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6
56. 자애의 현혹술사 (3)
같은 시각, 서울 M 호텔 최상층.
“협회장님으로부터의 전달 사항은 이상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미팅에서 들을 수 있으실 겁니다.”
광현은 정돈한 자료들을 이준에게 넘기며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이준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이야기는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광현은 후다닥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준은 가볍게 목례를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달칵.
문을 닫은 광현은 문고리를 잡은 그 상태로 툭, 문 표면에 이마를 갖다 댔다.
“하아…….”
그리고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긴 숨을 토해 냈다.
마에스트로 백이준.
그가 한국 헌터 협회와 전속 계약을 한 일은 협회에 있어서 경사 중에 경사였다.
협회에 들어오고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는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다만 그가 협회에 있어 무척 감사한 존재인 것과는 별개로, 광현은 이준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불편했다. 어쩌면 협회장보다 훨씬 더.
‘마주 앉아 얘길 하고 있으면 자꾸 팔에 소름이 돋는다니까.’
그건 기분 탓이라고 하더라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타인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광현은 어쩐지 이준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조금 꺼려졌다.
한편, 광현이 떠나고 5분 정도 흐른 뒤 이준은 힐끗 캐서린 쪽을 쳐다보았다.
“데이빗은?”
데이빗 무어.
이준의 수행인으로 오랜 시간 지내 온 자였다. 그는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이었으나 14년 전 이준의 비밀 명령으로 한국에 입국했고, 그 후 지금까지도 한국에 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준의 물음에 캐서린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칼같이 답했다.
“이제 막 로비에 도착했을 겁니다. 제가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 재킷을 챙겼다. 캐서린이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재킷을 훌렁 어깨에 걸친 그가 문고리를 돌렸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마침 커다란 꽃다발을 든 데이빗이 보였다.
“아, 백 헌터님.”
“오랜만이야.”
이준은 저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데이빗 앞에 멈춰 섰다.
최근에 너튜브를 시작해서 구독자 몰이를 하고 있다더니, 미국에 있을 적보다 훨씬 말끔해진 인상이 꼭 모델 같았다.
“생각보다 한국 생활이 잘 맞았던 모양이군.”
“덕분입니다.”
데이빗은 깍듯하게 답했다. 이준은 그런 그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가지.”
“예?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래.”
이준의 답에 캐서린과 데이빗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그들은 이준과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해당 호텔로부터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주차를 마친 그들은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었다. 비로소 걸음을 멈춘 곳은, 바로 누군가의 묘였다.
“여기 있습니다.”
데이빗은 자신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이준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이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해 보였으나 이내 그것을 받아 들고, 천천히 비석 앞에 내려 두었다.
“…….”
그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묘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준이었다.
“묘가 무척 깨끗하군.”
“맡기신 바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처음 이준이 갑자기 한국행을 명했을 당시, 데이빗은 굉장히 놀랐다.
그럴 수밖에. 명문대를 졸업하고 매니지먼트 내에서도 승진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한국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묘를 돌봐 달라는 일을 시키는데.
‘연봉 20만 달러를 약속하지.’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난 적이 있나?”
한참이나 묘비를 응시하던 이준이 문득 물어 왔다. 그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데이빗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뇨. 단 한 번도요. 애초에 이 묘비를 찾는 건 저 외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지난 14년 동안은요.”
지난 14년 동안은. 그 마지막 말에 이준이 시선을 들었다.
“그…… 최근에 누군가 묘를 방문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이준은 짤막하게 답할 뿐, 어떠한 말도 더하지 않은 채 다시 묘비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데이빗이 시선을 들었다.
“뒤를 캐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네는 여기 오지 않아도 돼.”
“예?”
“미국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야.”
“호,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그런 게 아냐.”
이준은 스르륵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빛으로 물든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이끌리듯 눈을 감자, 자연스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이 묘비를 돌볼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또한 나도 돌아왔고. 낮게 덧붙인 이준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분께서 정말 돌아오신 게 맞아요?”
