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
00010 김수현, 통과의례를 시작하다. =========================================================================
문득 예전에 재밌게 본 TV 프로가 생각났다. 평범한 인생을 살던 사람이 갑자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 프로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왔다. 사람은 일이 닥친 후 딱 15분만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15분 후에는 이성은 없어지고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나 뭐라나.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가 이끌고 있는 일행은 그 부분은 건너 뛴 상태라고 봐도 괜찮을까?
현재 우리가 있는 위치는 숲의 높은 언덕으로, 고지대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언덕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가파른 길을 올랐기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아래를 보니 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우리가 앉아있던 공터는 데드맨으로 빽빽이 둘러싸여있었다.
사람들은 한 손으로 가려질 만큼 작게 보이는 공터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만약 발을 빼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것들의 먹이가 됐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기세 좋던 입담녀도 이때만큼은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복잡했다. 괴물이 있고 목숨이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인 그들의 얼굴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내가 도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웬만하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지켜볼 예정이었다. 기본적인 정보는 보긴 했지만, 그래도 실제 행동을 지켜볼 필요는 있었다.
“헉! 헉! 오라질…. 저것들은 도대체 뭐야?”
방금 올라온 참이라 여전히 숨을 몰아 쉬는 박동걸.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따지고 보면 방금 전의 위기도 그가 돌멩이를 걷어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 원인제공자라는 소리였다. 나라면 미안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텐데, 어지간히도 낯짝이 두꺼운 모양이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자 안현의 품에 안긴 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안솔이 보였다. 일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번의 경험으로 한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지금 울고 있는 안솔이 내가 알고 있는 광휘의 사제가 맞는다면, 그녀의 미래는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행운 능력치 100포인트를 생각해도 통과의례는 당연히 넘길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미래는 조금만 다른 행동을 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의 눈물을 닦아주던 안현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화살을 날려 데드맨을 처리한 게 나였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서 고마워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언덕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르렁! 그르렁!
“꺅!”
“으앙!”
원래 주변에 있던 놈인지 아니면 공터에서부터 우릴 쫓아온 건지 몰라도, 필사적으로 언덕을 오르려는 데드맨이 새로이 두 마리 등장했다. 그러나 아까만큼의 속도는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데드맨들은 먹이를 발견했을 때 직선으로 달려드는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다. 그러나 중간에 방향을 곡선으로 틀거나 높은 고지대에 있는 경우 돌진속도는 현저히 줄어든다. 언덕도 올라오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올라오기 전에 그냥 머리통에 칼을 쑥 찔러주면 그만이다.
처음 데드맨을 봤을 때보단 공황상태가 덜했지만 여전히 비명 소리는 나오고 있었다. 이보림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녀를 억지로 살릴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안솔이랑 듀오로 비명 노래를 부르는 게 영 거슬리기도 했고, 사용자 정보를 봐도 도무지 쓸 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는다면 자기 복일 테고 죽는다면 스스로의 운명일 것이다.
‘이제 슬슬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협력이냐, 분열이냐, 아니면 유지냐.’
마음 편히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아래서 올라오는 데드맨들을 처리하는 게 선결과제였다.
그때였다. 안현이 몸을 움직였다. 공터에 검을 놔두고 왔는지 그는 안솔을 놔두고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를 쥐어 들었다. 나는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다가, 안현의 행동을 지켜볼 요량으로 잠시 장전을 멈추었다.
만일 대한민국 성인 남성들에게 칼 하나를 주고 일정거리에 있는 과녁을 맞추라고 하면 몇 명이나 맞출 수 있을까? 조금 전 칼로 데드맨의 왼팔을 자른 게 실력인지 아니면 운이었는지,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방금 전과 다르게 신중하게 방향과 거리를 재던 안현은 이내 있는 힘껏 그것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리고 결과는….
퍽!
“별것 아니군. ”
안현의 돌팔매질은 훌륭했다. 돌멩이는 퍽 소리를 내며 데드맨의 머리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힘없이 고꾸라지는 괴물을 보며 안현은 뭔가 깨달은 듯 눈동자를 빛내곤 나머지 하나도 가볍게 처리했다.
“그래. 별것 아니지. 그러니까 고작 두 마리 처리해놓고 거드름 피우지 말라고.”
그러나 안현이 잡는 무게가 아니꼬웠는지 박동걸의 태클이 다시 들어왔다. 안현은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박동걸을 응시했다.
이윽고, 안현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아저씨 덕분이네. 고마워.”
“갑자기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
“아까 우리 솔이에게 덤빈 놈을 보니까 가슴팍에 묵직한 게 하나가 박혀 있더라고. 덕분에 돌멩이도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안현이 하는 말을 듣던 박동걸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걸 알아챘는지 대번에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안현의 말인즉슨 네가 돌멩이를 걷어차서 공터 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는 의미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방, 그래서 내가 찬 돌멩이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꼴이 났다? 그게 내가 찬 돌멩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난 그런 소리는 한 기억이 없는데. 그냥 고맙다고.”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안현을 보며 박동걸은 화를 내려고 폼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씨벌, 그럼 너희들은 뭐 잘한 거 있냐? 너한테 지금 붙어있는 년 때문에 우리가 다 죽을뻔한 거 몰라?”
“년?”
