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8
98
살짝 말끝을 흐리던 케노스 함장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선체 파손이 상당히 커서 복귀하면 최소 한 달, 길어지면 수개월 정도 도크에 들어가서 수리를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긴 수리 기간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오래 걸린단 말인가?”
“네. 그나마도 발레타에는 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이탈리아 본토에 위치한 조선소로 들어가야 될 겁니다. 문제는 주브르급 공기부양정이 지금 한참 내전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된 데다 생산까지 다 종료돼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으음.”
“만약 부품을 구하지 못할 경우 전부 따로 제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수리 기간이 더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뜻밖의 악재에 혁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ADDI와 휴전이 이루어졌기에 곧 이탈리아에서 제공한 소해함이 들어와서 트리폴리 항구에 깔린 기뢰 제거 작업에 착수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세이돈 함이 수개월 동안 도크에 들어가 수리를 받아야 된다면 사실상 밀수품 운송은 끝났다고 봐야했다.
그동안 포세이돈 함을 통해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던 혁권 입장에서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가 얼굴을 구기고 있자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케노스 함장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혁권은 한쪽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최선을 다 한 걸 알고 있으니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어찌 됐건 적은 격퇴시켰고, 선체가 조금 망가지기는 했어도 일단은 움직일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거야.”
괜찮다고 위로하는 말에도 케노스 함장의 얼굴은 흐린 그대로였다.
함선의 최고 책임자는 함장이다.
그 말인즉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조리 그의 이름 아래서 이뤄지는 것이란 뜻이다.
설령 혁권이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포세이돈 함이 그렇게까지 파손된 것에 대해 케노스 함장은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선원들의 피해는 얼마나 되나?”
“사상자는 없고 교전 중에 세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만, 그리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배가 부서진 거야 조선소로 가져가 고치면 됐지만 사람 목숨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뭐가 말인가?”
혁권이 시선을 들며 바라보자 케노스 함장이 정색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을 해 온 걸 볼 때 상륙 지점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포세이돈 함이 어디로 상륙할지 몰랐다면 매복 자체를 할 수 없었을 테니 충분히 가능한 말이었다.
“흐음.”
낮게 침음을 흘리면서 혁권은 미간을 좁혔다.
상륙을 강행했다가 자칫 또다시 공격을 받게 된다면 정말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당장 현금을 가져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트리폴리 정부 관계자들의 반발도 클 테지만 만수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번에 남은 작품들을 싣고 가야 했다.
거기다 이대로 회항을 한다면 망가진 선체 때문에 언제 다시 트리폴리로 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정말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때 함단이라도 상륙 지점에 나와 있었다면 상황을 파악하기가 쉬웠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은밀히 일을 진행시켜야 된다는 모함메드 장관의 요구에 정부군 외에는 누구도 상륙 지점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혁권은 결단을 내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예정대로 상륙을 하도록 해.”
“또 다른 매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혁권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상황이 더 복잡해져.”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확인한 케노스 함장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케노스 함장이 경례를 하고는 뒤로 돌아서자 혁권은 충격에 깨진 전방 방풍창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육지에 시선을 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임시 복구 작업을 끝낸 포세이돈 함은 다시 바다 물살을 가르면서 천천히 육지로 접근했다.
부아아앙!
육중한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600톤에 육박하는 거대한 포세이돈 함이 모래 먼지를 사방에 날리면서 해안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 모습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바다 괴수가 나타난 것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그런 기분만 주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6연장 AK-630 대공포 2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불을 뿜어 댈 기세로 포구를 내밀고 있었다.
분당 수천 발의 포탄을 쏘는 대공포의 화력이라면 순식간에 해변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맞닿은 마른 땅에는 군용 트럭 두 대와 지프 네 대가 무질서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차량들 주위로 이십여 명 정도의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다들 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함교에서 상대를 살핀 혁권은 손에든 쌍안경을 아래로 내리면서 낮게 침음을 흘렸다.
“흠.”
“복장만 봐서는 정부군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옆으로 다가온 케노스 함장의 말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바로 하역 작업을 시작할까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전방에 있는 정부군 수송대를 쳐다보던 혁권이 입을 열었다.
“배 안에 총을 쓸 수 있는 인원이 몇 명이나 되나?”
“뭔가 수상한 거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정색을 하며 묻자 혁권이 머리를 가볍게 내저으면서 말했다.
“딱히 뭐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
지극히 막연한 느낌일 뿐이었지만 혁권의 이런 본능적인 예감은 때때로 들어맞을 때가 많았다.
왠지 별로다, 불길하다고 말할 때마다 꼭 안 좋은 일이 터지는 것을 옆에서 직접 본 케노스 함장은 쉬이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
“단순히 총을 쏘기만 하는 거라면 사람을 꽤 모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을 가정했을 때, 써 먹을 수 있는 건 절 포함해서 여섯 명 정도군요.”
“여섯이라…….”
케노스 함장은 배를 지휘해야 되니 빼고 혁권, 자신과 하킴까지 합치면 모두 일곱이었다.
상대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
그러나 대공포가 엄호를 해 줄 테니 화력은 오히려 이쪽이 훨씬 더 세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얼마나 빨리 파악할 수 있느냐다.
