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93
93.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유라 씨, 잠깐만.”
수업이 끝난 뒤, 강습실을 빠져나오려는 은하를 누군가 붙잡았다. 단발머리의 중년 여성. 같은 수업을 듣는 학원생 중 하나였다.
“이거 받아요.”
그녀는 은하에게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 속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반찬 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반투명한 뚜껑 너머로 김치나 장아찌 등 먹음직스러운 밑반찬이 꾹꾹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은하가 혼자 산다는 것을 들은 이후부터 그녀는 2, 3일에 한 번꼴로 이렇듯 반찬을 챙겨 주었다. 그러나 은하는 제게 내밀어진 종이 가방을 냉큼 받지 못했다.
“반찬이라면 지난번에도 받은걸요.”
“에이. 우리 애들한테 보내고 남는 거 챙긴 것뿐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리 말한 그녀는 기어코 은하의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참, 저번에 준 멸치 볶음은 어땠어요? 우리 딸은 고추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맵다고 난리던데.”
“아뇨, 전 맛있었어요.”
“어휴! 유라 씨가 우리 딸보다 낫다니까.”
그녀는 깔깔 웃으며 은하의 등을 가볍게 팡팡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이었지만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은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푹 눌러쓴 모자에 하얀 스니커즈.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은하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 같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누가 그랬던가. 처음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 낯설다 싶은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지기도 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같은 생활을 쭉 이어 온 기분이었다. 은하는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맛있는 냄새가 솔솔 번졌다.
「17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하는 현관문 앞에 섰다. 삐빅,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신발장에 제휘의 구두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은하의 귀가 시간에 맞춰 돌아간 모양이었다.
“다녀왔어.”
은하의 목소리에 근처에서 번쩍 고개를 든 휴지가 총총 다가왔다. 은하는 신발도 벗지 않고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휴지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의 꼬리가 느릿하게 살랑였다.
“반겨 주는 거야?”
은하가 옅게 웃었다.
비록 휴지가 ‘잘 다녀왔어?’ 하고 말을 걸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집에서 누군가 저를 맞이하는 기분. 따듯하고 편안한 이 기분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휴지와 시선을 맞추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은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반달 모양으로 반듯하게 접힌 눈매를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있으니 집이 꽉 찬 기분이네.”
휴지의 등을 길게 쓰다듬던 은하의 손이 녀석의 엉덩이에 닿는 순간.
“……!”
살랑거리던 꼬리가 멈칫 굳어 버렸다.
바닥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돌연 번쩍 들더니 후다닥 거실로 자리를 피해 버리는 휴지. 그와 동시에 메시지창이 시야에 무서운 기세로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저, 저 건방진 개를 보소! 감히 지금 우리 언니 손길을 거부한 것이냐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춤을 짚습니다.] [언니, 저런 배은망덕한 개는 더 이상 돌볼 필요가 없다며 지금 당장 보호소로 보내 버리자고 제안합니다.]은하는 쓰다듬을 대상을 잃고 허공에 붕 떠 버린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엾잖아.’
끊임없이 벽보를 붙여 휴지의 본래 주인을 찾고는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연락 한 통 없었다.
제휘가 마땅한 보호소를 알아보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휴지와 보낼 수 있는 날은 어차피 길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잘해 주고 싶었다. 실제로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휴지야, 목욕하자.”
“……!”
……때때로 경계의 눈빛을 보내오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휴지야, 이리 와 봐.”
침실 바닥에 깔린 카펫. 그 위에 앉은 은하는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은하를 응시하는 녀석의 파란 눈동자에는 희미한 의심이 서려 있었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은하가 등 뒤에 숨긴 브러시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괜찮아, 살살 할 거니까 하나도 안 아플 거야.”
“…….”
“어서. 착하지?”
“…….”
그제야 휴지는 슬금슬금 은하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상태였지만 얌전히 은하 앞에 다가와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참 온순했다.
목욕물을 받는 것을 본 순간 온몸으로 거부하는 녀석을 강제로 씻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아쉬운 대로 빗질이라도 해야지.
“옳지.”
작게 중얼거린 은하가 빗질에 앞서 먼저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관심 없는 듯한 얼굴과는 반대로 느릿하게 흔들리는 꼬리가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안 아프지?”
브러시로 녀석의 털을 조심스레 빗어 내려가던 은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빗질 잘한다고 학원에서 칭찬도 받았거든. 나한테 재능이 있대.”
그게 정말일까? 은하는 빗질을 멈추지 않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당연히 휴지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은하는 느슨해진 입매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힐끔, 녀석의 푸른 눈동자가 은하를 향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 눈과 마주할 때면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으니.
휴지라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어 줄 것 같았다. 나를 경멸하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묵묵히.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협회에 가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유라 씨가 와 주신다면 무척 든든할 것 같습니다.」
문득 준환의 제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해 놓고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어서 오늘 수업 도중 강사가 했던 말도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마침 필기시험 원서 접수 기간이니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때요? 필기는 실기보다 훨씬 쉽기도 하니 부담 없이 쳐 봐요.’
‘자신감을 가져요. 유라 씨는 좋은 애견 미용사가 될 거예요.’
휴지의 털을 빗던 손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는 가까워진 학원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사이에 있는, 빗질이 꽤 능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이윽고 빗질을 우뚝 멈추어 버린 은하는 되뇌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침실을 아슴푸레 밝히는 주홍색 스탠드 불빛이 벽면에 그들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문득 휴지의 푸른 눈이 은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열린 창문에서 밤바람이 미끄러졌다. 두둥실 부풀어 오른 커튼이 지나간 그곳에서,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벽장 문고리에 홀연히 걸린 새까만 드레스. 마지막으로 입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조금씩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었다.
“나…….”
그래서일까, 은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대로 이유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 * *
하늘의 달마저 숨어 버린 깊은 밤.
스르륵, 카펫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하얀 개. 보석같이 푸른 눈동자가 침대 위를 향했다.
이따금씩 이불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옅은 숨소리만이 차지한 공간.
곤히 잠든 은하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졌다.
처음에는 홀쭉했던 그림자는 소리 없이 점차 거대하게 변화했다. 곧 인간의 형상을 띤 그림자는 은하의 머리맡에서 조용히 기울어졌다.
“…….”
구름에 가리었던 달이 드러나고, 어두컴컴했던 방이 조금씩 밝아졌다. 이윽고 드러난 모습은 이전의 새하얀 개가 아닌, 검푸른 머리칼의 시우였다.
상체를 살짝 굽힌 시우는 잠든 은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휴지는 조금 심했습니다, 선배.’
시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살짝 비틀 뿐, 혹시 그녀가 깨어나기라도 할까 소리 내서 말하지는 못했다.
그늘이 드리웠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달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 시우는 잠든 은하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은하의 자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겨를이 없어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보니 잠든 얼굴은 시우가 여태 알던 은하의 인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아니지. 생각해 보면 시우가 상상하지 못했던 건 비단 은하의 자는 얼굴이 온순하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은하의 집에 ‘휴지’의 모습으로 머무는 동안, 시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게 되었다.
개의 정체가 시우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던 은하는 시우에게 사료를 주거나 개 껌을 던지고 물어 오라 시키는 등 믿기지 않는 일을 저질렀던 것.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그녀가 직접 욕조에 그를 담가 몸을 씻겨 주고자 한 일이었다.
‘위험했어.’
그녀의 손이 배에 닿는 순간 하마터면 신수 모습으로의 현신을 해제할 뻔했다.
그것은 단언컨대 화신이 된 이래 가장 크게 궁지에 몰린 일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으로 철퍽 눈을 가린 시우는 어두운 방 안에서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