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26
26. 자그마한 꼬마 팬
서울 S병원. PM 7:59
블라인드로 가려진 1인 병실은 굉장히 넓었다.
“그 아이는.”
“죄송합니다, 마스터. 계속 통화를 시도하고는 있습니다만…….”
검은 정장을 빼입은 남자는 면목 없다는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가.”
흰 환자복의 남자, 귀훈. 한때는 한국 최고의 헌터라고 불리었던 S급 헌터이자 늑대의 늙은 주인이다.
그가 느릿느릿 손짓하자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황급히 블라인드를 거두었다.
병원 최고층의 병실답게 반짝반짝한 서울 야경이 창밖에 융단처럼 깔렸다. 마치 별이 박힌 밤바다 같았다.
“시우가 요즘 헌터를 키우고 있다고.”
“예.”
귀훈이 운을 떼자 곁에 선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미리 인쇄해 온 사진을 내밀었다.
평범한 여자였다. 단, 검은 드레스에 검은 양산을 제외한다면.
“……컨셉 헌터?”
“그런 것 같습니다.”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컨셉 헌터를 키운다는 말이지? 듣기로는 F급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건.”
말문이 막혀 버린 남자 뒤로, 또 한 명의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 길드의 간부, 이하균이었다.
“평범한 F급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조사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귀훈의 눈빛이 변했다. 동시에 그가 팔에 꽂혀 있던 링겔을 뽑아 바닥에 팽개쳤다.
타악!
“지금 내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나?”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선 이들은 그를 부축하고자 했으나, 그는 그들을 뿌리치고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로 섰다.
늙고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는 대한민국의 두 번째, 아니 첫 번째 S급 헌터로 최강이라 불리던 남자였다.
하얗고 수수한 환자복에 가려지지 않는 풍채, 푹 파인 눈가에서도 그 패기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게 뿜어져 나왔다.
“내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건 다들 잘 알겠지.”
“예, 마스터.”
“일분일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힐끔 땅에 떨어진 사진을 향한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희한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불편한 느낌의 여자.
이유라.
그녀를 주시해야 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난 은하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이 옷도 꽤 오랜만이네.’
최근에는 뚜렷한 헌터 활동 없이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흑염의 프린세스 세트’를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종이 가방에 그것들을 챙기며, 은하는 새삼스레 화려한 디자인들에 심심한 감탄을 했다.
시우의 말대로, 케이블 TV 방송국 온헌트에서 여름 특집으로 기획한 에 흑염의 프린세스가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녹화 날이었다. 녹화를 위해서는 ‘흑염의 프린세스’가 되어야만 했다.
딩동─
때마침 울린 벨 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좋은 아침입니다.”
정장 차림의 제휘가 들어왔다. 방송국에 가는 날이라 그런지 평소와 달리 빼입고 있는 모습이 꽤 낯설었다.
하지만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제휘뿐만이 아니었다.
“왜 그리 봐요?”
“아, 죄송합니다. 그, 드레스 차림이 아닌 헌터님은 처음 보는지라. 하핫.”
제휘는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확실히 그편이 눈에는 덜 띄겠습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어차피 녹화 장소에 도착하면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어야 하겠지만, 오고 갈 때만큼은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이 편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서울의 출근길은 복잡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도중, 제휘는 신호가 걸리거나 차가 멈춰 설 때마다 은하가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니, 사실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해 주고 있자니, 이윽고 온헌트 방송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헌터님. 이쪽입니다.”
차에서 내려 곧장 방송국 입구로 향하려는 은하에게 제휘가 반대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방송국 뒤편에 위치한 실내 스튜디오로 은하를 데리고 갔다.
“녹화 시작 전, 방청객을 상대로 작은 팬 사인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팬 사인회?”
은하가 무심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게 팬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겸손이나 자해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지만 은하 역시 인터넷 댓글 반응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컨셉충’이라든지 ‘극혐’이라는 단어가 도배되고 있는 마당에 팬이라니.
“왜 없습니까.”
몇 걸음 앞서 걸어가던 제휘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잖아요.”
조금 수줍은 듯 웃는 제휘를, 은하가 조금 메마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니까.”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제휘는 은하에게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도 미리 사인받아도 됩니까?”
“진심이에요?”
“물론이죠.”
제휘는 정말 어디선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의 첫 번째 팬은 저놈이 아니라 나야, 나! 소리칩니다.] [주섬주섬, 어디선가 종이와 펜이 없나 찾기 시작합니다.]“한 시간 정도면 끝날 겁니다. 방청객이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까요.”
결국 받아 내는 것에 성공한 은하의 사인을 가슴에 품으며, 제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는 대표님께서 그토록 특별히 여기는 헌터였다. 분명 언젠가 한국에 이름을 알리는 유명 인사가 될 터! 자신은 그런 그녀의 첫 번째 사인을 받아 낸 사람이다. 그 사실이 괜히 기뻤다.
