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77
977
펜트하우스에 있는 욕실에는 호텔의 자랑거리인 거대한 전면 유리창을 통해 리야드의 전경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큰 욕조가 있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왔으며 노르웨이의 최고급 목재만을 사용한 벽면에서는 은은한 나무향이 흘러나왔다.
욕조를 중심으로 모서리 부분에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모자이크 형식으로 화려한 색감의 문양을 박고 이어지는 위쪽의 아치에는 중동 특유의 둥그런 곡선 모양으로 무늬를 깎아 놓아, 마치 호텔이 아니라 어디 궁전의 침실에 들어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면대의 거울 테두리부터 시작해 수도꼭지 하나까지 전부 금색이었으며, 여기에 조명의 은은한 빛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황금빛의 향연이었다.
혁권은 딱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물에 몸을 담그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니 바닐라와 머스크가 섞인 부드러운 향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리야드로 떠나기 전 소현이 피로를 풀어 주는 입욕제라며 한번 써 보라고 챙겨 준 것인데, 의외로 효과가 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여자들이 아로마 테라피니 뭐니 하면서 향에 집착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혁권이지만, 가끔씩은 그런 취미에 어울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욕조에 편안히 누운 자세로 딱딱하게 뭉친 근육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때 문득 욕조 옆 선반 위에 놔둔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후우······.”
꼭 좋을 때 방해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
혁권은 작게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을 집어 상대방을 확인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거 쉬고 있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
스마트폰을 타고 들리는 윤도중 사장의 목소리에 그는 욕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말했다.
“결과가 궁금해서 전화를 거신 모양이군요.”
왕세자 궁에 가기 전에 오늘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 준비한 제안을 할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 줬는데 참지 못하고 먼저 연락을 해 온 거였다.
한국철도차량 입장에서는 사운을 건 차기 전차 프로젝트 수주가 걸려 있는 데다가 상황에 따라 공장 생산 스케줄을 대폭 조절해야 됐기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혁권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결과를 이야기해 줬다.
“일단 빈 살만 왕세자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는 거요?
솔직히 일을 진행하면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었기에 윤도중 사장은 놀란 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제안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미국과 독일 양국에서 무기 금수 조치가 내려져야 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어찌 됐건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건 사실 아니오.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재입찰을 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허탈한 일이 없었을 텐데, 다른 선택지를 하나 만들어 놨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그래도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동안은 의심만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빈 살만 왕세자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러시아가 이번 차기 전차 프로젝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예. 거기다가 러시아에서 제안하고 있는 전차가 T-14 아르마타인 것 같더군요.”
-으음······.
이야기를 들은 윤도중 사장은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4세대 전차인 T-14 아르마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괴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신형 125mm 2A82-1M 활강포는 2킬로미터 밖에 있는 서방 최신 전차들의 장갑을 한방에 관통시켜 버릴 수 있었고, 신형 복합 장갑과 아프가니트Afghanit로 불리는 능동 방어 시스템은, 보병이 쏜 대전차미사일은 물론이고 빠르게 날아오는 전차포까지 중간에 요격해 버리는 막강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쪽은 제대로 공격을 못 하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상대편에 두드려 맞는 전투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에다가 최초로 무인포탑을 적용해서 탑승하는 승무원도 세 명이면 충분했다.
항상 군자원이 부족해 예멘 내전에서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인 수단군을 용병처럼 고용해 지상전에 투입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아직 개발이 완전히 다 끝나지 않았고 러시아 특유의 과장과 의문스러운 기계적 신뢰도 때문에 나와 있는 성능을 전부 발휘할지는 의문점이었으나, 그래도 위협적인 존재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동맹인 미국의 눈치를 봐야 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러시아 전차를 선택하기는 어렵지 않겠소.
그렇게 되길 원하는 듯한 윤도중 사장의 이야기에 그는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도록 해 줬다.
“이미 사드 대공미사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제 최신 대공미사일시스템인 S-400을 무려 20억 달러어치나 도입한 전례가 있습니다.”
-······.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지요.”
그러자 윤도중 사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후우. 무슨 말인지 알겠소. 어떻게든 중간에 러시아가 끼어들 수 없도록 절대 재입찰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뜻 아니오.
“그렇습니다.”
-정말 쉽지가 않군.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최대한 지원을 해 줄 테니 말만 하시오.
스마트폰을 고쳐 쥐며 혁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말이 나왔으니 남아 있는 로비 자금을 한꺼번에 다 쏟아부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전부 쓰겠다는 거요?
깜짝 놀라 되묻자 혁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미적거리면서 판돈을 아끼면 기회는 날아가 버리게 되는 법이니까요.”
-지금이 승부를 볼 시점이다 이거요?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야적장에 보관 중인 전차들을 마냥 그대로 놔두기는 어려웠기에 협상 카드를 쓸 수 있는 건 길어 봤자 3~4개월 정도였다.
그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위험부담 감당하기 힘든 한국철도차량으로서는 원래 계획대로 새로 생산될 혼합형 파워팩을 장착해서 한국군에 납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코리아 컨소시엄은 빈 살만 왕세자와 사우디아라비아군에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카드 하나를 잃게 되는 거였다.