데이빗이 호들갑을 떨며 이준에게 다가섰다. 오랜 기간 묘를 돌봐 온 데이빗이었으나 그는 아직도 이 묘비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준이 이 묘비를 돌보라는 명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몰래 조사를 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혹여 이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지난 14년 내내 말이다.
이제는 조금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데이빗은 힐끔힐끔 이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슬쩍 입술을 달싹였다.
“그, 혹시 어떤 분입니까? 이 묘비의─.”
“데이빗.”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캐서린이 헛기침과 함께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에 이준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캐서린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의 이준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답했다.
“글쎄. 책임감이 강한 사람?”
산 너머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좇으며, 이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지, 그냥 강한 사람.”
데이빗은 더욱더 궁금해졌다. ‘그녀’가 누구인지. 누구이길래 이준으로 하여금 저런 날것의 미소를 띠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 * *
쉬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은하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놈을 향해 돌진했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화들짝 놀랍니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역시.’
은하는 확신을 더했다. 역시 녀석에겐 ‘유혹의 노래’ 이외의 스킬이 없는 것이라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노랫소리가 짙어졌다.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작은 방심만으로도 또다시 환각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은하는 달리던 도중, 손에 쥐고 있던 양산을 꾹 쥐었다. 그리고.
푸욱!
날카로운 양산 끄트머리를 제 왼쪽 손등을 향해 망설임 없이 냅다 꽂았다.
저릿한 통증이 손등으로부터 찌르르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뚝, 붉은 피가 손목뼈를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미쳤어?! 미친 거구나! 하고 놀라며 당신의 무모한 행동에 동공을 크게 확장합니다.]평소에 비해 대문짝만하게 큰 메시지창이 번쩍 시야를 가렸다. 그 크기에서 고양이의 충격과 경악이 아주 잘 느껴졌다.
그러나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은하는 시야를 방해하는 메시지창을 스와이프 하여 멀리 치워 버리고 마지막 속력을 가했다.
타앗!
이제 녀석과의 거리는 1m 내외.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겁에 질려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경고. ‘자애의 현혹술사’를 감싼 구체가 불길하게 요동칩니다.]슈슈슉!
그때였다.
세이렌을 감싸고 있던 물 풍선에서 다수의 물줄기가 솟아났다. 그것들은 유도탄처럼 한 번에 은하에게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녀석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은하는 몇 개월 전, 이와 비슷한 전투를 겪은 적이 있다는 것을.
‘네가 진짜 보스군.’
‘잠시 얘기를 좀─.’
‘몬스터와 나눌 이야기는 없어.’
바로 시우와 말이다.
은하는 살벌한 속도로 제게 달려드는 물줄기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팟, 팟, 팟!
손바닥에서 검은 화염구가 연속해서 피어났다.
‘물 따위 증발시켜 버리면 그만이야.’
일반적인 적색의 불꽃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 것이 바로 흑색 불꽃, 흑염이다.
치이이이─
흑염이 삼킨 물줄기는 수증기를 뿜으며 마치 꼬리부터 먹혀 가는 뱀처럼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가 기회였다.
휘익!
은하는 물줄기가 증발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발로 땅을 세게 걷어차며 앞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원형 폭탄과 같은 거대한 화염구를 만들어 낸 은하가 세이렌의 구체를 향해 손을 뻗는 그 순간.
[으, 나…….]구체 속의 세이렌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으, 나아, 야. 으은하…….]“……!”
은하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야 말았다.
[하, 학교…… 가, 야지…….]─그것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은하가 멈칫하는 그 순간을 세이렌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사이 다시금 소환된 새로운 물줄기가 가차 없이 은하의 복부를 가격했다.
철썩!
“허, 헌터님!”
멀리서 제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윽……!”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하는 낙법에 성공했지만,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녀석과는 다시금 엄청난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여유를 되찾은 세이렌은 노래를 이어 가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귀까지 이어지는 빼곡한 이빨이 소름이 돋을 만치 섬뜩했다.
은하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만일 드레스가 아닌 일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통증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은하는 피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괴물 새끼 주제에.”
사방팔방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감히 누구 흉내를.”
황금빛이 형형한 두 눈동자에서, 시꺼먼 동공이 위협적일 만큼 길게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