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92
92. 수화기 너머의 6만 대군
“꺄아아아악! 사, 사람이! 사람이이이!”
탓.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등 뒤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유라 씨, 미쳤어요?! 아, 아니, 괜찮아요?!”
곧이어 4층 창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학원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또 다른 학원생들이 너도나도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은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다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놀랄 만도 했다. 4층에서 1층으로 한 번에 뛰어내리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높이였으니까.
“…….”
은하는 대답 대신 상처 하나 없는 몸을 가볍게 털고 일어났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도로를 덮쳤다. 막 출동한 경찰차, 소방차들이 줄을 지었다. 점멸등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려던 찰나.
“유라 씨!”
누군가 덥석 손목을 잡았다.
“지, 지금…… 어딜 가려고요? 저긴 게이트가 출현한 곳이에요.”
윤호였다. 게이트 방향으로 주저 없이 뛰어가려는 은하를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알아요.”
은하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힘 한 번 들이지 않고 빼내었다.
“그러니까 가야죠.”
“가다니요? 유라 씨가 가서 어쩌려고요?”
윤호가 황당하다는 듯 은하를 바라보았다.
“방금 4층에서 뛰어내린 거 맞죠? 각성자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유라 씨가 헌터는 아니잖아요.”
윤호의 말에 은하는 말문이 막혔다.
각성자가 곧 헌터인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는 각성을 하여도 헌터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
그것을 은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은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앞치마를 향해 스르륵 시선을 내렸다.
앞치마 가운데에 보란 듯이 찍힌 학원 로고. 지금 윤호가 바라보는 은하는 그저 같은 학원을 다니는 평범한 또래 여성일 것이다.
또한 은하는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내 삶’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
입을 닫은 은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윤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라 씨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아도 곧 있으면 헌터들이 출동할 거예요. 우린 그냥 그들이 올 때까지 몸만 피하면 된다고요.”
‘헌터님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헌터가 얼마나 많은데요. 굳이 사서 고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헌터님 말씀대로, 이미 계약도 끝났잖습니까?’
문득 제휘의 말을 떠올린 은하는 그 자리에서 망설였다. 게이트 앞에서 단 한 번도 망설여 보았던 적이 없는 은하가, 처음으로.
“어서 가요.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앞치마에서 시선을 뗀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삐비빅─
호루라기와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주변에 멈춰 있던 경찰차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 우와! 헌터다! 헌터들이 왔어!”
“어디? 헉! 스톰 길드잖아?”
“뭐? 대박! 스톰 길드? ‘파수꾼 레이’도 왔을까?”
찰칵, 찰칵!
대피하던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헌터들을 모습을 촬영하고 또 자신들의 SNS에 그것을 업로드했다. 개중에는 아예 라이브 방송을 켜는 이도 있었다.
그 외에도 신고를 받고 도착한 협회 요원들, 게이트 경매가 심화되면서 등장한 경쟁 길드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윤호가 은하 곁에 섰다.
은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앞의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놀이동산의 퍼레이드 현장처럼,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긴박함도 불안감도 찾을 수 없었다.
은하는 제자리에 못 막힌 듯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윤호가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계속.
그로부터 약 5시간 후.
주변 풍경은 거짓말처럼 평소대로 돌아왔다.
대기를 일그러뜨리던 균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주변을 통제하던 경찰들도 하나둘씩 퇴장해 갔다.
윤호가 옳았다. 은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듯 너무나도 빠르고 당연하게 돌아온 풍경.
학원 건물로 돌아온 은하는 창틀에 팔을 얹어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벗어 던지려고 했던 애견 미용 학원 앞치마는 그대로 입고 있는 상태였다.
“와아! 스톰 길드 헌터들이야!”
“꺅, 실물 처음 봐.”
게이트를 닫는 데에 성공한 스톰 길드 헌터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과 민간인들 사이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이번 게이트에서 얻은 전리품을 시청자분들께 살짝만 공개해 주실 수 있나요?!”
“하핫, 글쎄요. 전부 다 공개할 수는 없고…… 영웅 등급 아이템 3개 정도는 얻었네요. 그 외에도 많이 훼손되지 않은 몬스터의 사체나 뿔 따위는 짐꾼들이 가방 가득 들고 왔죠.”
그는 영웅 등급 아이템을 제외한 획득물들은 협력 관계이자 뛰어난 제작 길드인 ‘망치’ 측에 조달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기자들은 그들의 답변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수첩에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주변 민간인들의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은하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았다.
군데군데 단풍이 물든 가로수.
사거리를 질서 있게 지나치는 차량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횡단보도를 걷는 아이.
버스 정류장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당연하게 제자리로 돌아온, 언제나의 풍경일 뿐인데 어째서 그토록 낯설기만 한 것일까.
“…….”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가 떴고, 평화로운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어제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목을 축일 겸 학원 건물 1층 카페테리아로 내려온 은하에게, 때마침 군단의 부길드장 배준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은하는 테라스에 홀로 앉아 음료를 홀짝이며 그와 통화를 이어 갔다.
「마스터께서는 점차 회복하고 계십니다. 몸의 반점도 거의 사라졌고, 이대로라면 곧 눈을 뜨실 것 같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준환의 목소리는 지난번 통화했을 때보다 훨씬 더 밝아져 있었다.
“다행이네요.”
은하는 음료를 휘저으며 답했다. 달그락달그락, 얼음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청아했다.
