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8
48화.
48화
서훈은 차마 수화기를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몸이 대신 아픈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무것도 못 먹고 하루를 꼬박 앓던 서진은 탈진 상태로 결국 병원으로 보내졌다. 피검사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그 몸으로 출장을 가서 인수 합작 건 협상을 하고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바보 같은 작은누나는 그 지경이 되고서도, 분명 마음이 버석거리며 타오르도록 한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병실을 찾아온 사람은 정기훈이었지만 서진은 얼굴도 보지 않겠다고 한사코 거부했다.
“일전에 만났던 바로 가면 될까요 10시는 되어야 갈 수 있습니다.”
-알았어. 기다릴게.
서훈은 미간을 주먹으로 꾹꾹 누르며 수화기를 내렸다.
“고등학교 선배예요. 몇 명 같이 술자리에 있나 봐요.”
호기심 어린 질문과 시선에 잘 만들어진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서훈은 바에 들어서면서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10시 5분 전이다. 두리번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음영이 드리워진 한혁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수 없을 만큼 완벽한 남자다. 누나가 성공시킨 합작 건으로 저 남자의 등에 날개가 달릴 테다. 어울리지 않는 고독이라니. 서훈은 다가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제가 늦었나요 ”
“아니. 앉아.”
한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일은 잘되고 있어 어디, 지금 경재 형 회사, 동양 한다고 했던가.”
“네.”
한혁이 서훈 앞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손으로 술잔을 받은 서훈이 입에만 대었다 내렸다.
“윤 팀장 회사를 안 나오는데…….”
한혁은 잔을 거의 다 비우며 서훈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입원했습니다.”
한혁이 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핏기 가신 얼굴로 물었다.
“왜. 어디가 얼마나 안 좋아 ”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내일쯤 퇴원한다고 고집을 부리니 다음 주쯤은 회사에 나가 일을 마무리…….”
“심각하지 않은데 입원을 해 어디야.”
한혁은 서훈의 말을 자르고 벗어 둔 양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양복에 팔을 꿰어 넣는 남자를 보며 서훈이 쓰게 웃었다.
“우습네요. 제 누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감정인지, 어떤 생각인지. 서진 누나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혁은 답 없이 시선을 피하였다. 이를 악다문 채로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병원 어디야.”
한혁이 일어서서 재킷 단추를 채우며 물었다.
“병원에 가시려고요 ”
서훈이 비딱하게 올려다보았다.
“어디야.”
“걱정 마십시오. 내일이나 늦어도 월요일엔 회사 나갑니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도 삭스 일 걱정하던데요. 그 몸을 하고서 병원에서는 미국 출장이 놀라운 일이라고 하더군요. 너무 몸을 혹사시켰답니다. 심장에도 무리가 갔을 텐데, 비행기에서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죠.”
“병원 어디야, 말해!”
서훈이 술잔을 비우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렸다.
“윤서훈, 내가 지금 병원 수배해서 찾아 ”
“고작 일주일도 안 되어 이럴 거면서.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서 보냈습니까 사람 하나 두고 뭐 하는 짓인지.”
화를 참느라 서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훈 형…… 다녀갔나 ”
“네, 그럼요.”
한혁의 얼굴이 확연히 굳는다. 서훈이 빈정거리며 일어섰다.
“그래서 이제 또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병원엔 찾아가지 않는 걸로 ”
“아니.”
한혁이 고개를 저었다.
“정기훈 상무, 누나 입원실에도 못 들어왔어요. 필사적으로 거부하던데요. 뭘 그렇게까지 모질게 하나 싶을 만큼. 선배님 때문이겠죠. 당신 등에 날개 달아 주겠다고 제 몸 깎아 가며 일했어요. 그건 인정해 주세요. 대체 나는 이해가 안 돼. 그렇게까지 해냈는데, 아직도 누나 마음 의심하십니까 아니면 얽힌 관계가 감당하기 버거운 겁니까.”
한혁이 대꾸를 하지 못하고 서훈을 쳐다보았다.
“대답해 주시죠. 이 밤에 나까지 들쑤시며 누나를 찾아야 할 이유가 뭡니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확인입니까 혹은 아직 더 몰아붙일 일이 남았습니까 ”
한혁이 속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떼어 냈다.
“네 누나한테 할 말이 있어. 한 번만 만나게 해 줘. 부탁이야.”
