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37
01036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죽여어어어어어어!”
불현듯 황무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리리스의 목놓은 부르짖음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렸다.
무시무시한 압박 속에서 외친 건 장하다 할 수 있으나, 거의 악을 쓴다 봐도 무방한 외침이었다.
왜냐면 울려 퍼지는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으니까.
즉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생겨난 반발심, 아니 발악이라 해야 할까.
이윽고 리리스를 필두로 휘하 악마 군주는 물론, 중급 이상 마족 전원이 급히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렵기는 매 한 가지였으나 피조물로서 조물주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노릇.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칠 대 악마에 대한 마족의 충성심은 말하면 입 아프다.
이유 따위는 불문.
설령 아무 곡절 없이 죽으래도 기꺼이 죽을 정도로 맹목적이다.
그런데 지금 리리스를 따르는 마족들의 행동에 억지가 다분히 묻어난다.
김수현의 위압이 마족의 충성심을 뛰어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평소 일사불란하던 동작은 온데간데없고, 중구난방으로 주문을 펼치는 게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것처럼.
그러나 마구잡이라고 해도 어쨌든 공격은 공격.
물경 수백, 어쩌면 기천을 헤아리는 악마의 마법이 허공을 빼곡히 메운다.
하늘을 가림으로써 성벽 전체를 덮어버리는 거대한 그늘이 질 정도로.
전후좌우.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한 점으로 쏟아지는 마력의 향연은, 어두운 날 세차게 빗발치는 소낙비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기함한 마법사와 사제들이 서둘러 방어막을 전개하려는 찰나.
김수현이 움직였다.
움직였다고 해봤자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단지 오른손에 쥔 무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을 뿐.
이내 칼끝이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세워졌을 때였다.
스르르릉, 스르르릉!
“뭐, 뭐야?”
“어? 어어어어-.”
곳곳에서 쇠가 스치는 소음이 들리더니 성벽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물론, 칼집에 꽂혀 있던 칼까지 모조리 저절로 뽑혀 나왔으니까.
물 흐르듯이 흘러나온 검들은 부지불식간에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워졌다.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김수현이 가볍게 손을 떨친 순간 수백 개의 검이 일제히 요동친다.
그리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처럼 하늘을 부드러이 유영하며 부채꼴로 넓게 펼쳐졌다.
심검(心劍).
검신(劍神)의 가호.
그리고 ‘Apud Migra Eego Gladium’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검의 군주의 권능.
자동 요격 시스템이 발동된 것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과 화살처럼 쏘아지는 검들이 창졸간 한데 어우러졌다.
결과는 순식간에 나왔다.
폭죽 터지는 듯한 폭음이 공중을 떠르르르 울리는 것도 잠깐.
잠시 후, 검게 물들었던 하늘에 구멍이 뻥뻥 뚫리더니 서서히 창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이미 신으로서의 격을 갖춘 김수현의 권능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점차 어둠이 걷히는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검이 마력을 밀어내며 한꺼번에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은, 거의 장관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다음 순간 김수현이 한 번 더 힘차게 손을 떨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처럼.
휘저어진 칼끝이 정확히 아래를 겨냥하자, 끝 간 데 모르고 치솟던 검들이 뚝 멈추며 180도 회전한다.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던 리리스의 두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이내 박쥐 날개를 활짝 펼치는 것과 일대에 칼의 융단 폭격이 퍼부어진 것은.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푹푹푹푹푹푹푹푹!
아차 하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려 여덟 개의 칼이 꽂혔다.
대지에 강제로 박제된 채 푸들푸들 떠는 리리스의 모습은 진정으로 끔찍하고 참혹함의 절정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리리스의 비명은, 다른 곳에서 쇠붙이가 살을 꿰뚫는 소리와 그로 인해 마족들이 지르는 괴성에 금세 파묻히고 말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한바탕 난리가 가라앉고 드러난 풍경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자욱했던 연기가 걷힌 후, 리리스의 휘하 중 땅에 서 있는 마족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조각난 마족의 시체와 시커먼 핏물이 넓게 젖어 번지고 있을 뿐.
단 두 번의 손짓으로 악마 진영 세력의 삼 분의 일이 몰살됐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쿵!
갑자기 커다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근원지를 돌아본 타나토스는, 소리소문없이 코앞까지 쇄도해온 충격파에 후려 맞아 피 분수를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무기력하게 땅을 나뒹구는 그녀를 본 루치펠은, 어느새 성 아래로 뛰어내린 김수현을 확인하고 입을 딱 벌렸다.
“카아아아!”
“크으으으!”
