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4
00014 반으로 갈라지다. =========================================================================
“떠난 사람들 걱정 보다는 지금 당장 우리 걱정부터 하죠. 일단 언덕을 내려가 이 숲을 벗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두를 보고 한 말이 아닌 안현을 지목해 한 말 이었다. 내 시선이 안현을 향하자 자연스레 이유정과 김한별의 시선도 안현으로 넘어갔다. 골목 대장 노릇 좀 해본 경험이 있는지 안현은 시선이 몰리는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흔쾌히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언덕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내려가는 건 좋습니다만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고 가야 할지 고민이네요. 지금 위치도 어딘지 모르니….”
고개를 다시 들어올린 안현은 아직도 데드맨들이 우글거리는 공터와 박동걸 일행이 따라간 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박동걸이 잡고 간 길은 공터와 정반대를 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머리 좀 굴린 것 같지만 내가 볼 때는 그건 절대로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낫지 않을까요.”
그때 처음처럼 조용히 있던 김한별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보자 공터를 기준으로 약 90도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유정은 공터와의 거리를 가늠하는가 싶더니 살짝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공터랑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저기는 공터와 거리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여기 박동걸과 같은 생각한 사람 추가요.
안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같이 생겼는데 제법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인 것 같았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해요. 현재 저것들은 공터로 상당수 몰린 상태에요. 이 숲에 저것들이 고르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한곳에 몰린 만큼 다른 곳은 비어있다는 소리죠.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바로 이 부근일 거에요.”
“공터와 정반대 방향은 그때 소란을 듣지 못하고 그것들이 그대로 있을 수 있잖아.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라.”
안현의 부연설명이 이어지고 김한별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내가 생각한 탈주로 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흡사하다고 할만 했다. 어쨌든 이제 좀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에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아까 그 새끼가 간 방향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아무튼 우리도 이 아래로 쭉 내려가 숲을 벗어나는 걸로 하자. 솔아. 그만 일어나.”
“응? 응!”
안솔은 깍두기처럼 손가락만 빨며 우리들의 대화를 보다가 안현의 말에 황급히 일어섰다. 나와 안현이 나서서 일을 결정하는걸 보며 다들 큰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박동걸이 있을 때보다 얼굴도 분위기도 훨씬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이유정은 박동걸의 고생길이 고소한지 얼굴에 미소까지 보이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인 나와 일행들은 신속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
탈주로를 정한 후 언덕을 내려간 지 약 두 시간 정도 흘렀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길게 뻗어서 그런지 숲 안은 언덕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어둑했다. 두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어두운 숲 속을 우리들은 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는 흙과 풀을 스치는 소리와 규칙적인 호흡만이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며 선두에 선 나와 안현을 뒤따르고 있었다.
음침한 숲은 조용했고 또 생각보다 큼지막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그리고 현재 걷는 속도를 유지한다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숲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능력치가 준수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천사들이 일부러 난이도가 높은 숲 중앙에 떨어뜨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이 숲을 빠져 나가는 게 좋았다. 준비의 방 에서는 의류와 무기들만 있었고 식량 또는 물을 제공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필품들이 있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반나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레스트 룸이나 하루 동안 잠을 자고 지낼 수 있는 세이브 포인트. 그 외의 방법이라면 다른 사용자들을 약탈하거나 아니면 마을에 있는 상점들을 뒤지는 방법도 있었다.
“…오빠.”
“응?”
현재 선두는 안현과 내가 섰고 그 뒤를 안솔과 김한별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정이 맨 후미를 맡은 상태로 우리들은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안솔이 안현의 옷깃을 꾹 잡아 당기더니 발개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나 쉬 하고 싶어….”
“…….”
안솔의 수줍은 말에 모두의 얼굴에도 어색함이 맴돌았다.
‘병신인가?’
좀 정박아 같아 보이긴 했는데 이 정도라니. 현대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안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우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잠깐만 멈춰도 될까요. 동생이 볼일이 있다고 하네요.”
다행히 이유정과 김한별은 순순히 동의했다. 여자들끼린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안솔은 혼자 가는 게 무서웠는지 오빠를 보고 같이 가자고 생떼를 부리는 해프닝은 있었지만 안현은 매정하게 그녀를 혼자 보내고 말았다.
오빠에게 한 소리 먹고 풀이 죽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안솔을 보며 이유정은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녀는 땅바닥에 털썩 앉아 있었다.
“괜찮겠어? 또 그것들이 달려들 수도 있잖아.”
“잘 살피고 있으니까 괜찮을걸. 그리고 나이가 열 아홉인데 화장실도 혼자 해결 못하면 말이 안 돼지. 근데 너 몇 살인데 반말하냐?”
“나? 스물 둘. 너도 반말하면서 새삼스럽게. 그런데 너 나보다 어리지 않아? 딱 봐도 갓 스물이나 스물 하나로 보이는데.”
“나도 스물 둘이다.”
“에~? 동갑이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건 어때요?”
전보다 훨씬 쾌활해진 목소리로 이유정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자 김한별도 심적인 긴장감에 알게 모르게 지쳤는지 그녀를 따라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와 안현도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가운 땅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차피 동생 돌아오면 바로 다시 출발할거니까 간단하게 하자고. 내 이름은 안현이다. 나이는 스물 둘.”
“여기 오기 전에는 뭐 하고 지냈어?”
이유정의 질문에 안현은 곤란한 듯 살짝 얼굴을 긁적였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동네 양아치 짓거리 좀 하면서 알바하고 살았어. 너는?”
