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34
34. 밀덕 트릭스터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다.
노을에 젖은 듯한 귤색 머리. 도토리 같은 눈동자 아래에 찍힌 눈물점 하나가 꽤 귀엽다.
끽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서는 다행히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년의 상태를 찬찬히 훑은 은하는 나지막이 그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부모님, 이요?”
끄덕.
“아, 안 계시는데요.”
우뚝. 은하가 굳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다.
안 계시다는 것은 즉 고아라는 소리? 설마…… 이곳에서 변을 당하신 건 아니겠지? 어느 쪽이든 자세히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은하는 조금 굳은 얼굴로 무릎을 스르륵 폈다.
소년은 토끼처럼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가엾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고?”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은하가 소년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소년이, 트릭스터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이 게이트는 군단이 낙찰한 곳이다. 그러니 보스 몬스터 역시 군단의 것.
헌터가 게이트 경매 시스템을 모를 리가 없는데. 더군다나 이 정도 실력을 가진 헌터라면 신인도 아닐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트릭스터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잠깐. 혹시 게이트 스틸러(Gate Stealer)? 군단을 상대로 도둑질을 할 간 큰 헌터가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도토리처럼 동그랗던 눈매가 일순 날카롭게 바뀌었다.
트릭스터는 어깨에 멘 바주카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우선은 확인이다.
“누나, 헌터 맞죠?”
쿠구구─.
민주의 발언과 동시에 주변이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파스스, 머리 위로 모래와 같은 파편들이 떨어졌다.
소년의 머리에 그늘이 드리운 그 찰나, 은하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래, 헌터야.”
소년을 향해 쓰러지던 콘크리트 벽면이 은하의 손에 잡혀 우지끈 소리를 냈다.
“그러니 안심하고 따라오렴.”
은하는 한 손으로 벽을 지탱한 채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트릭스터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날 구해 준 거야?’
그러니까, 쓰러지는 콘크리트 벽에 내가 깔릴까 봐?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S급 헌터인 내가? 군단의 동료들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어서. 거기 있다가는 쥐포가 될걸.”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누군가를 구한 적은 있어도,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준 적은 없었다. 아니, 이게 구해 줬다고 하기에도 애매한데……. 트릭스터는 묘한 얼굴로 은하에게 다가갔다.
“옳지.”
그러자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뭐야? 진짜 뭐지? 트릭스터는 동그란 눈에 물음표를 가득 담고 은하를 올려다보았다.
각자의 눈앞에 푸른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진 보스 몬스터의 사체에서 보라색 구슬, ‘게이트 핵’이 두둥실 떠올랐다.
“서두르자. 곧 게이트가 닫힐 거야.”
핵을 챙긴 은하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이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은 가늘고 수려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상처투성이에 까만 재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제게 뻗어진 지저분한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트릭스터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동공에 적대감이나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모르나?’
그럴 리가. 요즘 헌터 중 군단의 마스터인 트릭스터를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 자부는 할 수 있다. 왜냐면 자신은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S급──.
“못 움직이겠어?”
은하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높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사라락 어깨선을 타고 떨어졌다.
“업어 줘?”
“…….”
트릭스터는, 아니 송민주는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이 여자, 정말 나를 모르는 거야.’
대체 언제 적 사람이야?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민주는 석연찮게 입을 열었다.
“누나, 있잖아요. 나는 군단의─.”
“잠깐.”
민주의 말을 싹둑 끊은 은하가 뚜벅뚜벅 가까이 걸어왔다. 그러고는 민주의 목 언저리를 빤히 응시한다.
“그거.”
은하는 스르륵 검지를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새까만 동공에 황금색 군번줄이 반짝 비쳤다.
“내 거 같은데.”
“…….”
“…….”
짧은 침묵 후.
토끼 눈이 된 민주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
“……네?”
“주운 거야?”
민주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 군번줄은 내게 소중한 거라서. 돌려줬으면 하는데.”
