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7
57. 자애의 현혹술사 (4)
철썩!
“허, 헌터님!”
폭포 근처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제휘가 다급히 소리쳤다.
몬스터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아 버린 은하는 저 멀리 튕겨져 나가 버렸다.
만일 제휘와 같은 일반인이었다면 뼈에 금이 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정도의 위력이었을 터.
그러나 은하는 다시 일어섰다.
“오, 오빠, 어떡해?”
곁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림이 불안한 듯 제휘의 소매를 슬그머니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사람 F급이라며? 저러다 죽으면 어떡해!”
F급 헌터가 언노운 게이트 보스 몬스터에게 돌진한다? 그것도 저 레이스가 주렁주렁 매달린 양산 하나를 들고? 그것은 비각성자인 제림이 보아도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제림아.”
줄곧 잠자코 있던 제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저 F급 헌터님이 우리 목숨을 쥐고 계셔.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어차피 헌터님이 잘못되면 너도 나도 다 같이 여기서 죽는 거야.”
“…….”
오빠의 단호한 어투에 말문이 막힌 제림이 꾹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은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으므로.
카앙─! 휘리릭! 슈욱, 캉!
눈앞에 펼쳐진 전투는 비각성자의 눈으로는 차마 쫓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쯤 되니 은하가 공격을 하고 있는지 공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녀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
제휘는 문득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헌터님. 저는 신 대표님의 수행 비서이자 실버문 매니지먼트 소속, 박제휘라고 합니다. 편히 박 매니저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제휘는 은하를 보며 이 사람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핏기가 없는 얼굴색도 그러했지만 무미건조한 표정도 한몫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F급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돌아가는 길 정적에 휩싸였던 차 안에서도 그녀의 무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웃음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꽤 사소한 것에 웃었고,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알며, 무엇보다─.
휘익!
‘두려움이 없는 사람.’
빙글 몸을 돌린 은하는 눈 깜짝할 사이 땅을 박차고 몬스터에게 돌진했다.
그 움직임에서는 일말의 주저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듯 이정표를 지닌 사람과 같은 자신감. 또는 사명감.
‘나조차도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인 사람이야.’
‘예……?’
처음에는 대표님께서 답지 않게 농담을 다 하신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지금은─.
“…….”
제휘는 은하가 쥐여 준 소라고둥 껍데기를 손에 꼭 쥐었다.
* * *
“……윽.”
은하는 양산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고 세이렌에게 돌진하고, 번번이 세이렌의 구체를 파괴하는 것에 실패했다.
사실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녀석은 은하가 고전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녀석의 공격은 그다지 큰 물리적 피해를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저 노랫소리만 어떻게 하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란 소리.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노랫소리가 짙어졌다. 녀석에게 코앞까지 다가가면 그만큼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 힘들다는 소리였다.
경험과 내성이 충분한 은하조차 까딱하면 매혹에 정신을 먹혀 버릴 수준. 왼쪽 손등을 포함하여 허벅지, 팔뚝 등을 스스로 찔러 가며 정신을 부여잡았으나.
‘이젠 안 돼.’
은하는 욱신거리는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이 이상 부상을 늘리면 언젠가 전투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딸, 내 딸 으은하…….]저 멀리에서 놈이 다시 장난질을 치기 시작했다. 은하가 뿌득 어금니를 갈았다.
“닥쳐.”
[다, 닥쳐어…….]이번에는 은하의 목소리를 흉내 내더니,
[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깍!]그게 뭐가 우스운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구체 속을 굴러다닌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녀석을 응시하던 은하가 양산을 세게 꾹 쥐었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밉니다.] [아직 성장기인 녀석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 아니냐며 당신에게 조금 실망한 듯한 모습입니다.]성장기? 몬스터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휘둘린다고?’
은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오히려 녀석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묵묵히 양산을 바로 쥐는 은하 앞에 또다시 노란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역시 언니는 내가 없으면 안 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 힘을 빌려줄 수도 있다고 제 존재를 은근슬쩍 어필합니다.]확실히 고양이의 힘을 빌린다면 쉽게 녀석을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고양이라면 지금 당장에 모든 상처를 말끔히 회복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녀석의 노랫소리를 무력화시키는 획기적인 아이템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녀석만큼은.’
고양이의 손을 빌리지 않고, 누구에게 기대지 않은 채 이 두 손으로 직접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시무룩해합니다.]은하는 노란 메시지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휘익─!
땅을 강하게 걷어차고 그 추진력을 이용해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곳은 세이렌이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
쏴아아아─
아득한 폭포가 있는 쪽이었다.
‘지금이야.’
촤악!
폭포에 진입하기 직전, 은하는 쥐고 있던 양산을 세차게 펼쳤다.