서훈이 한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징그러울 만큼 자기 통제를 완벽하게 하는 남자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린다. 서훈은 한혁의 눈에 비치는 고통을 읽으며, 서진의 눈을 떠올렸다. 서진은 병원에 간 이후로도 밥을 넘기지 못했다. 괜찮아, 서훈을 보면 억지로 웃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이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서훈은 서진의 눈물을 못 본 척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허망하게 학업을 그만두고도 아버지를 못 보고도, 정기훈을 그렇게 잃고도 뉴욕에서 만난 서진은 서훈에게 상쾌한 웃음만 보였다. 한혁이 전화했던 그날 밤 서진은 끝내 제 어깨를 빌려 흐느꼈다. 그의 손에 뜨거운 눈물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훈은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혁에게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병원에서 쉬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라면 수배를 해서 찾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서훈을 한혁이 붙잡았다.
“윤서훈!”
서훈이 돌아서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난 당신이 싫어. 사람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 어떻게 뻔뻔하게 누나 앞에 다시 가겠다는 거야 당신이든 정 상무든 우리 누나, 함부로 대하지 마. 누나 당신 회사도 나올 테니.”
윤서훈, 한혁이 갈라진 음성으로 서훈을 다시 불렀다.
“미친놈 같겠지만.”
한혁이 얼굴을 찡그렸다. 몇 번이고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꾹꾹 삼켜 내더니 입을 열었다.
“뻔뻔하게도, 내가 네 누나가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반쯤 돈 것 같아. 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네 얼굴에서도 내내 윤서진만 찾아. 눈이 닮았나, 눈동자가 비슷한가, 입술이 닮았나. 솔직한 말투가 닮았나, 윤서훈, 내가 윤서진이 너무…… 보고 싶어.”
서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처럼 매달리는 남자에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가더라도 잠들었을 겁니다. 계속 잠을 못 자서 저녁에는 수면제를 투여하는 것으로 알아요.”
한혁이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세요. 이 시간에 보호자 없이 못 들어갑니다.”
서훈이 바닥만 보며 말했다.
침상에 붙은 하얀 불빛 조명 아래, 흰 시트보다 더 창백한 얼굴의 서진이 눈을 감고 누워 있다. 한혁은 천천히 서진에게 다가가 손을 쥐었다. 언제나 온기를 나누어 주던 그 손이 마치 생명이 없는 차가운 도자기처럼 조금이라도 힘을 더하면 바스러질 것만 같다.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만지자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녀에게 너무 커 보이는 환자복의 네크라인 위로 쇄골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조심조심 쓰다듬자, 손이 닿는 어깨가 너무 가늘었다. 언젠가 온전히 그의 얼굴을 묻어 위로를 받던 그 어깨가 초라하고 가냘파서 한혁은 손을 거두지 못한다. 한 줌도 안 되게 잡히는 어깨를 쓰다듬으며 한혁은 숨을 한 번에 뱉어 내지도 못했다.
잔인한 소리를 내지르는 그를, 서진은 원망도 분노도 없이,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서진의 눈물 맺힌 눈동자가 가슴을 후벼 판다.
“서진아…….”
파리한 얼굴에 몇 번이고 망설였던 손을 올렸다. 차마 한 손으로 쓸어내리지도 못해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차가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어 언젠가 서진이 그랬던 것처럼 체온을 나누었다. 차가운 손에 입을 맞추고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꿈결인 듯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한혁이 얼굴을 들었다. 새벽까지 침상 옆에 앉아 서진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머리를 묻고 설핏 잠이 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한혁이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상체를 조금 일으켜 앉은 서진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 도자기 인형처럼 핏기 없는 얼굴은 여전했지만 포근한 눈길이다. 한혁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서,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간이 꽤 되었어. 출근해야지.”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던 손이 목덜미를 스치며 떨어졌다.
“몸은 어때 ”
“지금은 좋아졌어.”
“많이 아팠어 ”
“좀.”
서진은 침대 시트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들지 않는다.
“너무 무리하게 일을 시켰어.”
“아니야. 일은 할 만했어. 성과가 좋으니 보람도 있고.”
서진이 검지로 시트를 문지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떼어 냈다.
“나는 다 잘된 일이라 생각해.”
서진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회사 가 봐. 나는 오늘 오후나 다음 주에 출근할게. 그리고…….”
서진이 한혁의 눈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이놀즈 이사가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세림이랑 완전히 합의되고 계약 마무리될 때까지는 내가 컨택 포인트가 되어야 할 거야. 무리 없이 진행될 테니, 일이 주…… 나는 그때까지만 회사 있을게.”
“서진아, 너…….”
“한혁 씨.”
서진이 한혁의 말을 끊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병문안 와 줘서 고마워. 이제 가 봐.”
서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하였다. 한혁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트를 꼭 말아 쥐느라 뼈가 불거진 야윈 손 위로 차마 손도 뻗지 못한다. 서진이 깊이 숨을 들이켠다.
“가. 이제 가라고, 최한혁.”
