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1
00011 반으로 갈라지다. =========================================================================
“또 나서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바로 들어오는 태클에 박동걸은 입담녀를 보며 눈살을 찡그렸지만 딱히 받아 치진 않았다. 그리고 전에 비하면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방금 전 이 아가씨가 한 말 안 들었어? 서로간에 다투지 말자고 했잖아.”
“지금까지 네가 한 행동이나 돌아보고 말하지 그래?”
“뭐, 그건 그래. 그래도 일단 서로 의견을 내자고 모인 만큼 말이라도 들어보는 게 어때?”
순순히 인정하는 박동걸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헛바람을 삼켰다. 입담녀는 지금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생각하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먼저 공터에서 했던 행동은 모두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내 말투가 험해도 너무 껴 듣지 않았으면 해. 원래 이런 말투로 살아와서 그런 거지 딱히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은 있는 건 아니었어.”
박동걸은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아주 약간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불만 어린 시선은 남아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조금씩 일행의 정 중앙으로 이동한 후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일단 얘기를 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박동걸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은행원 아가씨가 한말 일부는 공감해. 그래. 지금 말다툼을 하는 건 옳지 않아. 서로 나쁜 감정은 잠시 묻어두고 어떻게든 저 괴물들한테서 달아나 살 궁리를 하자고. 어때?”
“…그럼 한번 말해보세요.”
“말한 대로야. 일부는 공감하지만 나머지는 불만스러워. 먼저 결론을 말하면 난 각자 처한 상황이 어떤지 스스로들 깨달았으면 해.”
“어떤 부분이 불만스러우신데요.”
이보림이 약간 투덜거리며 묻자, 박동걸은 순간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살 길을 모색하는 건 당연하지만 난 협동이란 건 할 수 없을 것 같아. 협동? 말은 좋지.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나, 심정으로 보나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
“뭔 소리 하나 했더니. 그럼 나가. 나가서 혼자 도망치고 혼자 살아.”
입담녀가 코웃음 치며 쏘아 붙였으나 박동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긍하는 빛을 띠우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론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럼 나가라고.”
“일단 들어봐. 끝까지 듣고, 응? 다 듣고 말하라고.”
안현이 눈치를 주자 입담녀는 발끈하긴 했어도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박동걸은 일행 전부의 시선을 받으며 유유히 말을 이어나갔다.
“난 무식해. 그리고 거칠지. 대신 거짓말이란 건 할 줄 몰라. 단순하니까. 난 방금 전 공터에서 도망치고 목숨을 잃을 뻔 하면서 많은걸 느꼈고 또 생각했어. 그 이후로 협동이란 단어가 상당히 거슬리게 들려.”
박동걸의 말에, 모두들 방금 전 공터에서의 일을 상기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반응을 기다렸는지, 박동걸의 목 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서웠어. 쪽 팔리지만 오금이 저리는 게 실제로 오줌을 지릴 뻔 했다고. 생각해봐. 항상 영화나 TV에서만 보던 그런 놈들이 실제로 내 눈 앞에 나타났는데 별 수 있겠어? 지금 저기 망 보고 있는 놈이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대부분은 저 괴물들의 맛있는 식사 한끼가 됐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했어. 자랑도 아니고 위협할 생각도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난 칼 밥 좀 먹어본 놈이야. 칼이든 뭐든 이제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어. 왜냐고? 죽기 싫으니까. 공터에서는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랐고 당황했지만, 난 살고 싶어. 그래서 또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난 살기 위해서 이 무기를 휘두를 거야.”
박동걸의 말은 길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의 말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충 놈의 속내를 짐작한 나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일단 더 두고 볼 요량이었다. 이윽고 그는 한 명 한 명을 지목하며 얘기를 끌어나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거기 양아치 같은 기생 오라비는 운동 좀 한 것 같아 보여. 무기도 들고 왔고 괴물들도 처리해봤으니 뭐…. 그리고 거기 너. 너도 네 입만큼 행동할 수 있다면 일말의 도움은 될 수 있겠지. 석궁 들고 있는 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 이 네 명은 서로 확실하게 도울 수 있어. 즉 협동이라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소리야. 안 그래?”
박동걸의 말을 들은 안솔, 이신우, 이보림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 이었다. 이윽고 이보림은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협동할 수 없다는 건가요?”