까마득한 높이의 폭포에서 굵은 물줄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아이였다면 그 수압만으로도 몸이 찌그러졌을지도 모를 정도였으나, 웬만한 쇠붙이보다 단단한 양산은 굳건하게 버텨 주었다.
문제는 은하였다.
‘오래 버티진 못해.’
양산을 쥔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힐끗 위로 시선을 들자 양산 표면에서 폭포 물줄기가 사정없이 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쏴아아아아─
시원하다 못해 찢어질 듯한 물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10초…… 20초…… 그 이상을 버텼다. 성인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으스러뜨릴 만큼 강한 물줄기 아래에서.
그리고 더는 팔이 버티지 못할 때쯤,
‘됐어.’
파앗!
은하는 튀어 오르듯 폭포에서 뛰쳐나왔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당신을 발견합니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삐이이─
놈의 노랫소리 대신 먹먹한 귀를 통해 이명이 들려왔다.
얼마 동안 이명이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 서둘러야 한다.
은하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고 총알처럼 빠르게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휘익!
기다렸다는 듯이 물줄기가 달려들었다. 수많은 물줄기가 마치 은하의 몸을 뚫어 버릴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은하는 가볍게 그것들을 모조리 피했다.
증발시킬 필요도 없었다. 수차례의 학습 결과 공격 패턴은 이미 읽어 낸 뒤였으니까. 미처 피하지 못한 물줄기는 양산으로 튕겨 내 버렸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시스템창이 팝업되는 것과 동시에 녀석이 입술을 뻐끔뻐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삐이이이─
먹먹한 귓가에 남은 이명 덕분에 녀석의 노랫소리가 선명히 전달되지 않았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소용없어.”
은하가 낮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젖은 양산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퍼어엉!
뾰족한 양산 끄트머리로 녀석을 감싸고 있던 구체를 한 번에 터뜨려 버렸다. 그 속에 숨어 있던 ‘자애의 현혹술사’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날개 형태의 두 팔을 퍼덕이는 모습이 마치 육지에 나온 생선의 모습 같기도 했다.
찰박─
은하가 녀석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녀석은 어깨를 크게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은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갈비뼈 부근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깊게 찔렀던지 구체를 통과한 양산 끄트머리가 내부에 숨어 있던 녀석의 본체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찰박─
은하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거리가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으나 세이렌은 도망가지 않았다.
이곳은 애초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건 은하에게도,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찰박─
마지막 한 걸음 다가선 은하가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얼굴만 보면 영락없는 인간 여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은 단 하나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은하는 다시 양산을 바로잡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끝부분을 세이렌에게 겨누는 순간, 녀석이 또 한 번 입술을 달싹였다.
이명이 사라진 귓가에 나직이 닿은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그러나 줄곧 잊고 있었던 목소리.
“…….”
은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세이렌은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입술을 뻐끔댔다.
[아아, 어쩐지.] [역시 딱 보면 티가 난다니까.]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애가 뭘 알겠어?]투둑─
양산을 쥔 손 위로 연분홍색 산호가 서서히 돋아났다. 자신의 손등을 무심코 내려다본 은하의 시야에 이제는 너무 낡아 버린, 그럼에도 여전히 소중한 소원 팔찌가 들어온다.
“……내가.”
양산을 움켜쥔 손에 우득 힘을 주었다.
“닥치라고 했지.”
손등 위로 돋아나던 연분홍색 산호가 파스스 떨어져 내린다.
휘오오오오…….
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뜨거운 호흡을 진정시키기엔 부족하지만 텅 비어 버린 가슴을 채우기에는 충분한 바람이다.
양산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 엄마에겐 나는,
‘고생 많았어, 우리 예쁜 딸.’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딸이었다.
[으, 으은하…….]푸우욱!
송곳보다 날카로운 양산 끝은 망설임 없이 녀석의 복부에 꽂혔다.
…….
…….
기묘한 적막이 흐른다.
진보랏빛을 띤 진득한 혈액이 뚜욱, 턱선을 따라 떨어지는 순간.
따따단─!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BGM이 섬 가득 울려 퍼졌다.
[보스 몬스터를 해치웠습니다!] [축하합니다! ‘바다의 눈물’을 획득하였습니다!] [획득 아이템 상세 ▶ ‘바다의 눈물’ 액세서리 (펜던트) / 희귀도 : 유물 / ‘자애의 현혹술사’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 푸른빛을 띤 보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패시브 효과 : 소지자의 수속성 내성이 50% 상승 / 행운이 20% 상승 / Lv.99 이하 정신 지배 계열 스킬에 100% 면역] [액티브 효과 : 정신 지배 계열 스킬을 모두 해제한다. 단, 죽은 자에게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현재 사용 횟수 (0/10) – 사용 횟수를 초과 시 ‘바다의 눈물’은 가루가 되어 바다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