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6
16화.
16화
두서없이 한혁의 과거 시절을 더듬던 경애는 어이없이 세상을 떠난 석원에 생각이 미치자 뜨거워지는 눈을 손수건으로 눌렀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며 혀를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남편을 잃고도 아들을 앞세우고도 정경애는 버텨야 한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매일 눈을 뜨며,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경애는 다짐하였다. 필경을 하고 기도를 하며 죽는 그날까지 버티게 해 달라 소원하였다. 손수건을 내려놓고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미소가 떠오른다. 한혁이다.
“그래.”
-회장님, 저녁에 집으로 가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람을 보내야 겨우 온다는 약속을 하는 게야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사하고 피곤이 좀 가신 뒤에 찾아뵈려 한다는 게 너무 늦어 버렸네요.
순한 답에 경애의 원망이 금세 녹는다.
“알았어. 예린 엄마가 뭐 해 놓을까 묻더라.”
-아무것도, 특별한 음식 필요 없습니다.
“몇 시에 올 거야 오피스텔로 차 보낼게.”
-괜찮습니다. 이사한 집 위치 알고 있습니다.
“차도 팔았다며! 걸어올 테야 ”
전화기 너머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대한민국 대중교통이 얼마나 좋은데요.
“보는 눈도 있어. 나 매정한 할머니 노릇 시킬 생각은 말아. 차 보낼 테니 맘대로 해. 거절해도 네가 직접 거절하라고.”
회장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
골목에 어스름하게 저녁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집에 연락을 넣으려 핸드폰을 들었다.
“대문 앞에서 내리겠습니다.”
기사는 뒷자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혁은 줄곧 바르게 앉아 창만 응시하였다. 기사가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잰걸음으로 뒷자리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고 싶었던 한혁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한혁이 고개를 숙이자 기사가 당황스러워하며 한 번 더 인사를 하였다. 서둘러 벨을 누르려는 기사를 제지하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좀 이따 들어가려고 해요.”
“저……”
망설이는 기사에게 한혁은 미소를 보이며 편안한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잠시만 있다가 들어갑니다.”
기사는 몸을 다시 깊이 굽힌 뒤 차 근처로 돌아갔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골목이지만 오가는 사람도 없이 조용했다. 한혁은 높은 담을 올려다보았다. 집 내부 건물의 형태도 가늠하기 어렵도록 높은 담이다. 한눈에 겨우 들어올까 싶을 정도로 계속 이어진 담장의 끝까지 길게 시선을 늘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일곱 살 한혁이 진 이사의 손에 이끌려 처음 들어서던 그 집의 담장은 지금 집만큼은 높지 않았지만, 어린 한혁에게는 까마득히 하늘까지 닿는 듯한 높이의 담장이었다. 하늘만큼 높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도 오랫동안 한혁은 집의 담장을 볼 때마다 목이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종종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잔뜩 주눅이 들었던 첫날의 기분을 생생히 느끼곤 했다. 감정이 불규칙적으로 들끓던 사춘기 시절에는 차마 그 담장 안을 들어갈 수가 없어 뒤돌아 무작정 밤거리로 나왔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한혁은 담장에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돌아섰다. 한혁의 눈에 맞은편 집 대문가에 놓인 작은 석상이 들어왔다. 노인의 얼굴은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도, 무표정하게 집을 지키고 있는 듯도 하여 오랫동안 관찰하게 하였다. 석상이 신장처럼 지키고 있는 집은 대부분 신축되어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있는 커다란 주택들이 들어찬 동네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아담한 집이었다. 내부가 반쯤 드러날 정도의 낮은 담 안에 소담한 정원을 두고 다소곳이 앉은 집은 밝혀 둔 주황색 불빛 때문인지 정겹고 따스해 보였다. 제가 들어가야 할 집의 담벼락에 기대듯이 서서 맞은 편 집을 바라보는 한혁에게 누군가 급히 다가섰다.
“아유, 도련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을 보며 한혁이 반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왜 안 들어오시고. 안 그래도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는데…….”
“동네 구경 좀 했어요.”
오 집사는 한혁의 표정을 살피면서 계속 채근하였다.
“어서 들어가세요. 회장님도 한참 전에 퇴근하셨습니다.”
“네. 들어갑니다.”
