤 재능이 있는지 석유나 정부 관련 일을 하는 특혜를 받아 부를 쌓아 올린 다른 왕족들하고 달리 호텔 체인과 국내외 부동산 투자로 큰 재산을 모았다.
실권을 쥐고 있는 빈 살만 왕세자하고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물론이고 왕실에서도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너무 툭 튀었다가 자칫 빈 살만 왕세자의 뜻을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었다.
능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위기를 살피며 물 밑에서 조용히 움직일 줄 아는 인물이 필요했는데, 여러 가지로 다바그 왕자가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문제는 상대가 제안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는데, 직접 만나서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음료수 한 잔 드릴까요?”
스튜어디스인 이벨라가 허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물었다.
때마침 입이 심심하던 차였으므로 혁권은 반사적으로 커피를 주문하려다 이내 건강에 좋지 않다 생각했는지 다른 메뉴를 골랐다.
“차가운 오렌지 주스 한 잔 부탁해요.”
“네. 금방 갖다드리겠습니다.”
잠깐 고개를 들었을 뿐, 혁권과 이벨라의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은 채 1초도 되지 않았다.
혁권은 평상시처럼 스튜어디스들에게 큰 관심 없이 적당히 예의를 갖춘 태도로 말하고 금방 서류로 눈을 내렸으므로, 그의 머리 위로 이벨라의 주저하는 듯한 시선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비행기 앞 쪽에 위치한 갤리로 돌아온 이벨라는 먼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커튼을 확 치고 컵과 얼음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잔에 따르는 동안 이벨라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어떡하지?
진짜 해야만 하는 걸까.
어릴 적 친구들끼리 가벼운 도둑질 정도는 한 적 있어도 진짜 사람에게 해가 갈 만한 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단순히 비싸고 예쁜 것들을 좋아할 뿐이지, 타고나길 대범하거나 범죄자 기질을 갖춘 것은 아니어서 막상 일을 저질러야 할 때가 오자 이벨라의 작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도 이벨라의 손은 익숙하게 움직여 단숨에 혁권한테 가져다줄 오렌지 주스가 쟁반에 놓였다.
이벨라가 슬쩍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을 살펴보니 혁권의 수행원들은 이쪽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설마하니 비행기 안에서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선 주머니 안에서 작은 파우더 케이스를 꺼냈다.
가볍게 뚜껑을 비틀어 케이스를 연 이벨라는 캡슐처럼 생긴 것을 집어 반으로 가른 다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오렌지 주스에 섞었다.
“이벨라, 뭐 하고 있어?”
“······!”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이벨라가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로시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얼굴이 창백한데.”
“서, 설마.”
이벨라는 가늘게 떨리는 입매를 황급히 손으로 가리고서 손거울을 찾는 척하며 파우더 케이스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새로 산 화장품을 발랐는데 색깔이 안 맞나 봐.”
“또 제일 밝은 색으로 골랐어? 그냥 자연스러운 걸로 사라니까.”
“그래도 흰 피부가 예뻐 보이잖아.”
이벨라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로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몰랐지만 다행스럽게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준 덕분에 크게 의심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주스를 주문하셔서 갖다 드려야 돼.”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피할 핑계를 찾은 이벨라는 서랍에서 하나씩 포장된 쿠키까지 꺼내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 옆에 나란히 세팅했다.
그러다 컵 옆에 명백히 주스가 아닌 투명한 액체가 반쯤 흘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벨라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이벨라는 로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종이 티슈를 뽑아 액체를 슥슥 닦고는 휴지통에 버려 버렸다.
“네가 갑자기 깜짝 놀라게 하니까 실수했잖아.”
일을 망쳤다는 생각에 절로 이벨라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미안, 하고 선선히 사과하는 로시를 뒤로하고 오렌지 주스가 놓인 쟁반을 들고 가는 동안 이벨라는 하마터면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
캡슐 한 개에 들어 있는 액체를 다 넣어야 된다고 그랬는데.
설마 고작 저 정도 흘렸다고 일이 잘못되진 않겠지.
이벨라는 속으로 계속 괜찮을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다독이고는 겉으로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혁권의 앞에 주스를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한창 서류를 읽고 있던 혁권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입으로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혹시 또 눈이 마주쳤으면 수상한 걸 들켰을지도 몰랐기에 이벨라는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그의 옆을 떠났다.
혁권은 손을 뻗어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곤 몸을 뒤척거린 뒤 태블릿 PC와 서류를 번갈아 보면서 업무를 계속했다.
그러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가슴 부근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 혁권이 불편한 표정으로 하킴을 부르려고 했을 때, 그의 몸이 갑자기 힘을 잃고 아래로 무너졌다.
“크윽······.”
“보스!”
