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142
141화.
해안가에는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참모장 헤롤은 말이 없었고, 브렉 왕국 존 왕자는 수하의 귓속말을 들으며 케일과 고래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위티라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네 왕국의 수뇌부를 보며 고개를 숙이긴커녕 어느 때보다도 당당해 보였다.
“고래족 대표로 온 위티라입니다. 우리의 은인인 케일 공자의 초청으로 왔습니다. 반가워요.”
적당한 예의를 차린 인사였다. 그게 당연했다.
인어족도 손에 쥐어 바다의 최고 권력 집단이 된 고래족이었다. 그 고래족의 차기 왕으로 내정된 그녀가 다른 왕국 수뇌부들에게 예의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드래곤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자연계 종족이었다. 사람들은 위티라의 팔목에 둘러진 물 채찍이 보였다.
이 모든 장면을 케일은 흡족하게 바라봤다. 그는 위티라에게 부탁했었다.
‘분위기 좀 잡아줘.’
위티라는 아주 제대로 강자와 권력자로서의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그 뒤의 파세톤과 아치도 묵묵히 서서 분위기를 잘 잡아줬다.
전사들에게도 각국의 일행에게도 고래족이 선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래족을 데려온 로운 왕국에 대한 인상도 잘 각인되었을 터.
‘괜찮네.’
케일은 이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당황한 얼굴이던 여왕 리타나가 케일을 보고 있었다.
‘음?’
그녀는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케일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케일은 그 산뜻한 미소가 영 꺼림칙해서 시선을 돌렸다가 웃고 있는 헤롤과 눈이 마주쳤다.
헤롤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로 케일을 빤히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왜 이래?’
케일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짝!
가벼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선들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알베르 크로스만 왕세자가 다른 이들의 눈빛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들어가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존 왕자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에 아주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군요.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존 왕자의 안색은 평온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막내 펜 왕자의 당황한 표정과는 상반되었다.
알베르 왕세자는 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리타나를 바라봤다.
“여왕님, 의자가 세 개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리타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래족 세 분이 앉으실 의자죠?”
그녀는 수하 빈을 보며 말했다.
“빈, 의자 챙기는 김에 하나 더 챙겨와. 케일 공자도 앉게.”
“여왕님, 케일 공자 포함하여 셋입니다.”
“네?”
리타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왕세자를 바라봤다. 알베르는 케일 포함 셋이라고 말했다.
‘고래족은 두 명만 앉는 건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지지직.
텔레포트 진 위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텔레포트 진을 이용하려면 정글 측 마법사가 보낸 암호문이 들어간 마법 주문을 사용하여 위치를 지정해야 했다.
그래서 텔레포트 진 바로 앞에 서 있던 마법사는 당황했다.
그 순간, 마법사의 어깨 위에 손이 하나 올라와 그를 살짝 뒤로 끌어당겼다.
마법사는 고개를 돌렸다.
케일 헤니투스.
그가 마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청한 분입니다.”
“…네?”
파지지직.
스파크는 더 거세게 요동쳤고 이내 환한 빛이 점점 커지며 사람의 형상을 완성해 갔다.
케일은 고래족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점점 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오랜만에 보는 이였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며 나타난 새로운 이가 텔레포트 진을 벗어났다.
“케이지 씨,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공자님.”
미친 신관 케이지. 그녀는 케일의 손길을 따라 텔레포트 진 밖의 모래를 밟으며 섰다. 어떠한 신의 문양도 없는, 검은 신관복을 펄럭이며 그녀는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전히 그녀는 신실한 신관인 척 연기를 잘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관의 등장에 다시 한번 몇몇은 당황했다.
그러나 브렉 왕국 측은 안색이 담담했다. 그들은 케이지를 본 적이 있었다.
케일은 사람들에게 미친 신관을 소개했다.
“죽음의 신을 모시는 신관이지요.”
죽음의 신.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사람들은 자연히 한 단어를 더 떠올렸다.
죽음의 맹세.
죽음의 신 신관이 회담 자리에 나타날 이유는 하나였다.
케일이 입을 닫자, 왕세자가 이어 말했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상당한 비밀이 필요한 일이라- 말이지요.”
알베르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러니 믿음이니 신뢰니. 그런 것보다 확실한 약속은 목숨이 아니겠습니까?”
화사하게 웃는 왕세자와 달리 해안가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왕세자 알베르는 죽음의 신관과 고래족을 해안가에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선보였다. 그 말은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죽음의 맹세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정말 말이지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헤롤 참모장. 그가 왕세자와 케일을 보며 말했다.
“로운 왕국에는 재밌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재밌는 방식이 제 취향이군요.”