오 집사를 따라 한혁은 천천히 높은 담장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넥타이 매듭을 조금 늦추며 눈치채지 못하게 가쁜 숨을 조절하였다.
“한혁이 왔구나. 잘 지냈니 ”
현관 앞까지 연화가 나와 반겨 맞이했다.
“네. 편안하셨어요, 큰어머니 이사하느라 많이 힘드셨죠 ”
“아니야, 괜찮아.”
“제가 도와 드리지도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야, 네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아무 신경 쓸 일 없이 쉽게 잘했어.”
활짝 웃어 보이는 연화는 볼이 패일 만큼 야위었다. 장례식장에서 몸을 채 가누지도 못하며 오열하던 연화가 떠오르자 가슴에 무지근한 통증이 새삼스럽다. 차마 어깨를 빌려 주지도, 안고서 달래지도 못해 주위를 서성이기만 했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한혁을 볼 때면 연화는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었다.
괜찮다.
고마워.
좀 쉬어. 눈 좀 붙이고.
가서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밥을 좀 먹고, 응
풀썩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연화가 한혁을 챙겼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한혁 역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들어가자, 회장님 기다리셔. 시장하신가 봐.”
연화의 미소는 언제나 변함없이 온화하였다. 단정하고 정확한 발음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음성과 어우러져 따스하면서도 격조가 있었다.
“응 ”
묻는 연화에게 한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재에 계신가요 ”
“응, 이쪽이야.”
연화가 안내하듯이 앞장섰다. 밝은 불빛 아래 찬찬히 바라보니, 이제 연화에게도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아버지가 떠나고 많이 상한 후라 더욱 그럴 테다. 처음 한혁이 보았을 때처럼 고운 새색시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한혁에게 자동차 모형을 내밀던 우아하고 귀한 모습의 그녀를 지금도 찾을 수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해도 가느다랗고 지적인 얼굴선과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눈빛만은 여전히 그대로일 테니까.
정 회장과 큰어머니 연화 그리고 한혁 세 사람의 조용하고 별다를 것 없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무 음식도 준비하지 말라 했지만, 연화가 애썼음이 분명한 상차림이었다. 몇 번이나 간장을 끓여 내, 짜지 않고 잡내 없이 깔끔하게 맛을 들인 게장은 주황빛 신선한 알과 속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군침이 돌게 하였다. 심심하게 간이 밴 자반 굴비는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구워졌다. 향긋한 봄나물 숙채와 새콤달콤하게 무친 생채는 한 번씩만 맛보아도 밥공기를 비울 만큼 종류가 많았다. 밀가루 옷을 얇게 입힌 연근전이나 신선한 생새우를 풋고추와 홍고추와 같이 하나하나 칼로 다져 완자처럼 빚어 구운 전, 등심을 얇게 저며 달걀 물을 입혀 지져 낸 육전 모두 한혁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시원한 배추 물김치는 연화의 걱정과 달리 맛이 제법 들었다. 연화는 분명 며칠 전부터, 그리고 한나절 내내 긴장하며 주방을 지켰을 테다. 한혁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밥을 먹었다. 윤기가 도는 쌀밥을 한 그릇 비우면 연화의 손짓으로 새 밥그릇이 준비되었다. 연화는 줄곧 한혁의 숟가락과 젓가락의 움직임만 살피기라도 하는지 국그릇이 바닥을 보이기도 전에 따끈한 국을 새로 가져오라 하였다. 한혁은 묵묵히 연화가 준비한 모든 음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다 먹었다. 완벽한 식사에 부족한 것은 대화뿐이었다.
“예린이는 늦게 오나 봐요.”
미술 전공으로 예고에 다니고 있는 예린이 벌써 3학년이라 그랬던가, 아직 귀국 후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고3이니까 많이 바쁘지. 오늘은 학교에서 실기 수업이 늦는 날이야.”
회장이 서둘러 답하였다.
“예린이 잘 지내죠 아직 얼굴도 못 봤네요. 전에 호텔에서 뵀을 때도…….”
아쉬운 마음에 덧붙였는데 연화가 지나칠 만큼 미안한 내색을 하며 사과하였다.
“미안해, 그날도 실기 시험 앞두고 학원에 있느라.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에는 꼭 예린이도 같이하도록 할게.”
“아니에요, 큰어머니. 통화는 몇 번 했습니다. 공부하고 실기 준비하느라 많이 힘들 텐데요. 다음에 제가 시간을 맞춰 볼게요.”