혁권의 머리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탁자에 부딪힌 순간 그가 보고 있던 서류들도 바닥에 흩어졌다.
가장 가까이 있던 하킴이 급하게 달려와서 혁권의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킴은 크게 당황했고 황급히 주위로 몰려든 다른 수행원들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 숨이 안 쉬어져.”
한쪽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혁권의 모습에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하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는 크게 소리쳤다.
“구급세트를 가져오고! 당장 비행기를 착륙시켜. 어서!”
“예.”
다급한 외침에 정지택이 허둥지둥 조종실로 뛰어갔고 하킴은 그를 들어서 좌석에 반듯하게 눕히고는 조금이라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거칠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잠시 뒤 일행이 탑승한 비즈니스 제트기는 급히 항로를 변경해 쿠웨이트 시티에 비상착륙을 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혁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그대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됐다.
삐뽀삐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면서 멀어지는 구급차를 쳐다보며 비즈니스 제트기 밖으로 나와 있던 로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실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로시 옆에 이벨라도 나란히 서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딱딱하게 굳은 입매에선 음울한 기색이 느껴졌다.
삐익. 삐익.
병원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혁권은 규칙적으로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으음······.”
창문으로 내려쬐는 뜨거운 햇살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정신이 들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새하얀 천장과, 약 냄새였는데 몸이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트레드밀을 뛴 것처럼 피곤하고 축 늘어졌다.
“보스, 정신이 드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하킴과 백성균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병원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눈썹을 찡그린 혁권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는 걸 하킴이 황급히 만류하며 말했다.
“의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으니 그대로 누워 있으십시오.”
“괜찮아.”
고집을 부리며 억지로 자세를 바로 하자 하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쿠션을 가져와서 혁권이 편히 기대도록 등 뒤에 받쳐 줬다.
차츰 기억이 돌아온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 느꼈던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떠올리곤 낮게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리야드에 온 거야?”
“아닙니다.”
“그럼 어디야?”
“쿠웨이트 시티입니다.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키셔서 가장 가까운 공항에 비상착륙을 했습니다.”
“그랬군.”
어찌 된 건지 이해가 된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목이 마른 느낌에 몸을 뒤로 기대면서 말했다.
“갈증이 나는군.”
하킴이 얼른 유리병에서 물을 따라 두 손으로 건넸다.
“천천히 드셔야 합니다.”
목이 마르다고 급하게 삼켰다간 탈이 날지 모른다며 아마도 의사에게서 들었을 조언을 하킴이 그대로 읊었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컵에 든 물을 한 번에 다 마신 혁권은 빈 유리컵을 침대 머리맡 탁자에 내려놨다.
“병원에 얼마나 있었지?”
“하루가 채 안 됐습니다.”
“다행히 다바그 왕자하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기진 않았군.”
“몸도 안 좋으신데 자밀한테 연락해서 약속을 뒤로 미루고 조금 더 쉬시지요.”
하킴의 말에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안 그래도 제안에 부정적이라 어렵게 잡은 만남인데 그럴 수는 없지.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 검진을 받았을 때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심장마비가 온 거지?”
“의사 말로는 평소에 별다른 심장질환의 증상이 없고 건강 진단 때 찍은 심전도 결과가 정상인 사람도 갑자기 발병을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
아무리 운동을 하고 몸 관리를 해도 급작스럽게 심장마비가 찾아와서 자칫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혁권은 어딘가 허무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목숨은 의외로 끈질기지만 또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나도 손쉽게 꺾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체감한 기분이었다.
하킴은 혁권의 상태가 안정적인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일반적인 심장마비라고 하기엔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더군요.”
미간을 찌푸리며 하킴을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혈전이 생겨서 혈액의 흐름을 방해한 건 확실한데 갑자기 응고가 일어난 원인이 불분명하고 무엇보다 비정상적으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혈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
“그래서 외부 요인으로 인해 발병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외부 요인이라니.”
정색을 한 혁권이 눈썹을 추켜 올리면서 물었다.
“누군가 보스의 목숨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눈을 부릅뜬 채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이내 휘몰아치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날 암살하려고 했다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안 그래?”
“······그렇습니다.”
“말해 봐, 그게 뭔지.”
“혹시 하는 생각에 독성 검사를 해 봤는데 미량이지만 루시부파긴Lucibufagins이라는 성분이 체내에서 검출됐습니다.”
“루시부파긴이라고?”
“예. 개똥벌레에서 추출되는 스테로이드 혼합물의 일종인데, 일정 용량 이상을 복용할 경우 심장에 무리를 줘서 심근경색, 즉 심장마비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게 내 몸에서 나왔다는 거야?”
“예.”
대답을 들은 혁권은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것도 잊은 채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흉수가 누군지 샅샅이 조사해서 찾아내. 그리고 내 눈앞에 끌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