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5
15화.
15화
“그리 착하던 녀석이 말이야……”
한혁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정 회장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혁은 사춘기가 지나면서도 집에서는 여전히 착하고 점잖은 아이였다. 경애에게는 물론, 다른 집에서 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얼굴을 대하는 아버지나 큰어머니, 터울이 한참 지는 배다른 여동생에게도, 집안의 고용인들에게까지 더없이 깍듯했다. 단지 제 애비나 연화에게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종종 집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친구들과 전화로 대화하는 걸 들으면 상당히 싱거운 소리도 잘하고 유쾌한 말도 잘하는 놈인데……. 경애에게 가끔 싱긋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점점 횟수가 줄어 갔다.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사장님이라, 할머니를 회장님이라 부르면서 벽을 만드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미를 닮아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 외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뭐 하나 두드러지는 행동 없이 잘 커 간다고 믿었다.
진 부장이 곤혹스런 얼굴로 한혁에 대해 미루던 보고를 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몹쓸 아이들과 어울려 한 번씩 사고를 친다는 직설적인 표현에도 제 귀를 의심하였다. 고운 외모에 어울리는 움직임과 웃음, 지나치게 조숙한 배려 외엔 한혁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신중한 아이였다. 성적은 놀랄 만큼 좋았다. 그럴 리가 없다. 남학생 간의 기 싸움, 서열 다툼이었겠지.
“그 또래 사내아이가 그렇지요. 한혁이 생각보다 더 씩씩하네. 여자아이처럼 내성적이지 않아 다행이야.”
경애는 한혁의 일탈을 자연스레 커 가는 과정이라 치부하였다.
하지만 일탈은 멈추지 않고 강도를 더해 갔다. 중학교 마지막 학기부터 시작하던 외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며칠씩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세림의 배경을 감춘 학교에서조차 한혁에게 제재를 가하는 일이 고민일 만큼 성적은 월등한 톱이었다. 진 부장이 전하는 학교에서 일상적인 모습은 위화감이 없었다. 외박을 하고 학교에 지각한 날조차 교복과 얼굴에 온통 싸움의 흔적을 묻히고 와서도, 언제나 고요하게 제일 뒷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입을 떼지 않고서 수업을 듣는다 하였다. 모든 일은 방과 후에 벌어졌다. 경애는 한혁이 찢어지고 단추가 떨어지고 흙먼지와 누구의 피인지 모를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교복 차림으로 한밤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아도, 입에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겨도 도무지 깡패 패거리와 어울려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끝없이 치솟는 불안 속에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서로를 속일 수 있는 한계는 금방 도달하였다.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않고 학교도 나가지 않은 후에 진 이사에게 잡혀 온 한혁을 경애가 작정하고 회초리를 들고 심하게 꾸중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한혁은 온통 다리에 붉은 자국으로 피가 맺히게 맞아도, 매 맞은 상처가 터져도 눈 한 번 치뜨지도 않았다.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반항 서린 눈 한 번 뜨지 않고는 묵묵히 맞았다.
‘꼴도 보기 싫어.’ 하는 말에 절을 꾸벅하고 ‘회장님,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잘못을 빌고는 절뚝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초조해하는 쪽은 늘 경애였다.
한혁이 혹여 더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떡하나, 원망만 커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방으로 들어가니 한혁은 책상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봄이 지는 계절이었다. 열어 둔 한혁의 방 창에서 정원에 한 계절 피고 지던 꽃 향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리 좀 와 봐.”
침대에 끌어다 앉히고, 바지를 걷고 터져 오른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괜찮아 많이 아프지 ”
주저하며 물었지만, 한혁은 그저 씨익 웃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회장님, 운동 좀 하셔야겠어요. 영 힘이 없던데요.”
“그래, 나 힘없어. 그러니까 말 들어. 다시는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마. 술 마시지 마. 쌈박질하지 마. 네가 뭐가 부족해 아니, 뭐가 필요해 필요한 거 다 해 줄게. 바람 쐬고 싶으면 학교에 말해 놓을 테니까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 어디 가고 싶어 내가 내일이라도 출발하게 해 놓을게.”
한혁이 경애의 손을 잡았다. 연고가 손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연고만 보고 있자니 한혁이 조용히 불렀다.
“……할머니.”
“응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
한혁은 답 없이 고개를 저으며 웃기만 하였다. 경애의 야윈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아유, 우리 할머니. 할머니.’ 몇 번 중얼거리며 웃었다. 경애는 웃는 한혁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아비든 할미든 대들고 반항이나 하면 좋으련만 한혁은 집에서는 여전히 바른 행동의 손자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눈에 더 이상 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외모는 길 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다 돌아볼 정도로 빛이 나게 아름다웠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밝은 빛이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빛나던 웃음도 점점 사라져 갔다.