윤도중 사장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고민이 길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에 올인하기로 했으니 그리합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욕조 옆에 두었던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함께 입 안을 감도는 감미로운 향취가 과연 비싼 값을 한다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방해꾼은 없겠지.’
혁권은 천천히 눈을 감고 물이 어깨까지 올라오도록 깊게 몸을 담그며 여유롭게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며칠 뒤, 미국 워싱턴 백악관.
백악관 1층 웨스트 윙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는 세 명의 사내가 심각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는 대통령이 앉았고 좌우로 측근인 브랜스테드 국무장관과 제리 비서실장이 자리했다.
“언론 쪽 분위기는 좀 어때?”
원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테이블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면서 대통령이 묻자, 제리 비서실장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 좋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USA 투데이에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이혼한 전 부인과 물리적인 폭력이 오가는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이웃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조사까지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더욱 여론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짧게 혀를 차는 대통령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제리 비서실장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아직 언론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보잉 임원으로 있을 때 F-15SE 2개 편대를 약 50억 달러에 판매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한테 거액의 커미션을 준 사실이 조만간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폭로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며 쳐다봤다.
“커미션이라니? 그게 사실이야?”
“조사 결과 그런 일이 있었던 걸로 확인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에 무기를 판매할 때 일정액을 커미션으로 주는 건 일종의 관례 같은 거라지만, 하필이면 가정 폭력 스캔들로 시끄러운 데다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무기 판매를 강행 통과시켜 반감이 클 때라 이대로 놔둔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 같습니다.”
반대편에 있던 브랜스테드 국무장관도 같은 의견을 냈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껴안고 갔다가는 재선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임시 대행이었으니, 이쯤에서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을 정리하시지요.”
“으음.”
팔짱을 낀 채 낮게 침음을 흘린 대통령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후임은 누구로 하는 것이 좋겠나?”
그러자 제리 비서실장과 잠깐 눈빛을 교환한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에스퍼드 합참의장을 새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에스퍼드 합참의장이라······.”
대통령이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자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얼른 에스퍼드 합참의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덧붙였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에 이라크전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차례대로 치른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성장군입니다. 중동 정세에도 밝으니 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이란과 중국에 강경한 신호를 줄 수 있고 무엇보다 별다른 흠결이 없어 민주당에서도 그리 크게 반대를 하지 않을 테니, 재선을 앞두고 임명 문제로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다른 이유들보다 재선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 대통령은 결심을 굳혔다.
“다들 의견이 그렇다면 에스퍼드 합참의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토록 하지.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것이 없으니까 비서실장 자네가 오늘 바로 에스퍼드 합참의장을 만나서 수락할 건지 대답을 듣고 오도록 해.”
“그리하겠습니다.”
대통령은 다리를 꼰 채 몸을 뒤로 기대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민주당에서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무기 금수 법안은 어찌 될 것 같나?”
시선을 받은 제리 비서실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반대표를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근소한 차이로 상원에서 통과가 될 걸로 보입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대통령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여당인 공화당 의석이 훨씬 더 많은데, 그거 하나 저지를 못 시킨다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브랜스테트 국무장관이 제리 비서실장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말썽인 거요?”
“그렇습니다. 그레이엄 상원의원과 몇몇 의원들이 민주당에 동조를 하면서 표가 갈라져 버렸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대로라면 5~6표 차이로 통과될 가능성이 큽니다.”
“제길! 같은 당이면서도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을 하고 훼방이나 놓다니.”
경제 부흥을 최고의 치적으로 홍보하는 상황에서 중동 국가들에 대한 무기 판매가 이대로 무산되어 버린다면, 자신의 재선에도 악영향이 있었기에 대통령은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킨 채 크게 화를 냈다.
흥분을 자제하지 못해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는 그를 향해 국무장관이 슬쩍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되면 사우디아라비아 국빈 방문을 일찍 취소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추가 무기 판매를 발표하고 난 뒤에 무기 금수 법안이 통과된다면 타격이 컸을 겁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열심히 변론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의 행동에 대통령은 더욱 열불이 치솟는 듯 앉아 있던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찔끔하여 동시에 입을 꾹 다무니 대통령의 미간에 파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대통령은 갑갑한 속을 드러내는 것처럼 거칠게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 내리곤 차가운 칼날 같은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은 둘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시간 동안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건 어렵다는 거지?”
제리 비서실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카리니 암살 사건에 대해 FBI 조사를 실시한다면 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만······.”
“그건 안 된다는 걸 알잖아! 조사 지시를 내리면 그 즉시 사우디아라비아가 국내에 들어와 있는 투자금을 전부 빼 버릴 텐데, 그러면 뉴욕 증시가 그날로 지옥 아래로 떨어져 버릴 거야. 거기다가 원유 거래 대금을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받는다고 해 버리면 그때는 재선을 물 건너가는 거야.”
“그렇지요.”
아주 극단적인 가정이었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엮여 있는 만큼, 카리니 암살 사건은 자칫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전복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파괴력이 컸기에 이걸 건드린다면 상대가 초강수를 두는 걸 배재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무기 판매는 포기하는 수밖에 대신 이대로 끝내기에는 손해가 너무 크니까 민주당을 공격하는 용도로 쓰자고, 저쪽이 괜히 훼방을 놔서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다고 말이야.”
오랫동안 대통령을 옆에서 보필해 온 만큼 제리 비서실장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