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38
01037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웅웅웅웅!
윙윙 우는 웅혼한 선율에 귀가 먹먹해졌다.
화아아악!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기를 찢어 가르는 소리.
앞머리가 나부낄 정도의 거친 바람 소리.
고막을 연신 강타하는 폭발음과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
그리고 성 아래서 부르짖는 처절하게 절규하는 소리….
그야말로 온갖 느낌이 김수연의 오감을 마구잡이로 자극한다.
그 모든 것이 그친 건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소음이 서서히 멎은 후, 주위는 거짓말처럼 창졸간 조용해졌다.
느껴지는 거라곤 넘어갈 듯 말 듯한 자기 자신의 숨소리뿐.
이윽고 김수연은 살그머니 두 눈을 떴다.
“…….”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지옥.
이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고 진도로 발생한 지진의 근원지가 이럴까?
황무지는 조각나다 못해 완전히 뒤집혀진 게 산산이 흐트러진 퍼즐을 보는 듯했다.
이쯤이면 성이 무사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서 있는 악마도 한 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서 있고 누워 있고를 떠나서, 성한 시체를 찾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피 웅덩이 속에 둥둥 떠 있는 무언가를 보고서야 적들이 어떻게 됐는지 겨우 추측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잿더미.
그 속에서 서 있는 거라곤 오직 한 명뿐이었다.
문득 열화 검이 떠올랐으나 김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화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이 전력으로 그 어빌리티를 사용한다고 해도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천천히 뒤를 돌아본 김수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보고 있던 김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
김수연은 순간적으로 배꼽 부근이 확 쏠리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한없이 멀어 보이던 땅의 풍경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몸 전체를 감싸며 끌어당기는 기운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왜냐면 그녀도 자주 사용하던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어빌리티였으니까.
단지 이번에는 주체에서 객체로 바뀌었을 뿐.
찰박.
부츠 밑창에서 전해지는 끈적한 감각에 김수연은 가볍게 숨을 삼켰다.
아래로 내려오니 더욱 참상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시커먼 핏물이 줄기줄기 흘러 강을 이루는 대지에는 밟은 곳을 중심으로 얇은 파문이 이는 중이다.
바싹 마른 땅인데도 단시간에 너무 많은 액체가 터져 나와 흡수를 못 하는 것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발목 아래까지 푹 잠기는 게 거의 늪지대를 방불케 할 정도였으니.
갈가리 찢긴 마족을 보고 있던 김수연은 언뜻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김수현이 핏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빛내고 있다.
“어떻게 할래?”
“…뭐?”
의외라면 의외의 질문이었다.
‘어때?’ 도 아니고 ‘어떻게 할래?’ 라니.
머뭇머뭇하는 김수연의 행동에 김수현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어떻게 하고 싶어?”
문득 커다란 손아귀가 땅에서 신음하는 칠 대 악마, 루치펠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그녀를 확인한 순간 김수연은 깨달았다.
김수현이 일부러 칠 대 악마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바알은 머리통이 부서져 소멸했지만, 리리스와 타나토스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아니, 숨만 붙어 있었다.
또.
“어쩔까?”
김수현이 세 번이나 연달아 던진 질문의 뜻도.
“죽여…. 야지.”
말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왜냐면 알고 있으니까.
눈앞의 남자가 뭘 원하는지.
“정말?”
약간 놀리는 듯한 어조에 김수연은 꽉 주먹을 쥐었다.
“얘네, 악마다. 악마.”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서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얼룩진 과거가 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그녀도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넌 나보다 더한 고초를 겪었을 것 같은데.”
“…….”
“그런데 죽이기만 할 거야? 정말로?”
“…….”
김수연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은 대칭되는 존재이면서도 판이한 부분이 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건 성별이 다르다는 것.
떠올리기도 싫은 일 회차 시절 중, 여성으로서 과연 어떤 고초를 겪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입에 담기도 수치스럽고 끔찍했었던 일이 수두룩할 터.
“나라면 그냥은 안 죽여.”
괜찮다는 듯, 그래도 된다는 듯.
“내가 당했던 것. 네가 당했던 것. 그 이상으로 돌려줄 거야. 난 그랬어.”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감미롭고 달콤하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돌연히 귀가 솔깃해질 만큼.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즐거워진다.
“우린 그럴 자격이 있어. 알잖아?”
김수연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녀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번쩍 눈을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핏빛이 번들번들한 눈동자.
무엇보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덕지덕지 뭉친 악기.
그것은 악의 화신이라도 해도 믿을 거대한 악 그 자체였다.
“아….”
잠시나마 밝아졌던 안색에 믿기 어렵다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처음 봤을 때는 도저히 대칭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 실력을 목격한 후에는 저 남자처럼 되고 싶다고,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방금 바라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부정된다.
동일인이라 느껴지지도 않고, 더는 닮고 싶지도 않아졌다.
기실 알 듯 말 듯하게 느껴졌던 묘한 위화감이 비로소 구체화됐다.
이상향이라 여겼었던 것의 정체는 낙원이 아니라 검은 구렁텅이였다.
그래.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괴물, 혹은 그 이상의 흉포한 존재다.
옆의 악마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럼, 어쩔까?”
네 번째 질문이었다.
그때였다.
“우선….”
김수현이 손에 쥔 머리카락을 한층 강하게 틀어 올리는 동시에.
푹.
번개 같은 속도로 검을 꺼낸 김수연이 루치펠의 목젖으로 칼끝을 꽂아 넣는다.
이내 한 줌의 재로 화하는 칠 대 악마를 보며 김수현이 작은 휘파람을 불었다.
“…관둬.”
짐짓 차분하게 말했지만, 김수연의 목소리는 어렴풋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히 살려 뒀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곤란해.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나아.”
