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0
01049 Omnibus – Sovereign Of Sword(完). =========================================================================
회의실에 까닭 모를 불안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굳어 버린 탁상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오직 흐르는 공기만이 잔뜩 팽팽해져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다.
폭풍 전야의 상황이 꼭 이럴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모두 숨을 죽인 와중 한쪽에서 예사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김수현이 돌아본 방향에는 제갈 해솔이 홀로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뭔가 억지로 짓누르려 애쓰는 것처럼.
“아까 스스로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이라고 소개했었잖아요?”
“맞습니다.”
“즉 그 세계에서 이 자리에 있는 김수연의 대칭이라는 거겠네요? 성별만 뒤바뀐.”
“물어보려는 게 뭡니까?”
그러자 열 손가락을 엇갈려 맞춘 제갈 해솔이 손등에 천천히 턱을 괴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당신의 세계에서 저는, 아니. 우리는 어떻게 됐나요?”
‘분명히 어떻게 됐을 것이다.’ 라는, 확신하는 듯한 어조였다.
“솔직하게.”
제갈 해솔의 눈동자가 심유(深幽)해졌고.
“죽었습니다.”
김수현은 즉시 답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유현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제가 죽였습니다.”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왜……. 요?”
잠깐의 술렁거림 후, 유현아는 흐릿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 목적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적이었나요?”
“그렇게 보기는 모호한 관계였지요.”
“그럼?”
“삭주굴근(削株堀根)이라는 말이 있지요. 나중에 적이 될 공산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미리 화근을 뽑을 요량으로 일부러 죽일 만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김수현은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유현아는 질렸다는 얼굴로 한 손으로 벌어지는 입을 가리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 어쩜 이렇게 똑 닮았을까?”
제갈 해솔은 원하던 말을 들었는지 생글생글한 얼굴을 되찾았다.
“부럽네~. 누구는 백마 탄 멋진 왕자님이 다른 세계에서 구해주러 오기도 하고~.”
“…….”
“아~. 우리도 누가 와주지 않으려나~.”
“……큭!”
기지개를 켜며 빈정거리기까지 하자, 김수연은 억눌린 신음을 터뜨렸다.
김수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와 김수연은 분명히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성별은 그렇겠죠. 하지만 인성이나 하는 행동은 똑같은 것 같은데?”
“다릅니다.”
“증명할 수 있나요?”
끝도 없이 비아냥거리며 물고 늘어지는데도 김수현의 낯빛은 여전히 잔잔했다.
그때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의 입가에 오묘한 웃음이 스쳤다.
“꼭 건수 하나 찾으려 애쓰는 하이에나를 보는 것 같군.”
낮지만 귓전에 뚜렷이 각인되는 음성이었다.
시종일관 올라가 있던 제갈 해솔의 입꼬리는, 불현듯 미소가 옅어졌다가, 순간적으로 곱절로 진해졌다.
“이제 막말을 하시네. 할 말이 없을 때 하는 특징까지 완전히 똑같네요.”
“애초 답은 정해져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태도에는 타당한 근거와 이유가 있어요. 그걸 설득하지 못한 건 우리가 아니라 그쪽 책임이죠. 아니면 왜 우리가 믿지 못하는지. 당신 옆에 앉은 여자의 만행을 다시 한 번 말해주기라도 할까요?”
“…….”
삿대질을 받은 김수연은 여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꽉 다문 입이 파르르 떨리는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괜찮습니다.”
그때 김수현이 문득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 번 뒤통수를 맞았으니 또 이용당할까 봐 두렵다……. 뭐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요.”
조금이지만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그래요. 이해합니다.”
갑자기 말이 변했다.
“어차피 저는 외부인. 곧 떠나야 할 사람이니 이후 사용자 김수연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 맞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말대로 제가 떠나고 나서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김수연은 말하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처량히 이만 악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더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떨군다.
“그러니까. 합시다. 전쟁.”
김수현은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의자 옆으로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공공의 적 악마는 이미 전면에 드러나 이곳을 제외한 전 대륙을 점령했지만.”
탁자를 돌아 나오며.
“애틀랜타에서 몰아냈고, 악마 군세 절반이 꺾인 절호의 기회인 데도.”
한 걸음.
“지금쯤 전황을 보고받은 사탄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계획을 세우고 신속히 행동으로 옮길 테지만.”
한 걸음.
“테라를 쉽게 공략해 악마를 물 먹일 수 있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어도.”
한 걸음.
“그래도 동맹할 수는 없다. 왜냐면 진정성 없는 동맹 따위는 맺을 수 없으니까.”
또 한 걸음 느긋하게 걸어 나온 김수현은.
“그러니까, 전쟁합시다.”
유현아와 마주 보며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그 진정성이라는 거 말입니다.”
“…….”
“누구는 최전선에서 악마와 혈투를 벌이는데, 누구는 뒤에서 호시탐탐 어부지리를 노리는 게 당신이 그토록 부르짖는 진정성입니까?”
“네, 네?”
뜻밖의 말이었던 걸까.
유현아가 말을 더듬었다.
안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불편했던 일이었다.