케일은 순간 선하게 웃는 헤롤과 눈이 마주쳤다.
왜 날 봐?
그런 의문을 지닐 때 헤롤이 시선을 돌려 왕세자를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믿음보다는 목숨이죠. 좋은 방식입니다.”
“저는 일단 들어보고 그 방식을 따를지 정하죠.”
존이 헤롤의 뒤를 이어 말하며 한 발 물러섰다. 마지막으로 리타나만이 남았고,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의자 세 개는 고래족 후계자님, 그리고 신관, 마지막은 케일 공자 자리겠군요.”
그녀는 빈에게 지시했다.
“오늘 이곳에 온 전사와 마법사들의 명단을 가져오도록.”
그녀의 제스처는 죽음의 맹세를 받아들인다는 암묵적 동의였다. 왕세자는 천막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
한밤중 해안가에서 한바탕이 벌어진 후, 다시 새로운 이들을 더해 회담 자리가 만들어졌다.
케일은 그 회담 테이블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회담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나는 그냥 저하 뒤에 서 있으면 되지 않나?’
원래 테이블에는 위티라와 신관 케이지만 앉히기로 했었다. 물론 케이지는 신관의 신분이기에 다른 권력자들이 동의할 때만 앉히기로 했다.
‘그 사이에 내가 왜?’
케일은 의문을 삼키며 무표정한 얼굴로 회담을 지켜봤다.
방금 위티라와 알베르의 입을 통해서 비밀 단체와 그들의 전투 전문 단체인 ‘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동대륙 뒷세계를 장악한 단체 ‘암’.
로운 왕국과 태양신 교단에 마법 폭탄 테러를 한 존재.
엘프 마을을 습격해 세계수 가지를 빼앗으려 했던 단체.
인어족을 후원해 동대륙과 서대륙을 잇는 해상로를 지배하려던 일.
몇 가지 증거와 함께 설명되는 비밀 단체와 ‘암’에 대한 설명을 들을수록 회담장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갔다.
“…허.”
존 왕자는 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러댔다. 그는 한탄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단체가 북 3국, 제국과 협력한 관계이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른 채 그 단체가 서대륙에서 활개 치는 것도 몰랐다는 것 아닙니까?”
존은 기가 찬 심정이었다.
‘어떻게 그런 단체가 있을 수 있고, 그걸 몰랐을 수가 있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북 3국과 제국이 그들을 도왔다면 충분히 몰랐다는 게 이해되었다. 또한 동대륙 뒷세계를 장악한 단체가 결코 약할 리도 없지 않은가?
그때,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간악한 단체군요. 마법 폭탄 테러를 일삼는 곳이라니. 반드시 척살해야 합니다.”
헤롤 코디앙, 그의 반응이었다.
케일은 헤롤의 표정을 보려고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살벌하네.’
마법을 증오하는 헤롤. 그에게 있어 마법 폭탄 테러는 응당 없어져야 할 존재다. 아마 툰카도 비슷한 반응일 테고.
‘잘 날뛰어주겠네.’
케일은 헤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맺히려 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리타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라졌다.
리타나가 아주 진지한 얼굴을 케일을 보고 있었다. 케일은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리나 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신기해요.”
뭐?
케일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리타나의 말이 이어졌다.
“로운 왕국의 마법 폭탄 테러를 막는 데 크게 공헌한 이가 케일 공자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래족 일도 도우시고. 우리 정글에 불도 꺼주고.”
리타나는 정말로 신기했다.
지금 무표정한 얼굴로 회담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케일 헤니투스.
‘암’에 대한 내용까지 듣고 나자, 그가 도대체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 엘프 마을도 구하셨다지요?”
도대체 케일 공자는 쉬는 순간이 있을까?
저 담담한 표정을 그린 채로,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분명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잠들지 못하는 수많은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자와 성녀를 살리려고 아주 노력하셨죠.”
리타나는 자신과의 친분, 은인에 대한 마음을 떠나 이 회담 자리에 가장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케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공자, 공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하나둘 시선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들을 받으며 케일은 생각했다.
‘뭘 어떻게 해?’
그걸 생각하는 게 본인들의 일 아닌가?
물론 케일은 제 나름대로 할 일을 정해두었다. 그러나 그걸 말할 수도 없었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케일은 저를 쳐다보는 시선들을 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라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 우리 또 구하나? 구하는 건 위대하고 좋은 일이다! 아주 뿌듯한 일이다!
케일은 이번에는 라온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왕세자, 여왕, 차기 후계자, 참모장, 1왕자. 그들 사이에서 일개 귀족가 자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 대한 케일의 대답은 참으로 차분했다.