여름방학 동안 한혁은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속이 타다 못해 남은 것이 없다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두통약을 삼키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미팅 하나를 취소해야 하나 싶은데, 문득 연락도 없이 기훈이 회사로 찾아왔다.
“고모님, 한혁이 미국 보내 주세요.”
기훈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서 말하였다. 이제 대학 신입생이 된 기훈은 성인처럼 의젓한 자세였다.
“무슨 말이야.”
한혁은 지난밤 온통 성치 않은 꼴로 기훈과 진 부장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들어왔었다. 집에 들어온 건 며칠 만이었다.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그냥, 한혁이 미국에 보내 주세요. 여기 있기가 많이 힘든가 봐요.”
“어림없는 소리. 여기서도 사고 치는 놈 뭘 믿고 보내 ”
“여기 더 있으면, 이대로 더 두면…….”
“뭐.”
기훈은 망설이던 끝에 입을 겨우 떼었다.
“한혁이가 스스로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보내 주세요.”
스스로 무슨 일……. 기훈이 차마 입으로 올리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여과 없이 정 회장의 가슴에 닿았다. 그대로 얼음을 삼킨 것처럼 배 끝까지 시려 왔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한혁의 생모가 중학교 때부터 이따금 학교 앞에 찾아왔었고 그녀를 알아본 몇몇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혁의 존재에 대해 뒷소문이 무성했다는 것을.
기훈이 회사를 찾아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집으로 들렀던 김 박사로부터 한혁이 이제 상처도 거의 아물고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경애는 그날 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한혁의 방에 들어갔다.
“회장님.”
한혁은 침대에 길게 기대어 앉아 시선을 멍하니 벽에 두고 있다가 놀란 듯이 벌떡 일어섰다. 푸른색 커튼, 회색 책상, 짙은 월넛 침대에 파란색 베딩. 한 색 계열로 꾸며진 공간이 그날따라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한혁을 도로 침대에 앉히고 옆에 걸터앉았다.
“한혁아, 기훈이가 회사에 찾아왔더라.”
기훈이라는 말에 한혁이 쳐져 있던 고개를 들어 정 회장을 바라보았다.
“미국 가고 싶어 ”
한혁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 집이 불편해 내가 싫은 거야 니 애비가 차갑게 구는 게 원망스러워서 그래 ”
“아닙니다.”
한혁은 속을 비추지 않는 까만 눈으로 경애를 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큰어머니가 나 모르게 눈치 주니 예린이가 못되게 굴어 뭐가, 대체 누가 싫은 거야 ”
“회장님, 누구도 사장님이나 큰어머니도 그리고 예린이도. 아무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왜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거야 ”
“죄송합니다.”
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속을 들어 보리라, 단단히 야단을 치리라 작정했지만 맥없이 떨어지는 얼굴과 깨무는 입술 때문에 가슴이 마른 짚에 불을 놓은 것처럼 타올랐다. 뜨거운 멍울이, 잡힐 듯이 목을 눌렀다.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때려 부수고 얻어터지고 해야 할 정도로 도저히 못 넘기는 게 속에 있으면 말이라도 해 보라고.”
“그런 거 없습니다, 회장님.”
“내가, 내가 너한테 회장이야 할미야, 할머니.”
차갑고 단정한 한혁의 대답에 기어이 울먹이는 소리가 나왔다. 한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주책없이도 다잡으려 할수록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한혁은 깨물어서 핏기 오른 입술을 힘겹게 떼었다. 거칠고 낮고 그리고 아프도록 시린 목소리였다.
“정말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너무 힘들어요. 할머니. 이렇게 할머니 옆에서 사장님 눈에 큰어머니 눈에 힘들고 성가신 존재로 있는…… 제 자신이 너무 견디기 어렵습니다.”
“누가, 누가 널 성가시다 그래 니 애비가, 큰어머니가 그러든 내 당장 불러들여 혼구멍을 낼 테니.”
정 회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에여 왔다. 순하게 착하게 바르게만 행동하던 아이가 빛을 잃어 가는데 웃음이 말라 가는데, 할머니라 제대로 해 준 것 하나 없는 것 같아 깊은 자책감이 마음을 후벼 팠다.
“아시잖아요. 아무도 제게 그러지 않아요. 그러지 마세요.”
“넌 정경애 큰손자고 최석원 장자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세림 후계자야. 네가 왜 그렇게……. 내가, 내가 잘못했다.”
억지로 팔에 무게를 실어 버텼지만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리 입술을 다물어 보아도 끅끅 울음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무안해서 몸을 돌리려는데 한혁이 팔을 뻗어 경애를 살며시 안았다.
“할머니…….”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울지 마세요. 제가 뭐라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림 후계자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받아 주신 것만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애가 오히려 위로하듯 정 회장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예린이도 있고 큰어머니께서 또 예린이 남동생도 보시겠죠. 저는 어차피 기현 당숙이나 기훈 당숙 같은 자리는 아니잖아요.”
