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94
94. 당신을 위한 변덕
‘저…… 대표님,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휴지의 정체가 시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 제휘는 그를 걱정했다.
휴지가 시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은하가 어떤 짓을 벌일지에 대해 염려하는 부분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평소 ‘현신(現神)’ 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시우를 잘 알기에 그랬던 것일 테다.
현신이란 권능을 포함하여 단 한 명의 화신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 중 하나였다. 대개 자신과 계약한 존재를 닮은 모습으로 외형을 바꾸는 것을 일컬었다.
‘적당히 지켜보다 돌아갈 거야.’
‘헌터님은 대표님이 정말 개인 줄 알고 계시던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아무튼 넌 입 다물고 있어.’
‘하지만…….’
시우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하게 개의 모습으로 지낼 겨를 따위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
잠든 은하의 얼굴을 응시하던 시우는 스르륵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했다.
초연한 달빛 아래 한참을 굳은 듯 서 있던 시우는, 그렇게 소리 없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
이른 아침 눈을 뜬 은하는 침대 밑 텅 빈 카펫을 보며 천천히 눈을 비볐다. 휴지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어딜 간 거지?’
거실로 나와 식탁 아래, 화장실, 옷 방, 발코니까지 확인했지만 휴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현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가 없어도 내부에서는 열고 나갈 수 있었지만, 개가 문고리를 돌리고 나갔을 거라고는 쉽사리 상상할 수는 없었다.
은하는 휴대전화를 들고 제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님, 휴지가 사라졌어요.”
「그래요?」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은하의 얼굴에 굳었다. 그리고 다그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개가 사라졌다니까요. 목줄도 인식표도 없이 혼자서요.”
「아.」
그제야 제휘는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 그렇군요. 헌터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휴지님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 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제가 지인에게 보호를 부탁해 놨으니까요.」
“……뭐라고요?”
은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매니저님 말씀은 녀석이 직접 문을 열고 이곳을 나갔단 소린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근처에서 우연히 제가 발견한 거고요.」
“…….”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이곳을 탈출한 휴지가 오피스텔 밖에서 우연히 제휘를 만나 그의 지인에게 맡겨졌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어쨌든 녀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합니다.] [이제 이 코를 찌르는 개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환기만 시키면 끝이라며, 어서 빨리 창문을 열라고 재촉합니다.]은하는 눈앞에 떠오른 노란 메시지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휴대전화 스피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인분이 휴지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셨죠? 확인할 수 있을까요?”
만일 제휘의 말이 진짜라면 안심해도 좋겠지만, 은하로서는 녀석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전화를 끊은 제휘는 약 5분 뒤 메신저를 통해 정말로 사진 한 장을 보내 왔다.
은하는 제휘가 보내온 사진을 터치해 크게 확대하여 보았다.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운 하얀 개. 새파란 눈동자를 보아하니 분명 은하가 아는 휴지가 맞는 듯했다.
그렇게 휴지의 무사를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이나마 걱정을 거둘 수 있었다.
다만 휴지가 무슨 수로 오피스텔을 스스로 빠져나갔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 * *
실버문 본사 최상층.
“됐습니다.”
촬영을 마친 제휘는 휴대전화를 내려 두었다. 창가에 얌전히 앉아 있던 하얀 개는 그제야 눈부신 푸른빛과 함께 사람 형상으로, 시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느슨해진 넥타이를 여미며 작게 투덜대는 시우. 그동안 은하의 집에서 시키지 않아도 현신화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그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헌터님께서 휴지이…… 커흠, 큼, 대표님의 안부를 물어보시는데.”
이렇게 사진이라도 찍어서 확인을 시켜 줘야 안심하실 거 아닙니까. 제휘는 뺨을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앞으로도 종종 안부를 확인할 겸 주기적으로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시니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
시우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그렇다고 버럭 성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 뿐.
“길에서 주운 개가 뭐가 그리 걱정된다고.”
“휴지…… 대표님을 볼 때면 무척 잘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헌터님이 그렇게 웃는 모습 처음 보았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분명 헌터님은 대표님을 가족처럼 생각하셨던 겁니다.”
제휘는 모바일 앨범에 ‘휴지’의 사진을 저장하며 빙긋 웃었다.
“앞으로도 종종 만나러 가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해.”