“서대륙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륙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안겨다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덩달아 자신에게도 평화가 올 테니 좀 집에서 편히 놀고 싶다.
“그걸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열심히 해서 나는 좀 움직일 일이 덜했으면 좋겠다.
케일은 제 소망을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다.
-맞다, 인간! 역시 넌 착하다!
라온의 칭찬은 무시했다.
케일은 모든 말을 끝내고 리타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정말. 공자의 말이 맞아요. 늘 옳은 길만을 가시는군요.”
케일은 리타나와 비슷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표정들에 슬쩍 왕세자 알베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살짝 멈칫했다.
왕세자는 아주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이 자식이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딱 그런 눈빛이었다.
케일은 제 마음을 알아준 왕세자에게 부드러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존이 입을 열었다.
“로운 왕국에는 참-”
그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다물었다.
왕세자와 케일.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신뢰 가득한 미소에 존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적들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 이는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리타나의 입이 열렸다. 시원시원한 목소리였다.
“위퍼 측에 식량을 지원하겠습니다.”
이는 정글이 크게 한 발 이득에서 물러섬과 동시에, 연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조금 더 깊은 개입을 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헤롤은 선한 미소로 담담히 말했다.
“추후 마법 폭탄 관련된 일은 저희가 맡고 싶군요. 그런 녀석들은 죽여야죠.”
마법을 애증하는 사람다운 살벌한 대답이었다.
케일은 슬슬 다시 활발해지는 테이블을 보며 슬쩍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가장 많이 정보를 쥔 알베르 왕세자의 주도로 회담이 잘 진행되어져 갔다.
위퍼 측에는 3왕국이 비밀리에 자금과 식량을 조달하기로 하였고. 추후 이번 전쟁 중 제국군이 위퍼 왕국 국경을 넘는 위험이 발생 시, 곧바로 정글에서 정체를 숨긴 전투조를 보내기로 했다.
더불어 죽은 마나 폭탄을 제국에서 사용할 시, 그에 따른 모든 대처 매뉴얼은 로운 왕국에서 제시하되 비용은 온전히 다른 왕국들이 제공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 외에도 겨울에 있을 고래족 싸움에 대한 지원과 북 3국의 문제까지. 대략적으로 내년 봄까지 이어지는 계획에 대한 큰 틀이 정해졌다.
“그럼 이제 맹세를 하죠.”
왕세자의 손짓에 미친 신관 케이지가 일어섰다.
그렇게 죽음의 맹세가 해안가 모두에게 새겨진 후, 회담은 종료되었다.
케일은 어느새 밤이 지나고 수평선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텔레포트 진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에르하벤이 뒤따르고 있었다.
케일은 왕세자 일행, 케이지와 함께 텔레포트 진 앞에 서서 기다렸다. 헤롤 참모장이 먼저 급히 떠나고 있었다.
지지직-
텔레포트 진이 작동했고 헤롤은 마법진 위에서 점점 흐려져 갔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케일과 헤롤이 눈이 마주쳤다. 헤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케일 공자님, 승리해서 뵙지요.”
그리고 케일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헤롤은 마법진 위에서 사라졌다. 왕세자가 케일을 보며 물었다.
“또 보고 싶다는데?”
왕세자는 케일의 떨떠름한 표정에서 그 대답을 들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케일과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둘은 곧 우바르 영지에 도착했고, 왕세자는 케일과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겨울까지 할 일도 없겠는데. 푹 쉬어. 승리라는 좋은 소식 기다리면서 말이야.”
케일은 당연한 말이기에 담담히 답했다.
“안 그래도 쉴 생각입니다.”
하지만 케일은 왕세자의 웃는 얼굴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왕세자는 이런 실없는 소리는 오랜만이네,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케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 꼭 그러도록.”
***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케일은 영상 통신구 화면이 꽉 차도록 얼굴을 들이민 툰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으아아악!
할 수 있다!
케일의 침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벌써 가을이 왔건만, 목소리들은 지치지도 않았다.
케일은 가을이 된 후 전해진 첫 소식을 듣기 위해 툰카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무슨 일이지?”
그간 케일은 왕세자와 론이 이끄는 정보 조직을 통해 위퍼 왕국에 대한 소식을 매일 확인했다.
생각보다 위퍼 왕국은 대등하게 제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제국 측은 죽은 마나 폭탄을 비롯한 모든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기에 장기전을 할 경우 자금이 부족한 위퍼가 휘청일 것이란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위퍼 왕국이 자금과 투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끊임없이 잘 조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지지부진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지지부진한 상태라는 보고를 들었다.
그래서 케일이 툰카를 보는 표정은 시큰둥했다.