“서로 똑같다는 물타기는 하지 마시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태도를 보였었던 것도 아니었는데요?”
정곡이 찔려 안절부절못하는 유현아를 본 제갈 해솔이 재빨리 반박했다.
“모든 원흉은 서부 사건이 벌어졌을 때부터.”
“뒤통수 맞은 것과는 별개로, 악마의 씨앗은 몹시 위험합니다.”
김수현도 바로 말을 끊었다.
“타 대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감염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막말로 북부 연합의 의견대로 했다가 씨앗이 다른 곳으로 전염됐다면?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왜 이래요. 어떤 말을 갖다 붙여도 그녀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어요. 이제 와서 하는 가정은 의미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자 김수현이 조소했다.
“재밌네요.”
“?”
“남부 연합이 배신할 거라는 당신의 주장은 유의미한 가정이고, 제 말은 무의미한 가정입니까?”
“!”
제갈 해솔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달아났다.
유현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피해자잖아요.”
“그래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까?”
김수현은 코웃음을 쳤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추측은 하나하나 들이밀면서 반대로 불리한 추측은 외면하는 거죠?”
“외면이 아니라!”
“어째서 본인의 행동은 정당하고 이해돼야 하며 상대의 행동은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겁니까?”
“그, 그건…….”
“그 이중잣대 언제까지 들이대실 겁니까.”
“…….”
결국, 유현아도 입을 닫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지 않아요?”
순식간에 두 여인을 침묵시킨 김수현은 한 걸음 더 가까이 옮겼다.
유현아가 서 있는 곳으로.
“난 나쁜 짓을 하지만, 자각은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착한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요.”
차가운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였다.
유현아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는 새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아래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칠흑색 갑옷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자기 행동을 모르고. 상대가 나쁘다고, 자신은 무조건 옳으며 착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 그만-.”
“……진심으로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어져요.”
“그만하세요-!”
마지막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유현아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네 말대로 김수연은 서부 사건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북 대륙은 악마의 씨앗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잠깐의 적막이 지나고, 말을 잇는다.
“적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죽이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김수연은 망연자실하게 숙였던 고개를 언뜻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테라 공략의 비밀 하나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지만.”
중앙의 남자는 그녀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설령 누구는 폭군이라고, 또는 호구라고 비난할지언정.”
희미하게 떨리는 두 동공이 사내의 무감정한 눈동자와 맞춰졌다.
“저는.”
그리고 김수현이 말했다.
“아직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그녀가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김수연의 눈이 확 떠졌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는, 나와 다르구나.’
예전에 들었던 말이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때 왜 그런 눈동자로 봤었는지 마침내 이해가 갔다.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리는 중이었다.
한동안 김수연을 응시하던 김수현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유현아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양팔로 자신의 몸을 꽉 껴안은 채로.
“몇 번을 말하지만, 전쟁을 원한다면 하겠습니다. 이 모든 걸 무시할 정도로 원한이 사무쳤다면 말이죠.”
빠드드득-.
이 가는 소음이 흘렀다.
“너무해…….”
“…….”
“그럼……. 저보고……. 어쩌라는……. 건데요……!”
“…….”
떠듬떠듬 이어지는 외침.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걸까.
한 군주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김수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유현아의 모습은 자포자기 그 자체였다.
도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
이래서.
이래서 싫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단지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을 뿐.’
다중 우주 세계에서 들었었던 제로 코드의 말이 뒷덜미를 붙잡는 느낌이었다.
유현아를 배제하는 길은 이미 한 번 걸었다.
그렇다면 이번 한 번쯤은 다른 길로 갈 가치는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한 김수현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를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악마를 증오하는 사용자 김수연을 한 번쯤 믿어보라는 겁니다.”
“…….”
“당신도 그러지 않았나요? 알고 있다고. 이 동맹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이 생각한 바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
흐느낌이 멎었다.
“사용자 유현아.”
부름에 그렁그렁 눈물 괸 연갈색 눈동자가 올라와 간신히 사내를 직시한다.
“북부 연합의 수장은 제갈 해솔이 아니에요. 군주는 바로 당신,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입니다.”
김수현은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코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고된 가시밭길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당신이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뜻 모를 진중함을 담고 있는 눈빛을 보니 유현아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긴장감이었다.
“수천 명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의 신념을 가지고.”
그리고.
“과거에 대해서는 이번 한 번만 눈을 감으세요.”
눈을 감으세요.
그 찰나의 순간, 유현아는 정말로 눈을 감을 뻔했다.
하지만 반쯤 덮이던 눈꺼풀은 부르르 떨리며 갈등했다.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그때였다.
“……부탁드립니다.”
사내의 입에서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간곡한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유현아는 가슴에서 북받치는 무언가를 이기지 못하고.
“전…….”
천천히.
“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가장 많은 분량이 배정됐던 대화 파트가 끝났네요.
어떻게 흥미롭게 풀어갈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내용 자체가 워낙 진부한 감이 있어 지루하게 느끼셨을 독자님들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부터는 진도를 빠르게 쭉쭉 뽑겠습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 유현아를 현지처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면 원래 세계에서 만들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