한혁을 바라보지 않으며, 서진은 소리 지르듯 말했다. 꾹 다문 서진의 아랫입술이 떨린다.
“서진아.”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면서.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면서!”
서진의 시선이 이윽고 한혁을 향했다.
“나는, 이 순간조차 너를 믿고 싶은데. 잔인하고 못돼 먹은 너를, 내내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고 또 기대하고. 또 더 기대하고. 이 순간에도 기대는 커지고.”
서진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는 내가…… 지겹다.”
한혁이 서진의 손을 떼어 냈다. 서진이 잡힌 손을 뿌리치려 애쓰지만, 놓아주지 않는다.
“뭘 기대하는데, 이런 나한테.”
서진의 입에서 억눌린 한숨이 나왔다.
“몰라.”
“내가…… 만약 널 마지막까지 이용한 거라면, 어떻게 할 건데.”
“상관없어. 내 마음으로 내 판단으로 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최한혁 상무 아니더라도 삭스는 성사시키고 싶었어.”
“내가 너를 다시 이용한다면.”
“괜찮아. 그 역시 내 마음과 내 판단으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내 능력이 필요하다면 이용해. 내 감정을 이용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나는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힘주어 다물었던 입을 떼며 한혁은 물었다.
“너는 왜, 나를 버리지 않아.”
“그것도 내 맘이야.”
“난, 그 사람에 비하면 엉망진창이야.”
“상관없어. 내가 그 엉망진창을 사랑하나 보지.”
한혁이 고개를 저었다.
“서진아, 잔인하고 못돼 먹은 나를, 버려도 돼. 포기해도 좋아.”
“그럴까 ”
서진이 담담한 눈으로 한혁을 바라보았다.
“너 따위 버릴까 ”
한혁은 답하지 않는다.
“깨끗하게 지우고 몽땅 도려내고 긴 꿈이었네 하며 모르는 척 살까 누군가와 다시 사랑하고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꿨는지조차 잊어버리고서!”
“그렇게 해. 그래도…… 좋아.”
“최한혁, 나는 너를 묻고 있어. 그러니 답을 해.”
서진이 한혁을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직 네 생각만 하고, 네 마음으로 답해. 내가 널 버리길 원하니 ”
한혁은 입을 열지 않는다.
“나한테 누구보다 다정했던 너를, 나에겐 늘 햇빛처럼 눈부신 사람을…… 나한테 잔인하게 굴었던 너를,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너를, 내가 먼저 포기하고 먼저 버릴까 ”
꾹 다문 입술 아래로 턱이 떨린다.
“답해 줘, 최한혁.”
한혁은 몇 번이나 속 입술을 깨물어 감정을 억누른다.
“내가 너 버리면, 너 어떻게 살래. 후회되고 미안해서 너 어떻게 살 건데 괜찮다고 거짓말하면서 살 거야 늘 그랬던 거처럼 ”
서진이 손을 뻗어 한혁의 주먹 쥔 손을 감쌌다. 익숙하게 참아 내는 얼굴을 보며 손을 올렸다. 뺨을 어루만지는 순간,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왜 울어.”
서진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서진의 손을 적시며 한혁은 아이처럼 울고 있다. 서진은 붉어진 콧날과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그러니, 말해 줘.”
한혁이 바싹 마른 입술을 떼고 갈라진 음성으로 말하였다.
“날 버리지…… 마.”
“그리고 ”
“사랑해. 내 곁에 있어 줘.”
어깨를 들먹이며, 입술을 떨며, 한혁이 고백한다. 서진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까이 와. 응 ”
서진이 팔을 벌렸다. 한혁이 아이처럼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다독였다. 서진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정수리에 뺨을 대었다.
“최한혁, 넌 나한테 빛이야. 그 빛이 너무 탐이 나 처음부터 거리를 두려는 너를 내가 붙잡았어. 너의 경고를 나는 지킬 수가 없었어.”
한혁이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눈물이 남은 눈가를 서진이 가만히 닦아 주었다.
“나는……당신의 말 들어주지 못해서, 당신을 탐을 내서, 그래서 나 때문에 아프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래. 나는 후회 안 해. 몇 번을 되풀이해도 나는 너에게 다가가고, 너를 욕심내고 또 사랑에 빠질 테니까. 언제나 나는, 너야.”
서진이 젖은 뺨에 마른 입술을 붙였다.
“서진아,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너무 많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다시 흘러 한혁의 뺨에 닿아 있는 서진의 입술을 적셨다. 젖은 눈에 입을 맞추며, 서진이 속삭였다.
“아프지 않아, 한 번도 그러지 않았어. 내 애인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이야.”
서진의 뺨에도 눈물이 흐른다.
“용서해 줘, 서진아.”
한혁은 서진의 가느다란 손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