민주는 은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초면인 만큼 온전히 그녀를 믿기에는 힘들었다.
만일 이 사람이 군번줄의 주인이라면 돌려주는 것이 맞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주인이 아니라면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소리기도 하지.’
민주는 찐빵 같은 주먹으로 군번줄을 감싸 쥐고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럼 군번 말해 봐요.”
장난스럽게 말문을 연 민주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도록 단단하게 군번줄을 감쌌다. 군번이란 혈액형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녀가 이 황금색 군번줄의 주인이 아니라면 결코 맞출 수 없을─.
“98-S10102794.”
엥.
“혈액형은 O형. 발급 일자는 1998년 1월 3일.”
거기까지 말한 은하가 터억, 손을 내밀었다.
“돌려줘.”
“…….”
뭐야. 진짜야? 아니, 어떻게?
민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탓─!
멍하니 서 있던 민주의 목에서, 은하는 황금색 군번줄을 가로챘다. 그 움직임이 몹시도 빨라 헛숨을 들이켤 정도였다.
“자, 가자.”
자신의 목에 군번줄을 건 은하가 민주에게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 게이트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동안 민주는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지?’
보스를 해치우고 난 뒤 게이트 내부의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불길의 경우, 은하의 가벼운 손짓만으로 휙휙 꺼졌다. 마치 선풍기 앞의 성냥불을 보는 듯했다.
이 정도면 적어도 B급. 어쩌면 B+, 아니 A급일지도 모른다. 자연계열 고유 능력에, 무엇보다…….
‘황금색 군번줄의 주인.’
그 모든 키워드를 착착 머릿속에 입력해 보았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도 설마 밀덕?’
힐끔.
민주는 제 손을 꼭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은하를 몰래 곁눈질했다.
“왜?”
은하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다리 아프면 말해.”
“……괜찮아요.”
그녀 역시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군단의 트릭스터다!’ 하고 까발릴 수 있었지만─.
‘…….’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민주는 꾹 입을 다물었다. 재가 가득 묻은 그녀의 손은 지저분했지만 생각보다 단단하고 따듯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한편, 앞만 보고 걸어가던 은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에 꼬옥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어도 결국에는 아이인 모양이다.
‘많이 무서웠겠지.’
은하는 이런 아이를 많이 봐 왔다. 한때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도 했다.
은하 역시 잡고 있는 손에 보답하듯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소년이 동그란 눈을 들어 이곳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
“…….”
무슨 이야기라도 꺼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은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다.
아이를 상대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섣불리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가는 아이를 울릴지도 몰랐다. 경험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인 좋아해?”
그것은 은하에게 있어서 최선의 화제 선택이었다. 아이가 메고 있는 바주카 모형 장난감, 군복 무늬의 후드 티, 그리고 황금색 군번줄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추한 결과였다.
그러자 민주의 눈에 반짝반짝 은하수가 펼쳐졌다.
“네!”
예상외로 엄청난 반응이 돌아왔다.
“멋있잖아요. 특히 군복이 멋져요. 어떤 교복도, 제복도 그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은 없어요.”
민주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무기들도 완전 간지 나지 않아요? 특히 저는 베이식한 K-2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렇게 간편하고 세련된 무기는 언제나 영감을 주죠.”
맞잡고 있는 손이 붕붕 흔들렸다. 다행히 화제 선택은 적절했던 듯싶다. 은하는 조금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K-2 나쁘지 않지. 명중률도 좋고. 근데 너무 무거워.”
거기까지 말한 은하가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덧붙였다.
“간편성에 있어서는 역시 K-1을 따라갈 수 없다고 봐.”
은하의 대답에 민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입을 틀어막은 두 손 사이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K-1을 좋아하세요?”
“……? 응.”
갑자기 눈빛이 바뀐 것 같은데. 은하는 묘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는 펄쩍 제자리에서 튀어 오르고 싶은 기분을 꾹 눌렀다.
