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4
94
-미술관이라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글쎄 건물 공사 규모만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그러더라고.
“지금 10억 달러라고 했어?”
말 그대로 억 소리가 나는 액수에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렇다니까. 우리 그룹에 있는 건설사도 그 공사에 참여하려고 벌써부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더라고 덕분에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지.
요즘 같은 불황에 그 정도 규모의 공사라면 웬만한 건설사들은 다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만수르가 관련 있는 건 맞는데,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국영 국제석유투자회사(IPIC)에서 만드는 거라 더라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IPIC는 만수르의 개인 회사가 아니라 국가 소유로 단순히 왕족인 그가 사장직을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럼 국가 프로젝트라는 뜻이군.”
-맞았어. 버즈두바이나 인공 섬 팜 쥬메이라처럼 원유와 가스가 고갈됐을 때를 대비해 아랍에미리트를 세계적인 관광과 금융 거점으로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될 거야.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 규모의 미술관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많은 미술품이 필요했다.
그것도 부유한 왕실의 눈과 수준에 맞추려면 웬만한 작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눈높이에 맞는 대가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미 유명한 미술관이나 부호들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카다피 대통령이 소유했던 명작들이 대거 경매에 나왔으니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유기백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너 정말 이쪽에 관련이 있는 거야?
“왜? 그렇다고 하면 자재라도 납품하려고.”
-그러면 말 그대로 대박이지. 덕분에 실적을 올려서 나도 이번 정기 인사 때 승진 좀 달아보자.
“미안하지만 헛다리짚었어.”
-쳇. 내가 그렇지, 뭐.
“아무튼 고맙다.”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그래.”
통화를 마친 혁권은 한쪽 팔을 들어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어제 펜트하우스에서 받았던 명함을 꺼내 들고 적혀 있는 번호대로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투박한 연결 음이 들리고 얼마 안 있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뜻밖에도 비서인 자드란이 아니라 만수르 본인이 직접 받자 살짝 당황하던 혁권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혁권입니다.”
-아! 김 사장.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소.
만수르가 반색을 하며 말하자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새로 만드는 미술관을 채우기 위해 카다피 컬렉션이 필요한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반길 이유는 없었다.
막말로 거래가 무산된다고 해도 만수르 개인보다 더 자금이 풍부한 아랍에미리트 왕실이나 IPIC의 능력을 볼 때 마음만 먹으면 경매를 통해 충분히 작품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의아한 마음이 드는 걸 감추면서 혁권이 말했다.
“빨리 연락을 드려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니오. 그래. 결정은 내렸소?
“네.”
잠시 말을 끊으며 한 박자를 쉰 혁권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구체적인 조건을 논의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만수르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크게 기뻐했다.
-잘 생각했소. 작품 값은 넉넉하게 챙겨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다시 만나면 좋겠소?
이왕 결정을 내린 만큼 빠를수록 좋았지만 여기서 조급한 태도를 보이면 자칫 주도권을 넘겨줄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느긋하게 대답했다.
“편하신 시간을 정해 연락을 주십시오.”
-질질 끌 필요 없이 오늘 정오에 식사를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끝내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시간에 맞춰 차를 보내도록 하겠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혁권이 괜찮다고 했지만 만수르가 웃으며 말했다.
-사양하지 마시오. 그럼 조금 있다가 보도록 합시다.
“……예.”
전화를 끊은 혁권은 고개를 들어 하킴을 봤다.
“비행기표는 취소했지?”
“네.”
“만수르와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발레타에는 며칠 뒤에 간다고 연락을 해 둬.”
“알겠습니다.”
등을 뒤로 기댄 혁권은 만수르를 만나서 어떻게 거래를 이끌어 나갈 건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앞에 탄 운전기사의 말과 함께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만수르의 경호원이 차 문을 열어 줬다.
롤스로이스가 멈춰선 곳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를 받은 걸로 유명한 최고급 일식당인 아라키Araki였다.
좌석이 단 9개뿐으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기본 식사 가격이 450달러(한화로 53만 원)가 넘을 정도로 런던에서 제일 비싼 식당이었다.
사케를 곁들이며 이것저것 음식을 시키다 보면 음식 값이 금방 1천 달러가 훌쩍 넘어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하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될 만큼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그가 식당 입구로 걸어가자 자드란이 앞에 나와 있다가 말했다.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자드란을 따라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고급 음식점 치고는 조금 좁아 보이는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들은 것과 달리 좌석이 텅텅 비어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온 모양이군요.”
그러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자드란은 이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궁금증을 풀어 줬다.
“원래는 손님들로 붐벼야 하지만 왕자님께서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셔서 식당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그렇군요.”
한 끼 식사가 450달러가 넘는데 가게 전체를 비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지 절로 고개를 내저어졌다.