이제는 질서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한낱 아래로 내려왔을 뿐인데 피조물들은 자살 특공대처럼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주군을 지키겠다는 사명감과 두려움이 충돌해 사고가 마비된 것이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김수현을 중심으로 마족으로 겹겹이 채워진 거대한 구(球)가 형성됐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혼신을 다해 김수현을 꽁꽁 에워쌌던 마족들이 송두리째 사방팔방 튕겨 나갔다.
빛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지점에 거울을 놓아두듯.
그리하여 반사된 빛무리가 전면으로 꺾여서 날아가듯.
“귀찮다!”
세차게 몸을 떨친 김수현의 눈동자가 섬뜩한 살기를 튀겼다.
거칠게 팔을 휘두르자, 보이지 않는 칼끝에서 삽시간에 열 자가 넘는 검기가 뽑혔다.
횡으로 휘둘러진 반월 모양의 검기는 막 이 진에서 밀려 나오던 마족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두 동강 내 버렸다.
깔끔한 일격이었다.
여기까지 휘말려 터졌거나 상하가 분리돼 털썩털썩 쓰러지는 마족의 수만 어림잡아 기천.
진소위 비상식의 극치를 달리는 무력이요, 상황이었다.
이쯤 되니 대 악마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하나.
그러나 김수현은 그 하나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눈 깜짝하는 사이 그림자는 또 한 명의 대 악마 지척까지 접근했으니까.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풀썩 주저앉은 바알은 본능에 따라 몸을 돌려 엉금엉금 기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잠깐.
찬란한 백금발과 뒷덜미를 낚아채는 투박한 손길에 자그마한 체구가 휙 들어 올려졌다.
뿌드드드드드드득!
심하게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동거리던 바알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이내 왼손에 꼭 쥐고 있던 곰 인형이, 목 아래만 남은 신체가, 그리고 앳된 소녀의 얼굴이 차례대로 떨어져 대지를 나뒹굴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이 짓밟혀 터지는 동시에 휘하의 권속들도 모조리 한 줌의 재로 화해 버렸다.
이로써 남은 대 악마는 하나.
그러나 김수현은 아직 성에 안 찬다는 듯 번들거리는 눈으로 루치펠의 군세를 응시했다.
그리고 발을 크게 구른 순간이었다.
꿍!
땅이 펄떡거리고.
우우우웅!
웅혼한 마력음이 일대에 짜릿하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김수현을 중심으로 심상찮은 떨림을 동반한 무언가가 곳곳에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김수현 최강의 어빌리티를 꼽으라면 단연 열화 검을 들 수 있을 터.
물론 심장에 화정을 품지 않았으니 현재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건 열화 검은 화정을 덧씌움으로써 붙인 일종의 애칭이라는 점.
말인즉 열화의 힘을 담지 못할 뿐이지 어빌리티 자체는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화정이 아니라 신의 그릇으로 변화한 김수현 고유의 격을 담아서.
드드드드, 드드드드!
천지가 진동하고, 부서진 대지가 하늘로 말려 올라가는 괴현상이 발생한다.
그때까지 반응이 없던 루치펠은 느닷없이 양팔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전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모조리 바늘로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루치펠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곧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을 무시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파도가 휩쓸어올 거라는 걸.
그 무자비한 해일 앞에서는 어떤 저항도 무의미하다는 걸.
‘이게 아닌데….’
한편.
성벽에서 지켜보는 김수연은 다른 의미에서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얼굴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직 읽을 수 없는 감정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경악.
그리고 경외감.
김수연 또한 일 회차를 끝내고 이 회차를 시작한 사용자였다.
그런데 십칠 년을 통틀어도 눈앞의 전쟁은 처음 경험하는 종류였다.
몰살, 또는 학살?
혹은 일 인 군단?
아니, 아니다.
김수연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단어나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이 전투를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격렬하면서도 차분하다.
느긋하면서도 냉혹하다.
단 한 번의 손짓에 군세가 깡그리 쓸려나가고,
단 한 번의 떨침에 마족이 우수수 터져 나가며,
단 한 번의 칼질에 진영이 무의미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일을 단 한 명의 사용자가 해냈다.
한 치의 호흡도 흐트러트림 없이 시종일관 악마를 압도한다.
그것은 김수연이 간절히 그리며 바라 마지않던-.
“…….”
그녀가 되고 싶었던, 꿈 꾸던 이상향.
번쩍!
문득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터졌다.
폭발한 섬광들이 가느다란 빛살을 줄기줄기 뻗으며 황무지를 눈부신 빛깔로 물들인다.
잠시 후.
차츰차츰 성 위를 침범해오는 빛을 받으며 김수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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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부터는 옴니버스 최종회의 마무리 격인 Holy Queen을 시작하겠습니다.
부제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딱 오늘 새벽까지만 집중하면 과제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 듯하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독자님들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