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89
89. 새로운 생활
모자를 푹 눌러쓴 은하는 조금 긴장된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애견 미용은 처음이시라고요?”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은하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는데 줄곧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렇군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요. 저희 학원생들만 보아도 중고등학생부터 주부님들까지 골고루 있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팸플릿을 탁자 위에 꺼냈다.
“자, 보시면…… 여기 커리큘럼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듯이 저희는 유명 강사진과 함께 다양한 이론 수업은 물론 실습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자격증반, 창업반까지 전문적으로 진행하고 있고요.”
그는 책자를 팔락이다가 한 페이지를 펼쳐 은하에게 내밀었다.
“음, 우선 아예 처음이시라면 기초반이 좋겠지만, 가볍게 취미반부터 시작하시는 분들도 많이들 계세요.”
“취미반이요?”
“그렇습니다. 취미반은 토, 일 주말에만 수업이 있어요. 아무래도 직장과 병행하시는 거면 시간이 잘 나지 않으니까요. 실례지만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무직입니다.”
“…….”
“…….”
잠시 침묵.
콧잔등을 타고 미끄러진 안경을 스윽 고쳐 올린 남자는 곧 능숙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 하긴, 요새 다들 구직난으로 난리긴 하니까요. 자격증만 따시면 창업도 얼마든지 가능하시고, 음. 뭐, 네에.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분간 상담이 이어졌다. 그 후 은하는 직접 학원 내부를 둘러보기도 하고 수업 중인 교실에 들러 잠시 견학도 했다.
그것은 참 신기하고도 설레는 경험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은하는 유리창 너머 실습 중인 학원생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어떻게,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시고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학원생들의 실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록할게요.”
* * *
실버문 매니지먼트 본사.
시우는 책상 위 놓인 자료를 손에 쥐었다. 상단에 큼지막하게 찍힌 ‘기밀(機密)’이라는 붉은 문자가 눈에 띄었다.
“S급 긴급 소집령?”
이제는 별 방법을 다 쓰는군. 피식 웃음을 흘린 시우는 쥐고 있던 자료를 책상 위에 던지다시피 했다.
협회가 시우를, ‘백랑’을 호출하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마에스트로를 한국 협회에 영입한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군.’
시우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자료를 무심하게 응시하며, 현재 협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대충 짐작해 보았다.
한국의 S급 헌터는 국적을 바꾼 마에스트로 백이준과 공식적인 활동이 전무한 백야 신시우를 제외하고 총 5명뿐. 그중 시한부 신세인 귀훈과 대통령의 호출조차 무시하는 천둥벌거숭이 아연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대로 활동 중인 S급 헌터는 셋뿐.’
제천대성, 닥터 플랜트, 그리고 트릭스터.
그들이 현 한국 헌터계의 실질적인 주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세 기둥 중 하나가 얼마 전 무너졌다. 시우도 이미 그 소식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었다.
포항에 급작스레 출현한 언노운 게이트를 토벌하러 떠난 트릭스터가 극심한 부상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저주까지 얻어 돌아왔다고. 덕분에 닥터 플랜트가 그녀의 길드 장미조차 뒷전으로 하고 그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던가.
아직 대중에게 발표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알려지면 국민에게는 불안을, 타국에는 동정 또는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즉, 한동안 조용하던 협회가 다시금 백랑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떡할까요?”
곁에서 물끄러미 시우의 눈치를 살피던 제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떡하긴.”
책상에 턱을 괸 시우는 뭘 물어보냐는 듯 싱겁게 시선을 들었다.
“치워.”
긴급 소집령 같은 거창한 제목을 갖다 붙여 놨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그들이 할 이야기야 뻔했다.
‘신 헌터님. 당신의 힘을 부디 협회에, 국가에 기여해 주세요. 한국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같은 거겠지.
시우는 질린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
한편, 그런 시우 앞에서 제휘는 웬일인지 쭈뼛쭈뼛 망설이고 있었다.
치우라는 자료를 냉큼 치우지는 못하고, 그것을 품에 안은 채 힐끔힐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음…… 그래도 한번 내용을 확인해 보시는 편이 어떨까요? 협회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달라 보이던데요.”
“다르다니.”
“제작 길드에 다수의 인챈트를 의뢰했다더군요. 게다가 S급 헌터뿐만 아니라 A급 이상의 암속성, 화속성 계열 헌터들에게도 소집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
시우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무릎 위에 올린 다음 느슨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인챈트란 장비에 특정 속성이나 내성 따위를 부여하는 일. 다양한 속성의 헌터와 일을 하는 협회가 인력이 모자라다고 판단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한 눈짓에 제휘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예상이지만 조만간 이 헌터님께도 소집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뭐?”