2030년, 현대에 이르러서는 K-1이나 K-2를 쓰는 군인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게이트나 몬스터, 각성자들이 쏟아지며 인간의 화기에 대한 가치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
‘말이 잘 통하잖아?!’
민주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무래도 난 기동성을 우선시하거든. K-2는 가스 피스톤 방식이라 K-1보다 관리가 좀 더 쉽고 내구도가 뛰어난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너무 무거워서.”
은하는 훈련소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몬스터에게는 인간의 화기가 통하지 않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총기를 포함한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었다.
‘생사를 건 헌터의 전투 방식 특성상, K-2보다는 기동성이 우수한 K-1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지.’
비록 형식적인 훈련이었고, 실제로 게이트에서 총을 써먹은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에 성공한 민주는 한층 진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겁다는 건 확실히 단점이긴 하지만…… 개머리판을 접은 상태에서도 사격이 가능한 건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분명 보완할 점은 있지만 당시 한국의 기술력으로 생산된 무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걸작 수준이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지.”
“역시 그렇죠?!”
민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펄쩍 튀어 올랐다.
누구냐! K-1, K-2를 보고 똥총이라고 말했던 건! 이제야 진정한 동료를 만난 듯한 기쁨에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총기나 군인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맞잡고 있던 두 손이, 어느덧 춤을 추듯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게이트 출구에 도착했다.
‘아…….’
민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쉬웠다. 이대로 대화를 끝내는 것이.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 모양이다. 은하가 민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아뇨, 그냥…….”
어떡하지. 트릭을 써서 출구를 감춰 버려? 하지만 괜한 짓을 했다가는 영영 게이트에 갇혀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순간적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어, 찾았다!”
어디선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망토를 두른 성인 여섯 명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
휙.
민주가 은하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행동에 은하는 물론 그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등 뒤에 숨은 소년을 보며, 은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야?”
도리도리. 민주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잔뜩 움츠러트린 그는 은하의 옷소매를 꼬옥 쥐었다. 그 모습이 연약한 초식 동물과도 같았다.
“누구신지?”
소년의 부정에 은하가 그들을 보며 물었다.
삐딱하게 쓴 베레모에 진녹색 망토. 입고 있는 옷은…… 은하가 기억하는 군복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덩치 좋은 사내, 군단의 2인자 배준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희는 군단의…… 응?”
그의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눈앞의 여성이 쥐고 있는 보라색 구슬. 저건 분명 게이트 핵이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준환의 눈빛이 돌연 적의에 물들었다.
“……당신, 스틸러입니까?”
“스틸러?”
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요?”
“허…….”
준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지독히도 뻔뻔한 건가.
‘마스터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 정도면 거의 눈 뜨고 코 베인 수준이다.
저 여자가 보란 듯이 게이트 핵을 쥐고 있는데 자신들의 마스터, 트릭스터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자의 뒤에 꼭꼭 숨어 버리기까지 했다.
‘어째서?’
언제나 예상을 비껴가는 분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준환은 뒤에 서 있던 동료들에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 변덕쟁이로 유명한 마스터를 100% 이해하고 있는 자는 없었다.
다시 은하에게로 시선을 돌린 준환은 그녀가 쥐고 있는 게이트 핵에 시선을 고정하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우리가 낙찰한 군단의 영역입니다. 고로 이곳의 몬스터, 자원 그리고 그 게이트 핵, 그 모든 것은 우리 것이죠. 이건 헌터법에 의거한 아주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준환은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서로의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준환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우리 군단에게 선전포고를 할 작정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그 게이트 핵을 내려놓─.”
거기까지 말한 순간.
흠칫.
준환이 석상처럼 굳었다.
“…….”
은하 등 뒤에 숨은 소년, 그들의 마스터가 서슬 퍼런 안광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 마스터?’
준환은 당혹스런 눈으로 민주를 바라보았다. 민주는 어깨에 멘 바주카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입을 벙긋거렸다.
입, 다, 물,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