시우는 창문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가시 돋은 반응이었지만 제휘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귀훈에게 힘을 증명한 이후 늑대의 압박이 이전보다는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우 주변에는 귀훈의 눈과 귀가 심겨 있었다.
시우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기어코 따돌려 가면서, 심지어는 평소 꺼려 하던 ‘현신(現神)’을 하면서까지 은하의 곁에 머무르길 선택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얼굴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한테 재능이 있대.’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옅게 웃던 은하. ‘신시우’는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듯 말하던 목소리의 높낮이, 표정 등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올려 보았다.
학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던 모습. 강사에게 칭찬을 받으며 어색하게 웃던 모습. 집으로 돌아와 밤을 새우며 털을 빗던 모습. 그리고…….
‘휴지를 부탁해요.’
학원 앞에 출현한 게이트를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가던 모습까지.
시우가 바라본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
그런 그녀가, 이제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시 헌터님이 또 사진을 요구하면 그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잠깐.”
돌연 시우가 제휘를 붙잡아 세웠다.
“S급 소집 말이야. 모레였던가?”
“예? 아, 예에……. 그거라면 최 부장이 잘 둘러서 거절해 두었을 텐데요.”
“간다고 해.”
“……네?”
제휘가 잘못 들었다는 듯 크게 눈을 끔뻑였다. 시우는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한번 말했다.
“가겠다고. 협회.”
“지, 진심이십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고 전해.”
시우의 푸른 눈이 힐끔 제휘에게로 향했다.
“백랑은 협회장과 일대일 대면을 원한다고. 다른 S급들과는 따로.”
늑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시우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제휘는 지금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시우가 백랑으로서 협회를 방문한 적은 고작 한두 번밖에 없기 때문.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신 건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시우의 눈치를 살피며 제휘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유리창에 비스듬히 기댄 시우는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무심히 응시했다.
‘이대로 이유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시우는 천천히 주머니를 뒤적였다.
꾸깃꾸깃한 연고.
“……그냥.”
손바닥 속 오도카니 놓인 연고를 슬며시 쥔 시우는 제휘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변덕.”
* * *
군단 본부 근처 대학 병원.
2층 조제실에 들어선 거대한 그림자. 도복 차림의 유환이었다.
입었다기보다는 걸친 것에 가까운 상의는 그의 복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단단한 복근보다 눈에 띄는 것은 대각선 방향으로 주욱 길게 그어진 11자 흉터였다.
그는 어지럽혀진 조제실 내부를 눈으로 스윽 훑었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 사이로 피곤한 얼굴의 로제와 눈이 마주쳤다.
“왔어? 좀 지저분하지? 거기 대충 앉아.”
“꼬맹이는?”
“점차 좋아지고 있어.”
로제는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를 질끈 묶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걸려 있던 가운을 치우고 그곳에 앉으라는 듯 유환을 향해 눈짓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라면 아마 며칠 내로 눈을 뜰 거야.”
“다행이군.”
짧게 대답한 유환은 자리에 앉아 힐끗 로제를 바라보았다.
푸석한 머리카락을 대충 올려 고정한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아마 며칠 내내 잠도 자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겠지.
“꼬맹이 상태도 안정되었으니 너도 이제 그만 쉬지 그래. 내일 협회에도 나가 봐야 하지 않나.”
유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
“최근에 GIA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문, 너도 이미 알고 있지?”
달칵.
유환의 말꼬리를 잘라 낸 로제는 근처 캐비닛을 열어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캡슐 형태의 알약을 와르르 쏟아 냈다.
유환은 저게 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각종 영양제와 비타민 따위일 거라 추측했다.
“그게 아주 헛소문은 아닐 거란 점도 너라면 알고 있을 거야.”
그것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은 로제는 물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운 후에야 다시 시선을 들어 유환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협회장을 찾아가 예언을 전했다나 봐.”
“예언?”
로제의 약병에서 시선을 뗀 유환이 짧게 되물었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 성언이라고도 부르는 그거. 그들의 말로는, 남해안에 곧 거대한 게이트가 출현할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나 봐.”
과연. 이 갑작스러운 S급 소집령의 이유는 그것이었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환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로제, 네 생각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반은 동의해.”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소리군.”
유환이 중얼거렸다. 근처 의자에 걸터앉아 가볍게 다리를 꼰 그녀가 팔짱을 꼈다.
“남해안뿐만이 아닐지도 몰라. 내 추측으로는─.”
로제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최대 다섯.”
“……!”
유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