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52
952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비탈길을 올라 지하 주차장은 빠져나가는 롤스로이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혁권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옆에 있던 하킴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방델 회장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 혁권은 하킴의 물음에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대답했다.
“뭐, 쉽진 않겠지. 하지만 결국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모든 걸 다 잃게 될 테니까.”
하킴이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프레 의장이 터트린 스캔들에 휘말린다면 제아무리 방델 회장이라도 그리 간단하게 빠져나가진 못하겠죠.”
“맞아.”
그사이 두 사람을 태우기 위한 검은색 고급 세단이 옆으로 매끄럽게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하킴이 열어 주는 문 사이로 뒷좌석에 올라타자 이내 앞뒤에 붙은 경호 차량들과 함께 천천히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파리 콩코르드 광장 인근, 모사드의 안전가옥.
창가에 서서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멀리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오페르는 한쪽 손으로 커튼을 치며 뒤로 몸을 돌렸다.
“도대체 정보가 어떻게 샌 거지?”
그러자 담배를 피우며 소파에 앉아 있던 모사드 프랑스 지부장인 페이글린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CIA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CIA라고?”
콧잔등을 찡그린 오페르를 마주 보면서 페이글린이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래. 오페르 자네가 입국하는 걸 알고 미행을 붙여 뒀던 모양이야. 이번 일 때문에 주위를 훑다가 겨우 찾아냈어.”
“제길!”
그런 사실도 모르고 지금까지 꼬리를 계속 달고 다녔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우리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어.”
반쯤 자책하는 페이글린의 말을 들으면서 걸음을 옮긴 오페르는 탁자에 놓여 있던 위스키 병을 집어 들어서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따랐다.
그러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 버리고 털썩 소리를 내면서 맞은편 소파에 주저앉았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손짓에도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딴 짓을 벌인 거지?”
“정보가 샌 것은 CIA가 맞지만 일을 저지른 건 다른 쪽일지도 몰라.”
“뭔 소리야?”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페리글린이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오페르 앞에 내려놨다.
사진에는 건물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고급 세단 뒷좌석에 혁권이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대번에 사진에 찍힌 인물이 누군지 알아본 오페르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놈은!”
“누군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
“당연하지! 이 자식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오페르는 적대감 가득한 얼굴로 이를 부득 갈았다.
몇 번이나 모사드가 하는 일을 망쳤을뿐만 아니라 최고의 암살 조직인 키돈을 거의 와해시켜 놓은 것이 바로 혁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예 요원 대부분을 잃은 키돈은 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전력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이번 일에 존슨 이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거야?”
번들거리는 오페르의 시선을 받은 페이글린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파리에 은밀하게 들어와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어제 모처에서 찰스 방델을 만나고 나서 이런 신문 기사가 나왔으니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않겠어?”
페이글린은 탁자에 놓인 오늘자 신문 일면 기사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찰스 방델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기사에는, 물의를 일으킨 라파엘을 사장직에서 즉시 해임하는 것과 동시에 대주주로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통감하고, 직원을 비롯해 다른 주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델 가문이 운용하는 투자회사에서 보유한 지아트사 지분 전부를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발표가 적혀 있었다.
폭락을 거듭해 주가가 바닥이라고는 해도 수억 유로에 달하는 지분을 내놓겠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기존에 정부가 소유한 주식을 합치면 과반수가 넘어 지아트사는 사실상 국가 소유의 공기업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프랑스 전체가 온통 이 일로 떠들썩한 가운데 끝없이 수직 낙하를 거듭하던 지아트사 주식은 하락 폭을 줄이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오페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존슨이 지아트사 지분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지 않겠어.”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
하얀 담배 연기를 오페르 쪽으로 내뿜으면서 페이글린이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을 조합해 보면, 라파엘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진행하는 차기 전차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서 존슨을 암살하려고 했고, 그자는 그걸 되갚아 준 것 같아.”
“거기에 재수 없이 우리가 걸려든 거라는 말이군.”
“맞아.”
“정말 존슨 그놈하고는 악연이 따로 없군.”
쓴웃음을 지은 페이글린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는 오페르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DGSE가 자네 잡으려고 수배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이미 본부에서 지시를 받았겠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프랑스를 떠나는 것이 좋을 거야.”
“젠장! 아직 할 일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간첩죄로 프랑스 당국에 붙잡힌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기에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차량으로 스위스 국경을 넘어간 뒤에 거기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면 될 걸세.”
“졸지에 계획에도 없던 알프스 구경을 하게 생겼군.”