한편, 팬 사인회가 열린다는 회장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제휘의 말대로 정말 간소하게 치를 모양이었다. 추첨을 통해 선정된 방청객을 상대로 진행하는 이벤트이기 때문인 듯했다.
근처에 설치된 부스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의상으로 갈아입은 은하는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팬 사인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지정석 위에 미리 표시되어 있는 이름표를 보니, 자신이 정말 ‘컨셉 헌터’로 낙인이 찍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자리에 앉은 은하는 미리 놓여 있던 생수병을 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포함하여 총 열 명의 헌터가 두 테이블에 다섯씩 나누어져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럼 저는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꾸벅 짧게 고개를 숙인 제휘는 스태프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회장 밖에서 줄을 서고 있던 방청객들이 안내에 따라 하나둘씩 회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와아……!”
팬들이 몰고 온 열기에 회장 전체가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헌터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른쪽 끝에 앉은 헌터는, 누군지는 몰라도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그의 앞에만 벌써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저, 정말 팬이에요……!”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서윤이요. 김서윤.”
“서윤 씨, 오늘 오는데 차 막혔죠? 와 줘서 고마워요.”
그 헌터는 능숙하게 팬을 대하며 유려한 손짓으로 사인을 휘갈겼다.
“가, 감사합니다!”
줄을 섰던 팬들은 벅찬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하 바로 왼편에 앉은 헌터는 광대 분장을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안녕하세쀼! 오늘은 와 줘서 고맙다쀼!”
“아하하, 오늘 파이팅이에요. 아저씨!”
……아마도 컨셉 헌터겠지.
오른쪽 끝에 앉은 헌터에 비해서는 그 줄이 길지는 않았지만, 사인을 받으러 오는 팬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도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
은하는 쥐고 있던 펜을 놓았다. 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러자 눈앞에 노란색 메시지창이 팝업되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 사람들은 보는 눈이 없다며 씩씩댑니다.] [너무 기죽지 말라며 유명세로만 따지면 여기 모인 헌터들 중 흑염의 프린세스가 제일이라며 당신을 다독입니다.]고양이는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은하는 딱히 상처를 받은 것도, 실망을 한 것도 아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팬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헌터에게 팬은 무슨 팬. 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콧방귀를 뀝니다.] [언젠가 이곳에서 사인을 받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거라며, 이곳의 모두를 강하게 저주합니다!]띠링, 띠링, 띠링…….
오히려 상처 입고 실망한 것은 고양이 쪽인 듯했다.
어떻게 시간을 죽일까. 은하는 옆에 두었던 생수병 뚜껑을 열고, 간단하게 목을 축였다. 한 시간 정도라고 했으니, 대충 시간을 때우다 보면 금방 끝나겠지.
“언, 언니이.”
문득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수를 마시던 은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 여기 있어요.”
책상 위로 빼꼼 올라온 통통한 손이 파닥였다. 시선을 내리자 까치발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보였다.
‘……이 아이.’
낯이 익었다. 은하의 시야에 아이가 들고 있는 사인용 종이가 들어왔다. 아이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들고 있던 종이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사인해 주세요.”
“……나?”
끄덕끄덕.
도토리 같은 눈에는 별과 같은 기대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은하는 그제야 여자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커다란 리본 장식을 붙인 까만 원피스. 머리 위에 단 똑딱 핀에는 앙증맞은 왕관이 스프링 형식으로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검은 우산이 보였다. 꽃무늬가 프린트된 그것은 디자인은 달랐지만 분명─.
“…….”
은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책상에 걸쳐 세워 둔 우아한 양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팬이다! 드디어 팬이 왔다! 크게 튀어 올라 공중제비를 돕니다.]아까는 팬 따위 필요 없다더니. 은하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눈앞에 서 있던 꼬마 아이가 “와아……!” 하고 두 눈을 반짝였다.
“엄마, 엄마! 공주님이 웃었어!”
아이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 헌터들과 그 앞의 팬들까지도 이곳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은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적잖이 놀란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지요?”
그때 아이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은하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은.’
그녀를 마주한 순간, 은하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일전에 아쿠아리움에서 발생한 게이트. 그 당시 은하가 구해 주었던 빨간 원피스의 여인이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가 검은 원피스만 고집해서……. 오늘 헌터님이 이곳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딸을 데려왔는데, 어찌나 신이 났는지.”
여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생긋 웃었다.
“아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은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가 건넨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펜을 쥐었다.
“예리…… 였지?”
“네!”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 앞에서 은하가 스르륵, 펜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자, 여기.”
“우와!”
신이 난 아이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아!”
아이와 엄마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은하는 아이가 팬 사인회장을 나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도 고마워.”
나직이 인사를 뱉으며, 그녀가 웃었다.
새까만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