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35
35. 늑대와 군단
“도대체 마스터는 무슨 생각이신 거지?”
남자, 군단의 2인자. 준환은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긴 채 투덜댔다.
“분명 이유가 있으실 거야. 아무리 마스터가 변덕쟁이에 장난꾸러기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낯선 헌터에게 살갑게 구실 분은 아니잖아.”
그것도 게이트 스틸러에게 말이야. 여자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기회를 엿봐서 게이트 핵을 탈환하실 계획인가?”
“엿볼 것이 뭐 있어? 어차피 우리 건데. 당당하게 돌려받으면 그만인 것을.”
“그럼…… 설마 첫눈에 반했다든가?”
그래. 차라리 그편이 신빙성이 있겠다.
확실히 최근 사춘기에 접어든 듯한 민주였다. 이전보다 까칠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이성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요새 애들에 비하면 늦은 시점이라 할 수도 있었다.
“연상이 취향이셨던 건가.”
그들은 마스터의 옆을 걷는 여자를 주시했다. 그러던 중 준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흠, 그런데 저 여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뭐? 어디서?”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환에게 쏠렸다. 준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네. 어디서 봤더라.”
“너 SNS 중독이라니까. 또 어디서 팔로우한 여자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야. TV에서 본 걸까? 연예인이나 배우는 아닌 것 같은데.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찝찝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동료 중 하나가 작게 외쳤다.
“어! 움직인다. 쫓아가자.”
군단의 동료들은 계속해서 은하와 민주의 뒤를 밟았다. 전원 랭커로만 이루어진 그들은 완벽에 가깝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계속 따라오네.’
공기를 타고 온 희미한 적대감이 피부를 적시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살기는 없다.
이 아이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아까 아이의 표정을 보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썩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원래라면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헤어졌어야 하는데.’
부모님도 안 계시고, 알 수 없는 자들에게 미행까지 당하는 미성년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하는 제 손을 잡고 총총 따라오는 소년을 힐끗 바라보았다.
“배고프지?”
“네.”
사실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이 이 근처 국밥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혹시 국밥 먹을 수 있어?”
“아무거나 잘 먹어요!”
삐약삐약 잘도 대답하는 모습이 퍽이나 기특하여, 은하는 그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전봇대 너머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헤헤…….”
조금 수줍은 미소를 짓던 민주가 근처 전봇대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민주 역시 동료들의 미행에 대해 일찍이 눈치를 채고 있던 바였다.
‘진짜 귀찮게.’
혼자였다면 벌써 따돌리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은하와 함께였다.
평범한 소년인 척을 하고 있는 이상, 섣불리 능력을 사용할 순 없다. 그나마 얼굴 인식을 방해하는 간단한 트릭만을 걸어 뒀을 뿐이다. 일반인들의 시선을 피할 순 있어도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동료들에게는 소용없는 트릭이었다.
‘그냥 확 따돌려 버려?’
그렇게 되면 은하는 민주가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전투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녀는 꽤 감이 좋은 헌터인 듯했으니까.
물론 그녀에게 정체를 들킨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곤란한 점도 없었다. 하지만…….
“차 조심해.”
은하가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당겼다. 그리고 인도 바깥쪽을 걷고 있던 민주를 대신하여 자신이 바깥쪽에 섰다.
“아……. 감사합니다.”
민주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몹시 묘한 기분이었다.
잘 모르겠다. 그는 이 기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들은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윤례 할매 국밥. 깔끔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지금 대기 인원이 많아서요. 여기에 성함이랑 연락처 끝 번호 적어 주시면 호명해 드리겠습니다.”
“안에 일행이 있는데요.”
“아, 그러시군요. 혹시 몇 번 테이블이신지?”
“테이블 번호…….”
은하가 대답을 주저하는 순간, 멀리서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점원과 은하 사이를 막아선 시우가 재빠르게 은하의 상태를 훑었다. 조금 지쳐 보이는 점만 제외하면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구속된 흔적도 없고.
그제야 시우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미안.”
은하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얼른 앉자. 배고프네.”
“음식이 이미 다 식어서요. 원하신다면 새로 주문하…….”
우뚝.
자리로 돌아가던 시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의 푸른 시선이 은하의 손을 잡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손으로 향한다.
“너는─.”
소년을 바라보는 시우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탐색하듯 작은 소년을 소리 없이 삼켰다.
이윽고 시우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그 순간.
“……히끅, 누나아.”
꼬옥.
민주가 은하의 소매를 붙잡았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차갑게 쳐다보면 겁먹잖아.”
“……네?”
“내가 잠시 보호하고 있는 아이야. 배가 고프대서. 괜찮지? 같이 먹어도.”
“…….”
시우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와 민주를 번갈아 보았다.
민주를 대하는 선배의 태도는 마치 평범한 소년을 대하는 듯한…….
‘하.’
벼락같이 무언가를 깨달은 시우는 턱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 30년 전 사람인 선배는 현대 헌터에 대해 무지했다.