거기다 최고급 식당인 만큼 손님들도 상류층 인사들이었기에 단순히 돈만 있다고 해서 가게를 전세 낼 수는 없었다.
영향력이 이 정도라며 은근히 과시를 하는 것 같아 그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금방 바로 했다.
“어서 오시오.”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만수르가 그를 보고는 일어나며 먼저 말을 건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을 뿐이오.”
만수르는 그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자, 앉읍시다.”
“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젊은 동양인 한 명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를 가지고 왔다.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여긴 송로 버섯 계란찜과 스시가 일품인데 어떻소?”
“왕자님께서 추천을 하시니 저도 한번 맛을 보고 싶군요.”
“하하하. 후회하지 않을 거요.”
만수르가 손짓을 하자 자드란이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가볍게 사케를 한잔하겠소?”
“좋습니다.”
종업원이 가져온 사케는 검은색 병에 붉은색 종이와 끈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흰색 라벨에 한자로 니시끼노 마노즈루라고 적혀 있었다.
“일식을 먹으러 오면 내가 즐겨 마시는 사케요.”
“그렇습니까.”
혁권은 몰랐지만 한 병에 최소 40~50만 원씩 나가는 고급 사케였다.
“오늘 거래에서 양쪽 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길 기원하며 건배합시다.”
“네.”
마주 보며 잔을 들어 올린 혁권은 이내 사케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목에 걸리거나 화한 느낌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역시라고나 할까, 마치 빈티지 와인을 마시는 것처럼 깊은 풍미가 입에 감돌아 감탄스러웠다.
하긴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만수르가 자신이 즐겨 마신다며 다른 사람에게 권할 정도니 술맛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맛있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오. 사실은 한국 술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그쪽엔 문외한이라.”
“그럼 다음번엔 제가 좋은 걸로 하나 선물해 드리죠.”
“아, 기대하고 있겠소이다.”
지방 쪽으로 찾아보면 지금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빚는 명인이 하나둘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의외로 허를 찔러 막걸리나 소주 같은 걸 줘 볼까?
평생 고급에만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이 진짜 서민들이 즐기는 독한 술을 마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혁권이 고약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아까 주문했던 계란찜이 나왔다.
화려한 서양식 식기 대신 동양적인 멋을 살린 먹색 접시에 대나무 통을 연상케 하는 그릇이 올라가 있었다.
음식을 날라 온 종업원이 뚜껑을 대신 열어 주자, 달큰한 향과 함께 하얀 김이 화악 퍼져 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이건…… 보통 계란찜이 아니군요.”
푸딩처럼 탄력 있으면서도 구름같이 몽실몽실해 보이는 모양새는 둘째 치고, 향기가 정말 기가 막혔다.
대체 무엇이 들어갔기에 이런 냄새가 나나하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연노란색 계란찜 중앙에 초콜릿 빛을 띠는 송로 버섯이 멋들어지게 곁들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송로 버섯이 귀한 식재료이다 보니 파와 함께 조금 갈아 넣었거나, 아니면 생색내듯이 몇 개만 살짝 잘라 올려놨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아예 버섯 하나를 통째로 넣은 셈이었으니 단가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맛과 향을 위해 만든 음식임에 틀림없었다.
숟가락으로 덜어 한 입 물자, 그야말로 입에서 살살 녹아 퍼지는 맛에 혁권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일본식 계란찜은 부드럽고 달콤한 게 특징이라더니 딱 그대로군요.”
“그리고 스시와 함께 사케까지 먹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소이다.”
“이제 보니 상당한 미식가셨군요.”
“맛있는 음식은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네. 어차피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선 살 수 없으니, 기왕이면 맛의 질을 따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 않겠소.”
“맞는 말씀입니다.”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식도락食道樂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에도 지구 한곳에서는 빵 한 조각을 사지 못해 배를 곯아야 되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뒤를 이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잡힌 갑오징어와 아일랜드산 다랑어 그리고 이탈리아 알바산 송로 버섯 등 하나같이 최상의 재료들로 만든 요리들이 순서대로 나와 입맛을 자극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가벼운 담소만 나눌 뿐 미술품 거래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음식 접시가 치워지자 만수르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먼저 작품 목록을 볼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혁권은 옆에 놔둔 서류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파일철을 받아 펼친 만수르는 마흔다섯 점이나 되는 미술품 목록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카다피 컬렉션으로 불릴 만큼 전부 훌륭한 작품들이군. 그런데 몇 점이 빠진 것 같소.”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자 혁권은 역시나 샌더스한테 건네줬던 목록이 유출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소더비를 통해 추가로 경매에 내놓으려던 작품 중에 열 점을 제외시켰습니다.”
“이유가 있소?”
“불가피하게 왕자님과 거래를 하게 됐지만 그래도 앞서 약속을 한 것이 있기에 다는 어렵더라도 열 점은 원래대로 경매에 올리려는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그러자 혁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도의道義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도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