“나? 이름은 이유정. 나이는 똑같은 스물 둘. 대학교를 휴학하고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었지.”
경찰 공무원 시험 이라. 그럼 여경이 꿈인가? 왠지 경찰 제복과 이유정의 모습이 상당히 잘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내 서로 경찰이다 양아치다 수다를 나누던 둘은 나와 김한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연건 김한별 이었다.
“김한별. 나이는 스물 하나에요. 대학생입니다.”
“동생이네? 어느 대학교에 다녔어?”
“연세 대학교에 다녔어요.”
“와~! 공부 잘하나 보네. 부럽다.”
잠시 감탄의 눈빛을 보내던 둘은 이내 혼자 남은 나한테로 시선을 돌렸고 덩달아 김한별도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부담스런 시선에 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그들의 기대에 응해주었다.
“이름은 김수현. 나이는 스물 셋. 군인이었습니다.”
“오빠 발견~! 그럼 말 편하게 해요 오빠. 그런데 오빠는 육군 이었어요 공군 이었어요 해군 이었어요?”
“그럼 형이네. 저도 말 편하게 하세요. 형 계급은 뭐였어요?”
아까는 단순히 기가 세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유정은 천성이 발랄한 듯 보였다. 동시에 안현은 군대 얘기가 나오자 호기심이 동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육군 병장 이었어.”
“아쉽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전역 하셨을 텐데요.”
까르르 웃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덧붙였다.
“전역은 했어. 전역 신고하고 돌아오는 날 여기로 오게 됐거든.”
“…….”
“…….”
“…….”
뭐지? 저 동정 어린 시선은? 이 안쓰러운 분위기는?
“왜 다들 그렇게 보는 건데? 난 괜찮아. 별 느낌 없어. 그러니 그렇게 보는 건 그만둬.”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색한 침묵은 우리 사이로 내려 앉았다. 안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고 이유정은 대놓고 불쌍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김한별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볼 정도였다.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이유정은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난 지금 여기 있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 평소 같으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책 덮고 밖으로 뛰쳐나와 친구를 부르겠죠. 휴게실에 앉아서 실컷 수다 떨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고 집에 돌아가면서 내일부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이러고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한다. 안현도 실 웃음을 흘리며 그 대열에 동참했다.
“아마 난 PC방 알바 갔다가 또 외상 하려고 하는 손님과 투덕거리겠지. 돈 안내고 튀는 놈 잡고. 청소 깨끗하게 안 했다고 사장 새끼한테 털리고. 그러다 사모님이 준 치킨 한 마리 뜯으며 카운터에 있다가 퇴근 시간돼서 솔이 데리러 가고. 큭. 아, 형은 집 가면 뭐부터 할 생각 이었어요?”
“나?”
갑작스럽게 화살을 나에게 돌리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10년도 더 된 일이다 보니 잘 생각이 나지는 않는데.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그냥 평범하게 말하기로 했다.
“글쎄. 아마도 집에 가면서 사회의 공기를 듬뿍 마시며 나도 이제 자유인이라는걸 실감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집에 들러서 어머니한테 큰절 올리고 아버지한테 전화도 드려야지.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 좀 푹 담근 다음…. 아니 그러니까 왜 다들 그렇게 보는 건데. 그렇게 불쌍한 동물 보듯이 보지 마. 난 정말 괜찮다고.”
*
안솔이 볼일을 마치고 오는 걸로 소란은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면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귀엽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가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를 소개하고 수다를 나누며 아주 잠시만이라도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안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어두운 숲을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와 안현이 선두에 서고 있다고 해도 길을 인도하는 건 슬쩍슬쩍 내가 하고 있었다. 주변을 감지한 후 데드맨들이 적은 곳으로 일부러 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한 마리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숲의 외곽과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데드맨들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데드맨들이 적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 뿐 이었다.
개중에 가장 걱정되는 건 안솔 이었다. 가장 적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곤 하지만 더 나가면 그곳에도 수십의 데드맨들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랐다. 과연 그 상황에서 솔이 침착히 대응할 수 있을지는 불안했다. 그때 안현이 급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우뚝 서고 말았다.
“왜 그래?”
“쉿.”
안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와 이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데드맨 세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는 게 보였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맛을 다시는 게 우리의 냄새를 맡은 것이 틀림 없었다. 반사적으로 안솔을 쳐다보자 그녀는 양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시각과 청각 말고도 후각으로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숙여봐.”
안현은 얼른 큼지막한 나무 뒤로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솔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유정과 김한별 그리고 나도 얼른 그를 따라 몸을 숨긴 후 녀석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안현이 방패를 바짝 드는 게 보였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데드맨을 죽이는 훈련은 나중에 나가서 하는 게 더 나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나지만 전에 들었던 얘기들 중 통과 의례에서 사용자들은 숲만큼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감지에 걸리는 거리상으론 지금까지 온 거리의 반 정도만 더 가면 우리는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잘 피해왔는데 지금 녀석들을 죽인다면 또다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았다. 데드맨들이 신호를 받고 모여들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었다.
설령 처리한다고 해도 신호를 줄 틈도 없이 단번에 처리해야 하는데 꼴랑 돌멩이 아니면 방패로는 세 마리를 한번에 처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순간 허리에 찬 장검이 미약하게 덜그럭거렸다. 진작 안현한테 줄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데드맨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우리가 있는 나무로 한 발자국씩 옮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