“워워. 진정해. 아직 말 안 끝났어.”
“도대체….”
“그럼 너는 저기 저놈이나 석궁 든 놈처럼 할 수 있어? 너희들이 돌멩이나 칼을 들고 괴물들을 찌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 라니까. 특히 너랑 저놈 옆에 딱 붙어있는 애는 그것들이 나올 때마다 꺅꺅 소리만 질렀잖아. 저기 있는 여자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기라도 했지. 방해는 안 했잖아. 그 정도만 됐어도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을 거야.”
박동걸이 가리킨 여자는 방금 전 나에게 왜 자리를 비우냐고 물어본 여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차가우면서 차분한 인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간이 시간이 흐르고, 이보림은 종래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반에 비해서 상당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버린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보림을 보며 나는 박동걸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의도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시 생각을 해볼만한 발언 이었다. 초반에는 그냥 머릿속에 똥만 든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현 상황을 제법 정확히 파악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 속셈이 어떻든 간에 말이다.
기가 죽은 이보림을 보며 박동걸은 누런 이를 드러내더니, 자신감을 회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앞서가. 그런 얘기는 아직 안 했다고. 벌써부터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그렇다면 서로 협동 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행동을 보일 때 성립이 된단 말이야. 아마 그냥 이대로 어물쩡 협동한다고 치고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양아치 놈은 지 애인 챙기느라 바쁘고 저 꼬맹인 또 얼어 붙어서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걸. 난 그런 어벙한 놈들까지 보호하고, 협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야. 난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해. 너희들은 안 그래?”
입담녀도 딱히 할 말은 없는지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성 은행원 얼굴은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붉은 상태였다.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지만 그녀도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느긋이 확인한 박동걸은, 드디어 승부수를 띄울 때라고 느꼈는지 청산유수 같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한 건 여기 누구라도 똑같을 거다. 그걸 인정한다면 말은 똑바로 하자고. 여기 있는 일부 사람들은 협동을 할 수 없어. 지금만 봐도 맹목적으로 의지만 하고 있잖아. 거기 꼬맹이. 그렇지?”
안솔은 자신이 지목 당하자 당황한 얼굴로 현을 보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 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생각대로 말이 안 나오는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박동걸은 그 모습을 보며 과장되게 두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저놈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아까 꼬맹이 보고 스스로 걸어오라고 한 거잖아. 아까 그 석궁 든 놈이 가자고 했을 때 같이 갔으면 저런 꼴 안 당해도 됐잖아. 응? 반응이 다들 왜 그래? 내가 또 개소리 한 거야?”
개소리 까지는 아니다. 속내가 어떻든 현실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말 그대로 돌 직구를 던진 셈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지금 바로 증명해봐. 지금 바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아까 그 괴물 한두 마리라도 잡고 내 앞에 가져와 보라고. 그러면 당장 입을 닥칠 테니까.”
“…….”
박동걸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스스로 물러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 반응이 궁금했다. 시선을 돌려 찬찬히 얼굴들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안현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었고 솔은 그런 오빠를 보며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보림과 이신우였다. 애초에 그 둘을 타깃으로 박동걸이 얘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둘은 눈에 보일 정도로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긴장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안현 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웬만하면 침묵을 지키던 안현은 옆의 동생을 흘끗 보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이는 내 애인이 아니라 친동생이다. 난 솔이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오빠….”
안솔은 감동한 듯 안현의 몸을 와락 끌어 안았다. 박동걸 또한 그 둘을 보며 미처 그걸 몰랐는지 얼 떨떨히 대답했다.
“남매라. 그건 몰랐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 아까와 같은 사고가 또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하지?”
상황은 꽤나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현을 겨냥할 수 없으니 짐 덩이가 확실한 안솔을 타깃으로 삼아 안현을 압박한다. 박동걸은 결국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걸 선택한 셈이었다. 대신 조용히 나가는 게 아닌 확실하게 사람들은 흔들고 있었다. 안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언덕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분위기가 되었다.
“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말은 좀 길게 했지만, 아무튼 지금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되잖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그래서. 결국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
그래도 전보다 날카로움이 줄어든 입담녀가 묻자 박동걸은 바로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제대로 된 팀이란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