“그래도 프랑스 감방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하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숨을 내뱉은 오페르는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난 그렇다고 치고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손을 써야 되지 않겠어?”
“안 그래도 키돈 암살조 하나가 파리에 들어와 있으니까 곧 정리가 될 거야.”
“프랑스 언론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 아니야.”
우려 섞인 시선에 페이글린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어깨를 으쓱였다.
“위에서 다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군사기밀을 빼내 간 것이 밝혀지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아주 심각해지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묻어 버리고 싶은 거겠지.”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
“이제 그쪽은 신경을 끄고 오늘 밤에 이동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 두도록 해.”
“그러지.”
페이글린은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빈방에 혼자 남은 오페르는 눈가를 살짝 찌푸린 얼굴로 혁권이 찍혀 있는 사진을 집어 들어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한 악연이야, 정말.”
이제 그만하고 다시는 얽히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오페르는 누가 듣고 있기나 한 것처럼 중얼거리곤 사진을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탁 소리를 내며 눈앞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를 초췌한 얼굴을 한 라파엘은 무감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소지품 챙겨서 나가시면 됩니다.”
심드렁한 말투로 안내한 직원이 이내 자기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얼른 가지 않고 뭐 하냐는 것처럼 턱짓으로 라파엘을 재촉했다.
바구니 안에는 라파엘이 원래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 예를 들어 시계나 지갑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던져 둔 채로 들어 있었다.
라파엘은 이 롤렉스 시계 하나값만 해도 당신 1년 연봉은 될 거라며 버릇없는 직원에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곤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시계는 다시 손목에, 지갑은 양복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차가운 복도를 걸었다.
건물 출입구 가까이 다가가자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DGSE 요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조사가 다 끝난 것이 아니니까 파리 밖으로 나가지 말고 소환을 하면 언제든지 응해야 됩니다.”
“알겠소.”
“아. 그리고 각오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밖에 하이에나 떼가 와 있으니까 말입니다.”
“······.”
진심 어린 충고인지 아니면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라파엘은 때마침 출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변호사와 스태판 전무를 만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살짝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라파엘은 한시라도 이곳에 더 있기 싫은지 그대로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에는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태판이 서둘러 우산을 펼쳐서 씌우는 것과 동시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천둥처럼 고막을 두드리는 고함들이 마구 울려 퍼졌다.
찰칵! 찰칵!
“혐의는 인정하셨습니까?”
“내일 이사회에 사장 해임안에 상정될 거라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혀 주십시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 떼처럼 마이크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면서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내자, 라파엘은 입을 꾹 다문 채 석고상처럼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곧 공식 입장문을 낼 거니까 이만 비켜 주세요.”
“밀지 말고 물러서세요!”
변호사와 스태판 전무가 나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기자들은 막무가내였다.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거참, 밀지 마시라니까요!”
스태판 전무가 최대한 라파엘을 감싸면서 보호해도 기자들이 자꾸만 밀어 대는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게다가 사진 한 장이라도 더 건져 보려는 기자들이 팔을 뻗을 공간만 있으면 어떻게든 비집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탓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뭐라도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심산인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감촉에 라파엘이 뒤를 확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기자가 웃으면서 카메라를 위로 치켜 올렸다.
팡팡 셔터를 터트려 대는 기자를 향해 이를 갈면서 라파엘은 겨우 화를 눌러 참고 앞을 향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화를 낸다면 오히려 기삿거리를 얻어 냈다고 기뻐할 터였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다른 기자들 역시 신나서 기사를 마구 써 대겠지.
라파엘은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치욕스럽고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 상태로 한참을 시달리고 나서야 일행은 겨우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탈 수 있었다.
차가 DGSE 본부 앞을 빠져나오자 뒷좌석에 앉은 라파엘이 이리저리 부대끼는 와중에 구겨진 옷자락을 펴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그러자 앞에 타고 있던 스태판 전무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자네 눈에는 괜찮아 보여!”
“죄송합니다.”
열이 오르는지 거친 손길로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푼 라파엘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이사회가 열린다고 그랬지?”
“맞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스태판 전무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큽니다.”
“젠장!”
라파엘은 차 문에 있는 팔걸이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고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날 버리고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 이거군.”
“이사회뿐만 아니라 사내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이미 반쯤 체념한 듯 표정이 어두운 스태판 전무와 달리 라파엘은 핏발이 선 눈으로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절대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지. 아니, 억울해서라도 혼자서는 안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