경애는 고개를 들어 한혁을 보았다. 한혁의 눈은 차가운 심연처럼 끝없이 깊었다. 나이를 먹어도 크게 변하지 않은 얼굴에 처음 데려오던 어릴 적, 리트리버를 풀어 까르르 웃으며 빛이 나게 뛰어다니던 천사 같은 모습이 언제나 겹쳐졌다. 그랬기에 정 회장은 그 아이의 눈이 얼마나 어둡게 가라앉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가슴속 응어리를 풀 길이 없어 겨우겨우 내는 목소리가 얼마나 낮고 거칠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미국으로, 가라.”
경애는 울음을 삼키며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 냈다.
“미국 가고 싶다며.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회장님 ”
한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가라앉은 눈에서 희미한 빛이 흔들렸다. 기쁨과 불안, 추측과 확인, 의심과 두려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다 이내 사라졌다.
미국으로, 가도 되나요.
혹시…… 저를 이제 버리시는 건가요.
할머니, 저를 포기하시는 건가요.
차마 묻지 못하는 물음을 읽으며 경애는 한혁의 얼굴을 쓰다듬고, 팔을 쓸어 보고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붙잡았다.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삼키고 경애는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를 만들었다.
“내가 하나만 부탁하자.”
“네.”
“정경애 장손자인 거 잊지 마라.”
“……네.”
“그리고 자주 웃어. 웃는 모습이 좋아.”
경애가 물기 어린 눈으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한혁이 따라 웃었다.
“할머니는 정말 못 웃는 거 아세요 ”
“내가 ”
“그러니까 사람들이 호랑이 회장님이라고 하잖아요. 저보다 할머니가 웃는 연습 하세요.”
한혁은 경애를 향해 맑은 웃음을 보였다.
정 회장은 못내 불안해하며 한혁을 미국 기숙사 사립학교에 수속하고 사람들을 붙였다. 한동안 밤잠을 설치도록 마음을 졸였는데 한혁은 그곳에서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반년쯤 지나 한국에 들른 한혁의 모습이 많이 밝아져 있어서, 바람대로 잘 웃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정 회장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비록 눈을 가린 어두운 그림자는 그대로였지만, 한혁은 살림을 합쳐 회장과 같이 살게 된 석원 내외와도 한 집에서 한결 편안하게 지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따금씩, 한혁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예린이 앞으로 선물을 챙겨 부쳤다. 집에서 시켜 주지 않는 사치를 하는구나 싶은 고가의 물건도 있고 어디서 사내 녀석이 이런 걸 다 발견했나 궁금할 만큼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있었다. 예린이는 선물 포장을 풀 때마다 폴짝폴짝 뛰었다. 연화나 경애에게도 때마다 잊지 않고 신경 써 골랐을 선물을 하였다.
‘어머님, 어쩜 한혁이는 이렇게 자상하죠. 제 맘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마음에 드는 걸로만 보내와요.’
연화는 한혁이 보내 준 스카프나 카디건,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조용조용 칭찬하곤 했다.
‘그러게. 내 거보다 네 게 항상 더 좋아. 나는 늙었다고 대충 고르나 봐.’
‘어머, 아니에요, 어머님.’
연화는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붉혔다.
‘너 나 모르게 용돈도 많이 부치지 ’
‘아뇨. 조금만 줘요.’
‘아니긴, 녀석이 내가 돈 줄 때마다 괜찮다고 돈 많다고 하던걸 어디서 났겠어.’
연화는 경애가 놀릴 때면 곤란한 듯 자리를 피하였다. 연화가 잘하기도 했지만, 한혁도 연화에 대해서는 늘 고분고분하여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한혁이 대학에 진학한 후, 회장이나 석원이 주는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공식적으로 거절한 이후에도 연화가 주는 용돈만은 거절하지 못하고 받곤 했다. 1년에 두어 번 잠시 머무르다 가는 아들을 석원은 못내 안타까워하였다. 사람을 시켜 한혁이 생활을 내내 듣는 눈치였다. 가끔씩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어릴 땐 작다 싶었는데, 저보다 키가 더 커서 이제 백인들 사이에 있어도 작지 않네요.’
‘키만 크니 인물도 군계일학이다.’
석원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한혁이가 일을 상당히 잘하나 봅니다.’
‘세림에는 아무 쓸데없는 회사에서 뭘 한다는 거냐.’
‘아니에요, 회장님. 한혁이 부서 핵심 인재만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림에 차세대 혁신은 IT와 유통의 통합에서 올 겁니다.’
정작 한혁을 만나면 석원은 마음과는 달리 어색해하였다. 머뭇거리던 시선과 어색하게 내밀던 손,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포옹 한 번 없이, 석원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