만약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설령 전투에서는 이기더라도, 밖으로 나가 상대와 직접 접촉했을 때라면 자신과 부하들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물론 부하들만 내보내고 안전한 함교에서 상황을 지켜본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다.
아니, 어쩌면 한 무리를 책임지는 우두머리로서 그게 더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혁권은 그렇게 하기 싫었다.
부하들을 앞장세우고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성미에 들어맞지 않는 일인 것이다.
“함장은 배를 지휘해야 되니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무장시켜서 화물칸으로 내려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원래 소총 같은 무기는 선내에 있는 무기고에 보관했지만 아까 전에 모터보트들과 전투를 치르느라 이미 다 꺼내 놓은 상태였다.
잠시 뒤 AK 소총으로 무장한 선원들이 화물칸에 집결했다.
혁권도 베레타 권총을 언제든 뽑아 쓸 수 있게 장전한 상태로 뒤춤에 꽂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도 AK 소총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상대가 경계를 할 수도 있었기에 권총만 휴대했다.
“다들 준비됐나?”
절대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긴장하고 있는 선원들에게는 확성기를 귀에 직접 갖다 댄 것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손에 든 AK 소총의 무게가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진다.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화약 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선원들은 긴장과 흥분이 범벅된 눈빛으로 혁권을 바라보았다.
쿵. 쿵.
심장에서 내보낸 혈액이 몸 안을 마구 뛰어다니며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런 선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본 혁권은 몸을 돌리며 크게 말했다.
“문을 열어.”
혁권이 손짓하자, 화물 램프 옆에 서 있던 선원이 작동 버튼을 눌렀다.
삐익!
날카로운 벨소리가 울리면서 커다란 화물램프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위이이잉.
화물 램프가 열리면서 그 사이로 시커먼 밤하늘이 보였다.
매복이 있을 경우 타깃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 화물칸 조명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눈이 금방 어둠에 적응했다.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리자 턱수염을 기른 사내 한 명이 웃으면서 다가왔는데, 뒤로 군인 다섯 명이 따라왔다.
“김혁권 사장님 되시지요? 모함메드 장관님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온 사내가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손등까지 털이 수북하게 나있고 상당히 거친 손이었다.
영어는 상당히 유창했는데 특유의 악센트도 없고 정확한 영국식 발음이었다.
악수를 하면서 힐끗 어깨를 보니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이름이?”
“소개가 늦었군요. 미스투란 대위입니다.”
“그럼 모함메드 장관님의 지시를 받고 오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미스투란 대위는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화물을 넘겨받아 안전하게 중앙은행 금고까지 가져가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그렇군요.”
“날이 밝기 전에 임무를 끝마쳐야 되니 어서 화물을 내려 주십시오.”
거리가 가까워 바다 위에서 벌인 전투를 충분히 목격했을 텐데도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고 서둘러 돈을 받아 가려는 모습에 그는 어쩐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바다 위에서 흔들리지 않게 트럭을 단단히 결박해 놓은 줄을 풀면 바로 내려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요.”
혁권은 담배를 입에 물고 상대에게도 내밀어 권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좋지요.”
미스투란 대위는 반색을 하며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찰칵.
지포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준 혁권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압둘 부관도 함께 올 줄 알았는데 안 나왔군요.”
“저희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연기로 가려진 눈동자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혁권은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들키기 싫어 일부러 땅바닥을 보는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함메드 장관의 부관 이름은 압둘이 아니었다.
지난번 시가전에서 우연찮게 친분을 맺게 된 에프칸이었다.
부관이 누군지 모르면서도 아는 척 속인 다는 건 이들이 가짜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스투란 대위 뒤에 서 있는 군인들의 모습도 뭔가 어색한 것 같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혁권은 하킴과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공기부양정에서 내리기 전에 그가 담배를 피우는 걸 위험 신호를 하기로 했기에 하킴은 슬그머니 손가락을 방아쇠 뭉치에 끼웠다.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채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모래사장에 버리며 혁권이 얼굴을 굳혔다.
“너희들 정체가 뭐야!”
미스투란 대위가 멈칫하며 그를 쳐다봤다.
“무슨 말입니까?”
“흥.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그런데 어쩌지? 모함메드 장관 부관의 이름은 압둘이 아니라 에프칸이야.”
그러자 미스투란 대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으며 미스투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혁권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탕! 탕!
“큭.”
어깨와 팔에 총탄을 맞은 미스투란은 신음을 토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총성을 신호로 하킴과 선원들이 앞에 있는 군인들을 향해 AK 소총을 난사했다.
미리 안전장치를 풀어 뒀기에 그냥 방아쇠만 당기면 됐다.
타타탕! 타탕! 탕!
“으악!”
“컥.”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라 소총을 들어 올리던 군인들은 두세 발씩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쪽 손에 권총을 든 혁권은 피를 흘리고 있는 미스투란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 끌어당기면서 소리쳤다.
“네놈들은 누구야! 어떻게 우리가 이리로 오는지 알았어?”
“너흰 끝장이야!”
눈을 치켜뜨며 미스투란이 악다구니를 내뱉자 혁권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순간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적들이 총을 쏘며 이리로 몰려왔다.
퍼퍼퍽!
피슝! 슝.
“제길!”
인상을 쓰는 혁권과 달리 미스투란의 득의만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