이번에는 확실히 눈빛이 변했다. 그의 가지런한 눈썹이 크게 꿈틀하는 것을 본 제휘 역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 이 헌터님께서는 ‘흑염’을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협회는 암속성과 화속성 계열의 헌터를 찾고 있고요.”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제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헌터님보다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요…….”
“…….”
시우가 입을 닫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오싹한 정적은 없으리라. 괜한 말을 한 걸까. 제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치, 치우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이것을 불태워 버리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황급히 자료를 들고 등을 돌리려는데.
“─잠깐.”
시우가 대뜸 그를 붙잡았다.
“거기 놔둬.”
“예?”
“나중에 확인하지.”
시우는 책상 위 태블릿을 두들기며 말했다. 무심한 옆태를 넋을 놓고 응시하던 제휘는 이내 품에 안고 있던 자료를 스르륵 내려 두었다.
“아…… 넵, 알겠습니다.”
토독, 토도독.
태블릿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 위를 걸었다. 갑자기 업무라도 생긴 것일까. 어쩌면 그냥 괜히 건드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선배에게는 아직 소집령이 떨어지지 않은 건가?”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우가 툭 던지듯 물어왔다.
“예, 이유라 헌터님은 공식적으로 F급으로 측정되었다 보니 아무래도……. 소집령을 내리더라도 마지막 즈음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보루, 땜빵 같은 역할이겠다. 제휘는 굳이 그 말까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
싱겁게 대꾸한 시우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툭툭…… 태블릿을 몇 번 더 두드리던 시우가 갑작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선배 냉장고는 좀 어때.”
“예? 냉장, 고…… 말씀이십니까?”
제휘가 눈을 깜빡였다.
“어. 냉장고.”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듯했다.
……잠깐만. 이렇게 뜬금없이? 제휘는 재빨리 은하 오피스텔의 냉장고 내부를 떠올려 보았다.
“음, 틈틈이 채워 넣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장을 보기도 했으니 아직까진 식량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을 겁니다.”
“맥주랑 인터넷은 좀 줄이라고 했고?”
“네. 말씀은 드렸습니다.”
“요즘도 옛날 방송 같은 걸 챙겨 보고 그러나? 인기 가요 특집인지 뭔지, 그런 거 말이야.”
“뭐…… 그렇, 지요……?”
더듬더듬 대답하던 제휘의 눈이 빤히 시우를 향했다.
괴상한 시선을 느낀 걸까.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시우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뭘 봐.”
“아, 아뇨…….”
제휘는 핫,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궁금하신가 봐.’
하지만 바닥에 들이박은 시선과는 반대로 제휘의 입꼬리는 슬쩍슬쩍 올라가려고만 했다.
대표님께선 궁금하신 것이 틀림없다. 은하가 어떻게 지내는지 꽤, 아니 많이.
제휘는 눈치 없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궁금해하기 때문이 아닌, 내가 생각나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마치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참, 그렇지. 최근 들어 헌터님의 최애 안주가 쥐포에서 닭발로 바뀌었습니다.”
“…….”
“무뼈를 선호하시더군요.”
“…….”
“참고로 맵기는 3단계 정도로 드십니다.”
그것은 놀랍도록 실속 없는 이야기였다. 시우는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휘는 알았다. 그의 귀가 이곳에 쫑긋, 향해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시우는 제휘의 말을 단 한 번도 끊지 않았다. 용기를 얻은 제휘는 더 이상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음, 그리고 지난주에는 애견 미용 학원에 등록하시기도 했습니다.”
“애견 미용 학원?”
여태 무반응을 유지하던 시우가 스륵 고개를 들었다.
“이전부터 쭉 애견 미용에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이에요. 원래는 대학도 그쪽으로 가려고 하셨다고.”
“그렇군.”
관심 없다는 듯 짧고 싱거운 대답. 그러나 태블릿을 두들기던 시우의 손가락이 우뚝 멎어 있었다.
시선은 태블릿을 향해 있었지만 짐작하건대 시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분명 그런 눈빛이었다. 그 곁에서, 제휘는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강행욱 애견 미용 학원입니다.”
힐끗, 고개는 그대로 둔 채 저를 향해 시선만 돌린 시우를 향해, 제휘는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헌터님께서 다니시는 학원 말입니다. 그, 그냥, 혹시나 해서요.”
“……꽤 건방져졌군.”
“유능해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핫.”
“나가.”
“넵.”
결국 쫓겨나는 신세구나. 괜한 소리를 한 걸까. 제휘는 냉큼 그곳을 빠져나온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달칵─
시우는 제휘가 나간 뒤에야 태블릿에서 시선을 뗐다.
‘강행욱 애견 미용 학원입니다.’
‘이전부터 쭉 애견 미용에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이에요.’
“…….”
책상 위에 태블릿을 뒤집어엎고, 이번에는 곁에 놓인 자료를 향해 눈을 돌렸다.
기밀(機密).
자료 상단의 붉은 문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시우는 이내 그것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