「유라 씨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어제 출현한 게이트, 유라 씨의 학원 근처인 것 같던데 맞습니까?」
“네, 바로 앞 건물이었죠.”
그리 대답한 은하는 곧장 덧붙여 말했다.
“괜찮아요. 딱히 별일 없었어요.”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지. 은하는 무심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유라 씨라면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난리도 아니었겠어요. 도심 한복판에 게이트가 열리면 지하철이고 뭐고 다 멈추니까요.」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말에 교통 체증 걱정부터 하는 것을 보면 준환, 그도 역시 현대인이 틀림없었다.
역시 은하 자신만이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30년 전의 세상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뿐일 테니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 넓은 세상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언노운 게이트를 탈출하고 느꼈던, 바로 그 기분.
「아무튼 한시름 놓았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출현한 게이트였으니까요. 혹시라도 일반인이 휘말린 것을 보고 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셨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유라 씨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준환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었어요.”
달그락…….
차가운 음료 잔에 담긴 얼음이 부딪혔다. 은하는 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이슬을 손가락 끝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네? 그게 무─.」
「잠깐 나 좀 바꿔 줘.」
「앗……!」
은하가 음료를 한 모금 넘기는 사이, 갑작스레 수화자가 바뀐 것 같았다.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유라 씨? 나예요, 함수현. 병원에는 언제 오실 거예요? 요즘 많이 바빠요?」
막무가내로 스피커를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현. 은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수의 목소리가 연이어 겹쳐지기 시작했다.
「함수현! 비켜 봐! 크흠, 유라 씨, 안녕하세요. 석경홉니다. 아니 글쎄, 배준환 이 자식이 유라 씨가 픽시 파우더를 구해다 주셨다는 걸 어제 말했─.」
「야, 너나 비켜! 내가 유라 씨랑 전화하고 있잖아!」
「악! 이게 미쳤나!」
「뭐? 너 이 X끼, 내가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X발.」
「@!%%^$*?@^#──.」
우당탕탕!
“…….”
은하는 수화기에서 3cm가량 귀를 떼어 냈다.
쪼르륵.
빨대를 빨아올리며 그윽한 아메리카노 향을 음미하고 있자, 곧 상황이 일단락된 듯 근엄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커험, 죄송합니다. 유라 씨랑 통화한다는 것을 들켜 버려서 녀석들이 좀 흥분했나 봅니다. 음…… 잠시만요.」
다시 돌아온 준환이었다.
잠깐 양해를 구한 그가 휴대전화 하단을 손바닥으로 막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입 좀 처닫아!” 하는 고함이 따라왔다.
“…….”
빨대에서 입을 뗀 은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눈앞에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화기 너머로 왁자지껄한 그곳의 분위기가 아주 잘 전달되었다.
「실례했습니다, 하하. 많이 시끄러우시지요?」
“아뇨, 괜찮아요.”
「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준환의 목소리에 서린 당혹감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하여, 은하는 결국 작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하도 어수선한 탓에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은하는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휴대전화를 옮겨 가져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병원에 계신 거 아닌가요?”
은하도 그들의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전해지는 엄청난 데시벨.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긴 했으나 과연 병원에서 저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아, 염려 마십시오. 마스터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으니 그쪽은 장미 길드에게 맡기고, 저희는 잠시 협회에 나온 상황이거든요.」
“협회요?”
「예. 얼마 전에 협회에서 긴급 호출이…….」
돌연, 준환이 말을 하다 말고 침묵했다.
“……여보세요?”
통화가 끊어진 걸까. 수화기를 확인하려던 찰나 한발 늦게 준환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유라 씨. 유라 씨의 주특기는 흑염이 아닙니까? 암흑 그리고 화염. 그렇지요?」
“……? 네, 그런데요.”
「지금 협회에서 암속성과 화속성을 가진 헌터들을 소집하고 있다는 소식, 혹시 들으셨습니까?」
“아뇨.”
「아직 연락이 가지 않은 모양이군요. 통화로 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만간 한국에 국가급 재난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가급 재난…… 이요?”
「예, 어쩌면─.」
준환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언노운 게이트일지도 모릅니다.」
“…….”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언노운 게이트. 그의 말이 진짜라면, 은하가 2031년 현대에 나오고 나서 벌써 세 번째였다.
이상했다.
은하가 한창 헌터 활동을 이어 가던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언노운 게이트는 이처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렇듯 언노운 게이트가 연달아 출현한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지요.」
그건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협회가 암속성과 화속성 헌터를 찾고 있다는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협회에서 듣게 되겠지요.」
준환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유라 씨,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협회에 가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상치 못한 제안에, 빨대로 음료를 휘젓고 있던 은하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가요?”
「예. 유라 씨가 와 주신다면 무척 든든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랭크는…….”
「랭크요?」
하하. 털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제가 유라 씨께 했던 맹세, 기억하고 계시지요?」
얼마 전 준환이 자신의 오피스텔을 찾아 왔던 날. 은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군단을 대표하여 당신께 6만 대군의 맹세를 바치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우리 군단이 당신의 검이 되기를 망설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서약입니다.’
말아 쥔 주먹을 왼쪽 가슴에 올려 두며, 그는 분명 그리 말했다.
「그 누구도 당신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수화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전해져 왔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
「…….」
이후 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떠들썩한 고함도 어느덧 고요해져 있었다. 은하가 대답하기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의 6만 대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