“그럼 씨팔 그게 미친년이지 아니야? 다른 사람들 다 잘만 오는데 애새끼도 아니고 스스로 일어나는 것도 못해?”
안현의 얼굴이 굳었다. 이 부분만큼은 할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솔은 자기 때문에 오빠가 당하는 게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쓱쓱 닦기 시작했다.
“아. 센척하는 거 진짜 꼴 보기 싫네.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은 누가 했는데.”
하지만 우리에게는 입담녀가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로 안현을 원호하며 지원사격을 가하자, 박동걸의 인상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야, 쌍년. 그 조잘거리는 예쁜 주둥이 안 닥치면 진짜 죽여버린다. 응?”
“야, 쌍놈. 나 같으면 미안해서라도 입 닥치고 있겠다. 일은 싸질러놓고 꼬라지 하고는. 그리고 예쁜 건 알아가지고.”
“이 우라질 연놈들이 오늘 정말 초상을 보려고 이러나….”
셋 다 잘못한 건 있지만 애초에 미운 털이 박힌 건 박동걸이었다. 주변 분위기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걸 알았는지 결국 박동걸 또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겨우 위기를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다시금 다툼이 일어났다. 이 정도면 상성을 벗어나는걸 넘어서 거의 원수지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마음속에 답답함이 가시려다가 다시 쏙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더듬었지만 지금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박동걸을 자르는 게 일을 진척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도 애초에 당분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러는 게 옳았다. 기껏 고생하면서 전부 여기로 데려왔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히 거슬렸다.
어찌됐든 다들 마음 한구석에 방금 전의 기억은 생생할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해도 딱히 이거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일단 자리를 피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끼릭!
일부러 석궁을 장전하는 거친 소음을 내자 역시나 모두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화살을 장전한 후, 난 모두와 시선을 교환하며 말했다.
“일단은 저 데드…. 흠. 괴물들을 피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어쩌라고.”
‘미친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순간 박동걸의 입 안에 화살을 박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곳에 둘 밖에 없었으면 진작에 아가리를 박살냈을 것이다.
“지금 서로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다투는 건 시간 낭비 같습니다.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그 동안 서로 의견을 나누고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말은 딱히 토를 달 수 없는 정론 이었다. 물론 질문이 나올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질문을 한 사람이 의외였다.
“자리는 왜 비우세요? 의견을 나눌 거면 같이 하는 게 낫잖아요.”
내게 말한 사람은 처음에 미처 정보를 보지 못한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성이었다. 거의 나와 또래거나 한두 살 어려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를 가진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일단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고 해보라고.’
“…그 괴물이 공터에서처럼 뛰쳐나올 수 있으니까요. 혹시 모르니 주변에서 경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의견 조율이 끝나면 불러주세요.”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세요.”
조금 대답을 늦게 하긴 했지만 다행히 쓸데없는 의심을 사는 건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망을 본다는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을 마친 후, 나는 올라오면서 눈여겨본 은폐하기 적합한 장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숲 안에 몸을 숨긴 후 나는 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이윽고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되고, 시각이나 청각이 한층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떨어져있는 거리에서는 일행들은 나를 못 보겠지만, 나는 그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그들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내가 자리를 옮긴 후 언덕에는 냉랭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저기 언덕 아래 널브러진 데드맨들의 시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부추긴다. 입에 꿀을 발랐는지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사람은 없다. 표정들은 전부 제각각 이었는데 가장 볼만한 건 바로 박동걸 이었다. 이번에는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인상을 일그러뜨렸다가 다시 히죽 웃기도. 혹시 정신병자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다른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나서 사람들을 이끌며 잘만 살던데 지금 모인 일행에는 확실한 리더를 맡을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건 결코 상책이 아니었다.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 마음에 있는 불안감은 커지고, 그렇다면 이성을 잃고 본능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 순간, 두 명의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일행의 중앙에 선 사람은 의외로 이보림이었다. 동시에 몸을 일으킨 입담녀는 그녀를 흘끗 보고는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일단 이보림이 하는 말을 들어볼 요량인 듯싶었다. 이윽고 불안한 눈으로 모두를 둘러보던 이보림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 모두 방금 전 괴물들을 보셨을 거예요. 솔직히…. 전 도우미라는 천사에게 들었을 때만해도 질 나쁜 꿈을 꾼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현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네요. 물론 불안해요. 정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겠죠.”
딱히 태클을 거는 사람들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얘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이어지는 이보림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방금 전에는 망을 보러 간 분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도 우리랑 똑같은데 기댈 수만은 없잖아요? 지금은 서로 싸우기 보단 협동을 통해 살 길을 모색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이보림의 말은 통과의례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협동하고 행동한다. 그녀의 설득이 조금이나마 먹혀 들었는지 일순 죽어있던 분위기가 조금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여태껏 쭉 풀이 죽어있던 이신우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누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뒷말을 흐리긴 했어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네가 먼저 말을 꺼낸 만큼 생각한 바를 말해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보림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앞으로 함부로 다투지 말고 서로 차분하게 의견을 교환했으면 해요.”
“나는 동의한다.”
그때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기회를 엿보던 박동걸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박동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진중하고 침착함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얼핏 보면 제법 진심으로 보여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나는 그 표정이 연기를 가장한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놈은 또 무언가를 못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