예린이 이야기를 끝으로 어색한 침묵은 다시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다과까지 물리자 연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님, 한혁이 잠깐 위층 좀 둘러보라 할게요.”
“아, 그래. 그러려무나.”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흔쾌히 답하였다.
“나는 오늘 좀 피곤하네. 일찍 자리에 들어야겠어. 한혁이는 천천히 위층 둘러보고, 쉬다가 가.”
한혁이 회장 옆으로 다가갔다.
“많이 피곤하세요 ”
살피는 눈을 보며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식곤증이야. 너 오느라 애미가 얼마나 더 정성을 들였던지 식욕이 돌아 좀 과하게 먹었어. 노곤하니 꾸벅꾸벅 졸리는구나.”
침실까지 모시려는 한혁을 향해 손까지 저으며 마다하였다.
“어서 올라가 봐.”
전실로 이어지는 통로 앞에서 한혁은 회장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하였다.
위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은 거실을 지나 양측으로 대칭을 이루는 길고 완만한 곡선 형태였다. 계단은 칸 높이가 낮은 반면 난간은 높고 촘촘한 간격이었다. 난간을 따라 쉽게 쥘 수 있도록 고안된 긴 손잡이가 손이 닿을 만한 높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고정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도 주의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경애를 위한 것이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를 때마다 할머니의 연세와 건강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더 무거워졌다.
2층은 저번 집을 고스란히 옮긴 듯한 1층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분위기였다. 소응접실을 지나 연화는 오른편으로 난 문 하나를 열었다. 하나의 방이라고 하기엔 무척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고급스런 도자기로 장식된 작은 거실을 겸한 서재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는 침실이 있었고 그 옆으로 드레스룸과 욕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드러났다. 분명 처음 설계했을 때는 석원과 연화가 사용할 마스터룸이었을 것이다. 카펫의 질감과 커튼의 소재나 색상, 공들여 디자인을 고르고 주문했을 책상과 소파까지, 완벽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게 관리되는 그 공간에 부족한 것이라고는 사람의 온기뿐인 듯했다.
“한혁이 네 방이야.”
“저는…….”
한혁은 답을 찾지 못해 연화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불편한 마음을 읽었는지 연화는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들어오라는 말, 아니야. 언제든 괜찮아.”
연화가 서재 공간에 있는 티 테이블 의자에 앉아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혁도 공손한 자세로 마주 앉았다.
“방은 마음에 들어 취향을 묻지도 못하고 내 맘대로 했어. 뭐든 맘에 들도록 바꾸고 고쳐 줄게.”
“아닙니다. 저한테 이 방은 과분해요.”
“과분하다니. 이제 네가 회장님 다음 이 집 주인인데.”
“큰어머니.”
한혁이 눈을 들어 연화를 어렵게 바라보았다. 예의 바르고 침착하고 그리고 어색해하는, 한혁과 연화의 만남은 늘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시고 난 뒤…….”
연화는 아직 남편의 일을 입에 올리기가 힘겨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비통함을 참아 내느라 턱이 가늘게 떨리고 마른 목선에 뼈가 도드라졌다.
“큰어머니.”
한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손을 잡거나 포옹하여 위로할 수도 없고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무슨 말로 아픔을 덜어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화는 당황해하는 한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애써 슬픔을 감추고 연화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혁아, 그이는, 네 아버지는…… 널 정말 많이 사랑했어.”
겨우 마음을 먹고 고해하듯 한 말인데, 한혁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었다.
“내가,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 그 사람은 내 맘 다칠까 봐 더……. 그래서 너한테 한 번도 제 속마음을 못 보이고 결국 그렇게 갔어. 나는, 그 사람 맘에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너는 또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면 너무 죄스럽고 미안해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의연해 보이려 했는데……. 해묵은 죄책감과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아무리 없애려 노력해도 결코 다 지울 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원망, 지리멸렬한 질투까지 모든 감정이 일시에 연화의 가슴을 후려쳤다. 차마 입 벌려 표현할 수 없었던 고해성사의 과정은 지나치게 간단하여 허무했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해. 깊이 사랑해. 누구보다 더.
왜 조금 더 빨리 말해 주지 못했을까. 연화는 남편이 남기고 간 배다른 자식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