아무래도 말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 판단한 시우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딸랑─
유리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동시에 가게 내부가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여섯 분이신가요?”
“예? 아, 예.”
가게로 들어선 것은 진녹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여섯 명의 헌터였다. 유명 인사인 그들이 가게 앞의 기다란 대기 줄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망토에 새겨진 마크를 적당히 보이기만 해도 모두가 앞다투어 양보했으니까.
그들을, 정확히는 그들이 두른 망토를 본 시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닙니다.”
우선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좋겠다.
아직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자.
이곳은 일반 음식점. 그들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곳에서 난리를 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군단을 알아본 일반인들이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적어도 이 음식점 안에서는 공격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을 터.
‘여차하는 순간에는 내가 나서면 돼.’
시우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미리 잡아 둔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거 치워 주시고요. 전부 새로 다시 주문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재주문을 받은 점원이 사라지고, 시우는 점원이 가져온 물수건을 은하와 민주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
“누나, 이것 봐요.”
민주가 콕콕 은하를 찔렀다.
짜잔! 물수건으로 접은 학이었다.
“이것도 접을 수 있어요.”
짜잔! 이번에는 장미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
반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우는 뻣뻣하게 굳었다.
기분 탓인가? 두 사람이 친해 보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
시우는 이런 상황을 제일 싫어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예측할 수 없이 답답한 상황 말이다. 시우는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탁!
꽤 요란한 소리를 낸 컵이 얕은 파도를 출렁 일으켰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낸 시우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중학생인 줄 알았는데 키만 큰 초등학생이었나 보군.”
그러자 소년의 진갈색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시우에게 향했다.
일순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한순간이었다.
“……누나아.”
또다. 녀석은 또 선배의 옷소매를 붙들고 입을 쭈욱 내밀었다. 은하와 민주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시우의 미간의 간격 역시 더욱더 좁아졌다.
‘무슨 속셈이지.’
시우는 경계를 담은 눈빛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그리고 힐끔, 가게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기, 군단 멤버들이야!”
“대박! 사진 찍자고 해 볼까……?”
가게 내부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은 물론, 가게 바깥을 지나치던 행인들마저 유리창에 다닥다닥 들러붙어 녹색 망토 무리, 군단 길드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
“…….”
그들을 지켜보던 도중 문득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우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금방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시우는 눈매를 가늘게 만든 채 오랫동안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식사는 괜찮았습니까?”
“무척.”
식사를 끝낸 은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저를 놓았다. 몇 년 만에 맛보는 순대 국밥인지. 어느 국밥집을 가더라도 이곳의 맛을 따라오는 곳은 없었다.
“고마워.”
은하의 짧은 감사에 시우는 무뚝뚝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이 정도쯤이야. 언제든 생각나시면 또 말씀하세요.”
“응, 그럴게.”
“뭐 국밥이 아니더라도 먹고 싶은 것을 말씀하시면─.”
그때 은하 곁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민주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누나, 이것 봐요.”
짜잔! 탱크! 이번에는 물수건이 아닌 휴지를 접어 탱크를 만들었다.
쟤는 아직도 저러고 있나. 이래서 애는 질색이다. 시우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스스로가 얼마나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덕분에 잘 먹었어요, 누나. 이건 선물이에요.”
그러든 말든 민주는 자신이 접은 탱크를 은하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휴지로 탱크를 만들 수가 있지……? 은하는 그 정확성에 놀랐다.
“손재주가 정말 좋구나.”
리액션에 능하지 않은 은하는 꽤 싱거운 감탄사를 뱉었지만 그마저도 기쁜지 민주는 씨익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소년의 미소였지만, 시우의 눈에는 아니었다.
“이 정도쯤이야. 언제든 갖고 싶으시면 또 말씀해 주세요. 수류탄이랑 트럭도 만들 수 있어요.”
자신 있게 말하는 민주의 눈이 힐끔, 시우를 향한다. 시우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작은 스파크를 일으키는 듯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기 전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두 쌍의 눈이 은하에게 향했다.
“네, 다녀오세요. 선배.”
“다녀와요, 누나.”
그렇게 은하가 테이블을 떠난 직후,
“…….”
“…….”
그곳에는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민주는 아래로 시선을 박고 조몰락조몰락 휴지로 무언가를 또 접고 있었고, 시우는 턱을 괸 채 그런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귤색 머리카락에 아담한 키.
커다랗고 동그란 진갈색 눈동자 아래 눈물점 하나.
카모플라쥬 문양의 후드 티.
‘틀림없어.’
어떤 알량한 수법으로 안면 인식을 방해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같은 S급인 시우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는 없었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시우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볼일이야?”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상체를 기댄 시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트릭스터.”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트릭스터는 휴지를 만지작대던 손을 멈추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형.”
키득, 작은 웃음소리가 분주한 공기 속으로 옅게 흩어졌다.
“역시 헌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