-너에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다.
툰카는 말했다.
-반은 이겼다.
케일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성을 하나 뺐었다! 크하하하하!
웃는 툰카가 영상 통신구에서 살짝 물러섰다.
‘이런 미친놈.’
케일은 그제야 툰카가 피를 닦은 얼굴을 빼고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툰카의 뒤로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시체들을 쌓아두고 그 한가운데에서 영상 통신을 한 것이다. 역시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그리고 네 말대로 했다.
신나게 웃던 놈이 담담하게 한 말에 케일은 의아했다.
“내 말대로?”
-그래. 다친 병사들을 버리지 않고 데려왔다.
정말 툰카가 미친 건가?
케일은 툰카가 병사들을 데려왔다는 말에 기겁했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이상했다.
툰카는 꽤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강자는 약자를 챙길 줄 아는 아량도 있어야 하지.
정말 이놈이 미친 건가.
케일은 심각하게 툰카가 진짜 툰카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어진 툰카의 말과 그의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에, 그 고민을 한쪽으로 미뤄두었다.
-하지만 치료는 힘들 것 같다.
케일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무리 위퍼 측에 자금이 늘었어도 비싼 포션으로 모든 병사를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관이 부족하겠지.’
위퍼 왕국은 원래 어느 종교든 약세였다. 마법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 시 데려올 신관이 부족했다.
또 참으로 웃기게도 교단 측에서는 자연은 숭배하지만 신은 믿지 않는 부족민들을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관을 지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오랜 내전의 결과로 치유력과 신성력이 없는 일반 치료사들도 적었다. 마법사들이 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일은 툰카의 담담한 얼굴에 서린 아쉬움을 보았다.
-치료할 사람이 부족해. 반만 이긴 상태인데, 여기서 포션을 많이 소비할 수도 없고. 일반 치료사도 적고 신관도 없고.
그 순간 케일은 두 사람이 떠올랐다. 현재 케일의 저택에서 공짜로 먹고 놀고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미친 신관과 반쪽짜리 성자.
그리고 하나 더.
에르하벤의 레어에서 뒹굴고 있는 엘프 하나가 떠올랐다.
“음.”
케일은 팔짱을 낀 채로 고민에 빠졌다. 저 셋 하나하나가 웬만한 신관들 몇 명 이상의 몫을 했다.
고민하는 케일의 머릿속으로 라온이 말했다.
-인간, 우리 사람 구하는 건가?
라온의 목소리에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하지만 케일은 일단 툰카를 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반만 이겼다는 게 뭐지?”
이기면 이기고. 지면 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만 이겼다니?
케일의 의문에 툰카는 어색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크흠, 적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면 성을 너희들이 차지한 것이겠군.”
성 하나를 툰카가 차지했다는 소리였다.
-크흠. 큼. 차지하기는 했는데. 들어갈 수 없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케일의 눈빛을 본 툰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영상 통신구 화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시뻘건 것이 보였다.
케일은 왜 툰카가 성안이 아닌, 시체 한가운데에서 일반 병사들의 눈을 피해 영상 통신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라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인간, 활활 타오른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하늘로 향해 솟아오를 듯한 불기둥이 성을 둘러싸 성이 보이지 않았다.
-크흠, 갑자기 불기둥이 솟아오르더니 성을 둘러싸고 꺼지지가 않아.
“…안 꺼진다고?”
-그래. 그래서 현재 불기둥을 따라 병사들을 배치해 뒀지. 신기하게 저 불기둥은 성에는 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만 계속 타오르더군. 마치 성을 보호하는 장벽 같더라고.
툰카는 반쪽짜리 승리에 대해 말하며, 솔직한 심정을 친우에게 토해내었다. 그래도 케일에게 말하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냥 냅다 싸울 때와 달리 전쟁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참 많았다.
성을 둘러싼 불기둥도 그 문제 중 하나였다.
-도대체 제국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래도 반드시 해결을 내서- 음?
툰카는 케일을 보며 말을 멈췄다. 하지만 곧이어 그답지 않게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나?
케일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케일은 툰카의 말은 무시한 채 영상 통신구 속 불을 쳐다봤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해맑은 것은 물론 신이 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저거 우리가 본 그 불 아닌가?
케일은 일 년도 더 전에 보았던 불기둥을 떠올렸다.
정확히 정글 1구역만 태운 채로 더 퍼지지 않고, 비가 와도 형세를 유지하던 불기둥.
‘제기랄.’
케일은 목걸이를 매만졌다.
지배하는 물이 담긴 목걸이였다.
케일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아무래도 저 불. 저거 내가 꺼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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