말을 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실제로도 아무렇게나 나온 변명이었다.
“그래?”
“그래.”
“…역시.”
“…….”
사내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니 김수연이 숫제 눈을 내리깔았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따르지 않았다.
격의 차이는 느꼈다.
부러움이나 질투심이라는 감정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실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왜냐면 그녀는 아직….
“너는.”
김수현은 이제 알겠다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김수연은 본능에 따라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랑 다르구나.”
그러나 갑자기 부드러워진 김수현의 목소리는.
“…으, 응?”
왜인지 비난이 아니라 기특해 하는 것처럼 들렸다.
*
“이겼다고요?”
탁자에 앉아 손장난을 하고 있던 제갈 해솔이 고개 돌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악마가 이긴 게 아니라 졌다? 머셔너리 연합이 승리했다?”
“방금 동부에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확실합니다.”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굳은 얼굴로 거듭 끄덕거렸다.
“확실은 개~뿔. 동부 찌라시 따위….”
“그림자 여왕이 직접 전한 정보라 했습니다.”
코웃음을 치던 제갈 해솔이 단숨에 아미를 찌푸렸다.
“아이 씨, 진짜?”
손짓으로 전령을 내보내고 통신 구슬을 꺼내 마력을 흘렸다.
짧은 통신을 마친 후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라고 하네. 이럼 얘기가 달라지는데.”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팔짱을 끼며 말을 잇는다.
“와, 그나저나 대단하네. 진심 어떻게 이긴 걸까요?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 그 셋으로 그만한 군세를 막아낼 리가 만무하잖아요. 더구나 강철 산맥 공략으로 전력도 손상된 상태에서.”
“진짜 그라운드 제로라도 발생했나?” 라고 뇌까리던 제갈 해솔은 예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까부터 혼자서만 떠들고 있었다.
느긋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상석에 시선이 고정됐다.
바라보는 곳에는 어깨가 살짝 노출된 흰색 경장 갑옷을 입은 여인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갈 해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우리 성후 님~. 얼굴이 왜 그래요? 똥이라도 잡쉈어요?”
“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반다희가 벌컥 소리 질렀다.
제갈 해솔은 깔깔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농담 농담. 아무튼, 너무 울상들 짓고 있지 마요. 저쪽의 승전은 분명히 예상외. 하지만 어쨌든 저쨌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랍니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상대의 여유 있는 태도에 반다희의 태도가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응? 좋은 생각? 그런 거 없는데요?”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 해솔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요. 있잖아요. 무시하려는 건 맞는데,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봐요. 네?”
“이게 진짜.”
“다 집어치우고 현재만 보자고요. 강철 산맥은 그렇다손 쳐도, 믿었던 악마 머저리들이 패배했어요. 그 결과 머셔너리 연합은 신 대륙을 완전히 얻었고. 그런데 우리와 동부는 훨씬 전부터 서로 손을 잡았죠.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저는.”
반다희가 크게 성을 내려는 찰나,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현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고뇌에 찬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내키지 않아요.”
“아, 제바아알~. 우리 성스러운 호구 히메 사마~.”
제갈 해솔이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크게 젖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는 게 이럴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유현아는 눈치를 보며 우물거렸다.
“하지만 악마는 공공의 적…. 이잖아요.”
“네네. 물론 그렇죠.”
“사용자 제갈 해솔. 이번만큼은 머셔너리 연합의 공을 부인할 수 없어요. 북 대륙의 숙원이었던 강철 산맥 공략 성공과 악마의 토벌. 그네들도 몹시 힘들었을 거예요. 이제 와서 그걸 가로챈다는 건….”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내가 잘못했네. 그럼 우리 다 같이 환영 파티라도 열어줄까요?”
제갈 해솔이 그건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것처럼 손뼉을 짝 치며 장난스레 말했다.
“맞네. 신 대륙을 차지한 그쪽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성해질 거고. 우리는 구 대륙에 처박혀서 손가락만 쪽쪽 빨다가 잡아먹히면 되겠네. 응, 아주 딱 맞네.”
도를 넘은 태도에 몇 명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번에는 반다희도 나서지 않았다.
제갈 해솔이 비꼬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좌우를 한 번씩 번갈아 본 유현아는 깊은 한숨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승산은?”
짧지 않은 침묵 후, 차승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승산이라 할 게 있나요? 동부야 그림자 여왕과 붉은 송곳니 빼면 쓸모없지만, 인원은 그럭저럭 있으니 고기 방패로 쓸 수 있겠고. 무신, 미친년, 섬광, 신의 방패 그리고 수라마창이 있는 우리와 힘을 합치면 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제갈 해솔은 검은 창을 꼬나 쥔 거한, 공찬호를 흘기며 피식거렸다.
“머셔너리 연합은 강하다.”
“에이, 말은 정확히 합시다. 강한 게 아니라 강했죠. 몇 번을 말해요 도대체. 강철 산맥 공략에 악마를 상대했는데도 전력이 그대로일까요?”
“하지만….”
“아! 물론 그대로일 수도 있겠네요. 뭐 느닷없이 천재지변이 일어나 악마가 다 뒤졌거나, 아니면 짱짱 센 만화 속 영웅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도와줬을 수도 있고. 그렇죠?”
거기까지 말한 제갈 해솔은 싱긋 웃으며 품에서 또다시 통신 구슬을 꺼냈다.
표면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게 또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 저예요. 제갈 해솔.
“어머! 그림자 여왕님! 하루에 두 번이나 연락을 주시는 걸 보니 동부도 어지간히 흥분했나 봐요?”
– 닥쳐요. 농담할 상황 아녜요.
“네?”
– 지금….
“…….”
잠시 후.
제갈 해솔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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